공작이 회귀함 27화
발타자르는 얼굴이 퉁퉁 붓고 온몸이 경련을 일으키는 상황에서도 투지를 불태우는 도원경을 보곤 속으로 감탄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피하는 실력이 무시무시할 정도로 발전하는군.’
비록 몸 상태가 말이 아니라서 그렇지 만약 정상적인 상태에서 재차 맞붙었다면 최소 몇 동작 정도는 충분히 피해낼 수 있을 정도로 도원경은 발전했다.
조금 전만 해도 몸이 따라주지 않아서 그렇지 눈은 발타자르의 움직임을 쫓고 있었다.
“더 해바…… 더해 바아!”
어눌한 발음으로 도원경이 발타자르를 향해 덤벼들었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지 한없이 느린 주먹이었다.
퍼억-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실컷 두들긴 후에야 도원경을 기절시킨 발타자르는 능숙한 동작으로 그의 입에 포션 병을 꽂아 넣으며 기절한 도원경을 바라보았다.
매 앞에는 장사가 없다고 슬슬 눈에서 독기가 빠지고 있었다. 조금만 더 두들기면 곧 순한 양처럼 변해 버릴지도 몰랐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정신을 차리면 두들기고, 기절하면 포션을 강제로 투여하여 정신을 차리게 하는데 중간중간에 대화를 시도해서 조금이라도 반항적인 분위기를 풍기면 재차 같은 일을 반복하니 별다른 수가 있을 리가.
‘한 번만 더 두들기고 나머지는 온두라스로 돌아가 해야겠군’
도원경이 들었다면 기겁할 만한 생각을 하며 발타자르가 헛간 구석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필로폰을 바라보며 물었다.
“한데 자넨 누구인가?”
“피, 필로폰 파판 입니다!”
필로폰이 군기 바짝 든 신병처럼 몸을 경직시키며 대답했다.
“그렇군. 파판 남작의 독자인 필로폰 공자로군.”
발타자르도 소문은 들어 알고 있었다.
파판 남작에게 개망나니 아들이 하나 있다고.
‘그게 이 녀석이란 말이지…….’
잘 되었다 싶었다.
“풀어주게.”
발타자르의 지시에 기수 중 하나가 필로폰에게 다가가 그의 몸을 결박하고 있던 포승줄을 풀어주었다.
자유의 몸이 된 필로폰이 몸을 이리저리 풀더니 이내 도원경에게로 다가가 그의 머리를 발로 후려 찼다.
퍼억-
과연. ‘망나니란 이런 것이다.’를 보여 주려는 듯이 발타자르가 앞에 있는데도 행동에 거침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이 새, 아니, 이자에게 쌓인 것이 많아서요.”
그래도 발타자르의 눈치가 보이기는 했는지 슬쩍 말을 순화하며 변명했다.
“이해하네. 그보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가?”
“무엇을요?”
“이대로 그냥 돌아간다면 파판 남작에게 좋은 소리를 듣기는 힘들어 보이는데.”
정답이었다.
한동안 근신하라는 파판 남작의 말을 어기면서까지 도원경을 잡기 위해 가출했는데 도원경을 잡기는커녕 인질로 붙잡히기까지 했으니 파판 남작이 그에게 잔소리할 것이 눈에 선했다.
“이건 어떤가?”
필로폰에게 발타자르가 한 가지 제안을 꺼내었다.
“안 그래도 내 파판 남작에게 선물을 하나 보내던 참이었는데 그걸 자네가 가지고 가는 걸세.”
“어떤 선물인데요?”
“식량과 병장기라네.”
안 그래도 도원경 때문에 돌아가면 파판 남작에게 한소리 듣겠구나 싶었던 필로폰이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만 해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필로폰이 냉큼 승낙하자 발타자르는 속으로 조소를 금치 못했다.
“그래. 그러면 그렇게 하는 것으로 하고 이 자는 내가 데려가 따로 처벌할 테니 자넨 걱정하지 말고 성으로 돌아가게. 가서 남작에게 점수도 좀 따고.”
