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26화
해가 떠오르고 발타자르 일행은 야영지를 정리하고 다시 여행길에 올랐다.
야영지 인근에서 벌어졌던 전투는 민란의 전초전이었다는 듯이 이동하는 길마다 파판 영지군과 붉은 십자가 혁명단이 전투를 벌이는 모습이 심심찮게 목격되었다. 본격적인 민란의 시작이었다.
“이거 분위기가 심상찮은데요?”
저 멀리서 승리의 함성을 내지르며 투항한 병사들을 학살하는 혁명단의 모습에 트리스탄이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들이야 상관없기는 한데 애들 데리고 계속 다니기에는 조금 그렇지 않을까요?”
트리스탄이 그녀답지 않게 전투를 꺼려 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신시아와 로젠다르크를 염려한 탓이었다.
발타자르도 아이들을 돌려보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고민을 했지만 의외로 신시아가 나서서 고민을 해결해 주었다.
“전 괜찮아요. 거북하긴 한데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에요. 그렇지 로젠?”
“응? 아, 응.”
예상외로 아이들은 덤덤한 반응이었다.
어제 트리스탄과 그녀의 기수들이 벌인 학살극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던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정말 괜찮은 거 맞아?”
트리스탄이 재차 묻자 신시아가 괜찮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과장된 몸짓을 하며 대답했다.
“정말 괜찮다니까요. 짐이 되려고 따라온 것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진짜 위험하면 아저씨가 다 해결해 줄 텐데요. 뭘. 그쵸?”
신시아는 발타자르에 대한 묘한 믿음을 내비치며 말했다. 이에 발타자르는 어깨를 으쓱여 보이는 것으로 답해주고는 트리스탄에게 말했다.
“자네 생각보다 강한 아이들이니 그리 걱정할 것 없네. 그리고…….”
발타자르가 말을 끝맺지 않고 한곳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일행들 역시 발타자르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정보 수집을 위해 선발대로 보내 두었던 기수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스무 명 모두 다친 곳 하나 없이 말을 몰아 발타자르 일행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응?”
그런데 그들을 파판 영지군으로 오해했는지 혁명군들이 그들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20명의 기병과 30명의 보병이 겁도 없이 기수들을 향해 선공을 가했다. 몇 명의 궁수들이 그들을 향해 견제사격을 가하고 기병들이 말에 박차를 가하며 빠른 속도로 접근했다.
순식간에 혁명군의 기병과 트리스탄의 기수들이 충돌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트리스탄이 짧은 평을 내렸다.
그녀의 기수들은 모두 야만족 출신의 전사 중에서도 무척이나 보기 드문 기병들로 발타자르의 군 내에서도 용맹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하는 이들이었다. 그 실력 또한 두말할 것 없이 출중하고 말이다.
단 한 번의 충돌로 혁명군의 기병들이 와해 되었고, 뒤이어 보병들 역시 기병들과 같은 전철을 밟았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50여 명의 병력을 압살한 기수들은 어디 마실이라도 다녀온 것처럼 여유로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보고드리겠습니다. 장군께서 찾으시는 이의 행방을 찾았습니다.”
막 전투를 치르고 온 이답게 피에 흠뻑 젖은 기수들 중 가장 선임병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고생했네. 그래. 어디에 있던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이곳에서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민가에 있는 것을 오는 길에 확인하고 왔습니다.”
“고생했네.”
발타자르가 기수의 어깨를 두드려주는데 기수가 말했다.
“한데 조금 서두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왜 그런가?”
“정보를 수집하러 갔던 다른 녀석들의 말을 들어보니 파판 영지 곳곳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그 기세가 심상찮은 것이 조만간 영주성을 치려는 듯 보였다고 했습니다.”
로마노프 공작가의 내전의 시발점이 되는 농민봉기였다.
회귀 전보다는 빠른 전개였지만 이미 짐작하고 있던 것이었다.
본래의 흐름대로였다면 온두라스가 보유한 에버나스 평야를 집어삼키기 위해 인근의 세 남작이 세율을 올리며 군비 확장에 열을 올리고 가혹한 수탈을 일삼는다.
그러던 와중에 세 남작이 온두라스와 영지전에서 대패하는 것이 시발점이 되어 영지민들의 불만이 하늘을 찌르게 되고 이때 붉은 십자가 혁명단이 개입하면서 농민봉기가 발생하게 된다.