발타자르가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말하자 필로폰이 활짝 웃으며 신이 나선 떠들어 대었다.
“다음에 저희 영지에 한번 방문해 주세요. 그땐 제가 거나하게 한번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그래. 기대하겠네.”
물론 발타자르가 파판 영지에 다시 방문했을 때 그 대접이란 것을 받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 * *
연달아 들려오는 소식들에 파판 남작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일찍이 아내를 사별하고 애지중지 키워온 하나뿐인 아들 녀석이 몰래 성을 빠져나갔다가 최근 들어 영지를 떠들썩하게 만든 싸움꾼 녀석에게 인질로 붙잡혔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 하루가 채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걸로도 모자라 영지에 폭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파판 남작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버렸다.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그동안 폭동의 조짐이 조금씩 보이기는 했었다.
영지 순찰을 보낸 병사들이 소리소문없이 사라진다거나, 세금징수를 보내었던 징수관이 농민들에게 폭행을 당하는 등의 일들이 있었지만, 가신들이 이구동성으로 별문제가 아니라기에 그들이 알아서 잘 처리하리라 생각하고 신경 쓰지 않았다.
솔직히 무지렁이들이 일을 내봐야 얼마나 크게 내겠느냐는 마음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일을 벌인다고 해도 충분히 제압할 자신도 있었고 말이다.
그런데 일이 생각보다 심각했던 것인지 막상 일이 터지고 보니 파판 남작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어 버렸다.
“그래. 폭도들의 수가 만 명을 넘어섰다고?”
“예. 말씀드리기는 송구스럽습니다만 개중에는 영지의 병사들도 다수 가담한 터라…….”
“허허…….”
파판 남작이 허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만 명이라면 거의 대다수의 영지민들이 폭도로 변했다는 소리였다. 일단 급한 대로 성문을 닫고 상황을 지켜보는 중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은 악화일로惡化一路를 걸었다.
성내에 주둔 중인 기사와 병사들을 모두 합치면 2천 명 남짓.
폭도들의 숫자가 지금도 늘어나고 있다고 하니 이 숫자로는 얼마 버티지 못할 것처럼 느껴졌다.
“멜리우스와 리스펄 남작은? 그쪽에선 아직도 소식이 없더냐?”
파판 남작이 희망을 담아 묻자 기사 하나가 침통한 표정으로 답했다.
“두 분 남작님들의 영지에서도 현재 폭동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 기세가 심상치가 않아 지원을 보내기가 어렵다는 답만 받았습니다. 오히려 이쪽의 일이 정리되는 대로 지원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이제 보니까 단순히 파판 영지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닌 세 남작령에서 동시에 일어난 폭동이었다. 누군가 뒤에서 사주하지 않는 이상에야 너무 상황이 절묘했다.
“넌 지금 즉시 빌로스 공자님께 이 상황을 알리고 지원을 바란다는 연락을 넣어라.”
파판 남작의 지시에 기사가 대답을 망설였다.
“무엇 하느냐! 어서 통신실로 달려가지 않고!”
그 모습이 답답했던 파판 남작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기사가 눈을 질끈 감으며 대답했다.
“그것이 통신구가 모두 먹통입니다.”
“……뭐?”
“리스펄 남작령과 통신 도중 연락이 갑작스레 끊긴 뒤로 통신구들이 전부 작동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걸 왜 이제야……!”
화를 내려던 파판 남작은 문득 이러고 있을 시간조차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되었다. 이 일은 나중에 따로 문초할 터이니 폭동이 일어나지 않은 인근 영지로 가서 통신을 시도해 보거라.”
“예! 알겠습니다.”
기사가 힘차게 대답하며 떠나갔다.
남작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인질로 잡혀있을 아들 녀석이 무사할지 걱정되었다.
“남작님!”
머리를 식히고 있던 파판 남작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연달아 좋지 않은 소식들만 들려오니 파판 남작이 저도 모르게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또 무엇이냐!”
“온두라스에서 연통이 왔습니다.”
“……뭐!”