농민봉기의 시기가 앞당겨진 것은 발타자르가 온두라스를 점거하면서 세 남작이 닭 쫓던 개 꼴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자네는 지금 즉시 약속 장소로 가서 준비한 물건들을 파판 영주성으로 보내라고 이르게.”
반란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도 일정을 서두르거나 온두라스에 주둔 중인 병력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지 모를 물건을 파판 영주성으로 보내라고 지시하는 발타자르에게 신시아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저씨. 준비한 물건이 뭐예요?”
“식량과 병장기 들일세.”
“그걸 왜 파판 남작에게 주시려는 거예요?”
“내가 데려가려는 자가 파판 영지에서 큰 소동을 일으키고 있는데 그냥 데려갔다가는 뒷말이 나올 테니 보내는 것이네.”
발타자르의 말에 신시아는 더욱더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파판 남작의 입장에서 도원경은 범죄자일 뿐일 텐데 그런 이를 데려가면 데려가는 거지 굳이 식량과 병장기들을 주면서까지 데려가려는 것은 무어란 말인가. 그것도 이런 상황에서 말이다.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신시아에게 발타자르가 웃으며 말했다.
“숙제일세. 이 여행길이 끝나기 전까지 내가 왜 파판 남작에게 굳이 식량과 병장기를 보내는 것인지 숨은 속내를 알아내 보게.”
* * *
와아아─
농가의 헛간에서 도원경과 함께 휴식을 취하고 있던 필로폰은 갑작스레 들려오는 함성에 화들짝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찬란했던 제국을 위하여!]
[형제들이여 일어나라!]
[악덕 영주를 몰아내고 영광을 되찾자!]
밖의 분위기가 심상찮음을 직감한 필로폰이 몸을 부르르 떨며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보게.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것 같은데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안 되지 않겠는가?”
팔을 베고 누워있던 도원경이 그런 필로폰을 힐끔 바라보고는 피식 웃어 보였다.
“그러면. 어디로 가려고?”
“당연히 영주성으로 피신해야지 않겠는가.”
필로폰은 말을 하다가 저도 제 말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이내 도원경의 눈치를 보았다.
“수작 부리지 말고 그냥 얌전히 쉬고 있어.”
도원경의 말에 필로폰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볼 때 여기서 한마디만 더 했다가는 또 죽어라 주먹질을 해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무식한 새끼. 주먹질이면 다 되는 줄 아나 보지.’
속으로 도원경을 욕하는 필로폰이었지만 그도 남 말 할 처지는 아니었다.
그렇게 그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별안간 헛간 문이 열렸다. 두 사람이 동시에 열린 문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특이한 복장을 한 여인이 있었다.
새하얀 늑대 가죽을 뒤집어쓴 연분홍빛 머리칼의 미인이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뺨에 그려진 푸른색의 독특한 문신이었다.
“야만족……?”
필로폰이 중얼거리는데 여인이 필로폰과 도원경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돌연 소리쳤다.
“찾았다!”
* * *
기수들의 안내에 따라 도착한 마을에서는 한참 농민봉기가 일어나는 중이었다. 변변한 무장조차 없이 농기구들을 들고선 그들의 구호를 외쳐대는 모습에 트리스탄이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그냥 가면 충돌은 불가피해 보이는데요?”
트리스탄의 물음에 답한 것은 신시아였다.
“그건 아닐걸요? 저 사람들. 저희가 접근하면 지레 겁먹고 도망칠 거예요.”
신시아의 말이 맞았다.
금방이라도 영주성으로 쳐들어갈 기세인 농민들과 달리 발타자르 측은 하나같이 준수한 무장에 말을 타고 있었다.
지금은 저렇게 기세등등한 모습을 보이지만 막상 발타자르의 일행들이 접근하면 싸우기는커녕 도망치기에 급급할 것이 분명했다.
“그냥 가세. 수도 그리 많아 보이지 않고 사실 그리 위협적이진 않지 않은가.”
발타자르의 말에 일행들은 천천히 말을 몰아 마을로 접근했다.
* * *
신시아의 말대로 발타자르 일행이 접근하자 농민들은 비명을 지르며 황급히 도망치거나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했다.
발타자르는 그런 마을 사람들을 한곳에 모아두고 기수 10명에게 감시하도록 지시하곤 나머지 일행들을 풀어 마을을 수색했다.
그리고 수색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트리스탄이 도원경을 발견하곤 소리쳤다.
“찾았다! 대장! 여기예요!”
트리스탄의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가니 그곳에 도원경이 있었다. 발타자르의 기억 속 모습보다는 앳된 얼굴이었지만 도원경이 분명했다.
“니들은 또 뭐야. 아니다. 지금은 피곤하니까 그냥 가라.”
도원경이 제 뒤통수를 북북 긁으며 말했다.
그 행동에 트리스탄이 미간을 찌푸렸다.
“와. 너 되게 싸가지 없다?”
“남이사.”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치고 순식간에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어느샌가 꺼내 든 손도끼를 빙빙 돌려대며 트리스탄이 말했다.
“이거. 꼭 필요한 녀석이에요?”
트리스탄의 목소리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발타자르만 아니었으면 진즉에 도원경의 목을 날려 버렸으리라.
“이거 완전히 미친년이네. 네가 뭔데 날 물건 취급해?”
도원경이 어처구니없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순간 트리스탄의 도끼가 도원경의 목을 노리고 휘둘러졌다. 도원경은 인지조차 하지 못한 일격이었다.
만약 발타자르가 재빨리 트리스탄의 손목을 낚아채지 않았다면 이 일격에 어깨 채로 팔 하나가 날아갔을 것이었다.
“진정하게.”
잔뜩 흥분한 트리스탄을 다독이듯 어깨를 두드려 주곤 발타자르가 앞으로 나섰다.
도원경이 등 뒤로 식은땀을 흘리며 발타자르를 바라보았다. 자신은 인지조차 하지 못한 일격을 막아낸 사내였다.
‘저 여자도 만만찮아 보이는데 이 녀석은 더 강한 것 같은데?’
앞으로 나선 발타자르는 도원경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감회가 새로웠다. 그를 보자마자 칼 프란츠를 상대로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우세했던 전투가 도원경에 의해 뒤집혔던 일이 떠오르다 보니 더 그랬다.
“자네에게 선택지는 딱 두 가지라네. 날 따라오든가. 아니면 이 자리에서 죽든가.”
발타자르가 도원경을 도발했다.
다른 용사들이었다면 천천히 설득해가며 휘하로 끌어들였을 테지만 도원경만큼은 그런 식으로 해서는 수하로 들이기가 어려웠다.
칼 프란츠라는 선례가 있으니 일단 한판 크게 붙어 찍소리도 못하게 한껏 두들겨 놓은 후에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 현명했다.
“미친년에 이어서 미친놈까지 등장했네. 이거 세트로 지랄을 하네.”
도원경이 기습 공격을 가해왔다.
그러나 발타자르는 가볍게 손을 휘둘러 도원경의 검을 쳐내고는 발을 걸어 도원경을 넘어뜨렸다.
쿠당탕─
저항은커녕 반응조차 하지 못한 도원경이 바닥에 넘어졌다.
“이 새끼가……!”
도원경이 이를 갈며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발타자르의 발길질에 안면을 걷어차여 그대로 뒤로 날아갔다.
“헉!”
이를 두 눈으로 목격한 필로폰이 입을 쩍- 벌렸다.
도원경이 어떤 놈이던가.
병사들은 물론이고 영지의 기사들조차 손쉽게 쓰러뜨리던 싸움꾼이었다. 그런 녀석이 이렇게 허무하게 당할 줄이야!
“빌어먹을…….”
코에서 흐르는 코피를 옷소매로 닦아내며 도원경이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거의 동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발타자르가 그의 앞에 불쑥 모습을 드러내더니 복부에 주먹을 때려 박았다.
퍼억-
일순간 그의 몸이 한 뼘 정도 떠올랐다.
발타자르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이어 주먹을 내질렀다.
퍼버버벅─
살벌한 소리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도원경의 몸은 땅에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은 채 허공에서 이리저리 주먹질을 당했다.
이윽고 발타자르의 주먹질이 멈추고 도원경의 몸이 땅에 떨어졌을 때 도원경은 눈을 까뒤집은 채 기절해 있었다.
발타자르는 그런 도원경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일행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포션.”
“……네?”
신시아가 멍한 얼굴로 되묻자 발타자르가 재차 말했다.
“포션 좀 꺼내 주게.”
곧이어 기수들 중 한 명이 포션을 가져와 발타자르에게 건네주었다. 발타자르는 기절한 도원경의 입을 벌리고 포션을 들이부었다.
꿀꺽- 꿀꺽-
도원경은 무의식중에도 아무런 저항 없이 포션을 마셨다. 이윽고 한 병을 모두 비워내자 도원경이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발타자르가 그런 도원경을 별 감흥 없는 눈동자로 내려보며 말했다.
“다시 시작하세나.”
그 한마디에 정신을 차려가던 도원경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