파판 남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온두라스라면 최근 발타자르 후작이 점거한 도시가 아니던가!
혹시나 발타자르 후작이 폭동이 일어난 사실을 알아차리고 지원군을 보낸 것은 아닐까 하는 희망이 샘솟았다.
“그래. 뭐라더냐?”
파판 남작이 간절한 희망을 담아 물었다.
“발타자르 후작 각하께서 보낸 이들이 필로폰 도련님을 구출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저희 영지 사정을 아시고 군수품을 도련님과 함께 성으로 보내었다는 소식입니다.”
병사의 보고에 파판 남작은 크게 안도했다.
그가 바라던 지원군을 보낸 것은 아니었으나 납치당했던 아들을 구해 준 것은 물론이거니와 군수물자까지 보내준다고 하니 한 시름을 덜었다.
“다행이군. 다행이야.”
“한데, 도련님을 납치한 죄인 놈을 온두라스로 압송하여 처벌하겠다고 하는데 어찌할까요?”
“어찌하긴. 놈의 처분은 후작 각하께 맡기겠다고 전해라. 그리고 이 은혜는 내가 꼭 갚겠다는 말도.”
한결 여유가 생긴 남작이 다시 자리에 앉는데 이번에는 총관이 그를 부르며 헐레벌떡 달려왔다.
“남작님! 큰일 났습니다!”
마음에 여유가 생긴 파판 남작은 여유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기에 그리 호들갑인가?”
“도, 도련님께서 폭도들에게 사로잡히셨다고 합니다!”
“뭐!”
남작이 재차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도련님께서 군수물자와 함께 오시던 중에 폭도들의 습격을 받아 군수물자는 약탈당하고 도련님은 인질로 사로잡혔다 합니다!”
다리에 힘이 풀린 남작이 털썩-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 * *
“아저씨. 저 이제 알겠어요.”
온두라스로 돌아가는 길에 신시아가 발타자르에게 말을 걸었다.
“무엇이 말인가?”
“파판 남작에게 식량과 병장기들을 보낸 이유요.”
한번 말해 보라는 듯이 발타자르가 신시아를 바라보자 그녀는 자신이 생각한 것을 꺼내었다.
“아저씨는 이 민란을 조기에 진압하기보다는 크게 키우실 생각이에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하고 묻자 신시아는 막힘없이 대답했다.
“파판 남작에게 보내는 것들은 사실 폭도들에게 주려는 것이잖아요. 얘기를 들어보니까 아저씨 병사들이 아니라 굳이 용병들 몇 명만 고용해서 호위를 맡게 한 것만 봐도 뻔하죠. 아저씨가 직접 폭도들에게 군수품을 줄 수는 없으니까 파판 남작에게 보내는 척하며 그들이 물건을 약탈하게 만들어 간접적으로 그들에게 군수품들을 보급하려는 생각이시잖아요.”
파판 남작에게 보낼 식량과 병장기들을 운송할 호위들을 소수의 용병들로 구성했다는 것은 어찌 알았는지는 둘째치고라도 그것으로 이런 추론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내심 감탄했다.
“그리고?”
“아저씨가 이렇게까지 번거롭게 일을 처리하면서까지 폭도들을 지원할 이유는 딱 하나뿐이죠.”
신시아가 말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말을 몰아 최대한 발타자르에게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민란을 키우려는 것.”
순간 발타자르는 신시아가 너무 기특해서 절로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아내었다.
“아저씨는 이 기회를 이용해서 세력을 크게 확장할 생각인 거예요. 제 말 맞죠?”
어서 내 말이 맞다고 대답하라는 듯이 신시아가 발타자르를 빤히 바라보았다. 발타자르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네 말이 맞단다.”
그러면서 손을 뻗어 신시아의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뜨렸다.
“기특하네. 장하다.”
순간 신시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아저씨. 말투가…….”
“내 말투? 말투가 어때서 그러는가?”
의미를 모르겠다는 듯 발타자르가 물었다.
“아니. 조금 전에 분명히.”
말을 놓았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