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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이 회귀함-23화 (23/183)

공작이 회귀함 23화

파판 영지는 온두라스와 인접한 세 남작령 중 하나로, 쉬지 않고 말을 몰아 달려간다는 전제하에 반나절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많이 겪어야 빨리 성장하는 법이라는 발타자르의 지론에 의해 파판 영지로 향하는 일정에는 신시아와 로젠다르크도 참가하였다.

트리스탄과 그녀의 기수들 30명까지 포함하여 파판 영지로 향하는 인원은 총 34명.

제법 많은 인원이었지만 도원경의 행방을 수소문하기 위해 20명의 기수를 선발대로 먼저 보내두었기에 현재는 일행이 그리 많다는 느낌은 없었다.

“강 하나 건넜을 뿐인데 온두라스랑은 분위기가 사뭇 다르네요.”

피범벅이 된 얼굴을 천으로 닦아내며 트리스탄이 말했다. 피에 흠뻑 젖어 찝찝할 만도 한데 그녀는 무척이나 상쾌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방금 전까지만 해도 격한 전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파판으로 향하는 여행길은 처음에는 평화로웠지만, 강을 건너 파판 영지에 진입하는 순간 농민들의 습격을 받았다.

아니, 비록 무장은 빈약하고 행색은 초라했지만 다짜고짜 습격을 감행하는 그들은 농민이라기보다 도적 떼에 가까웠다.

물론 그들이 발타자르 일행에 비해 숫자가 많았다고는 하나 변변한 무장조차 하지 못한 그들이 발타자르 일행의 상대가 될 리가 만무했다.

발타자르가 나설 것도 없이 트리스탄과 그녀의 기수들은 양 떼 속에서 날뛰는 늑대처럼 거침없이 그들을 도륙했다.

“사, 살려주세요.”

그렇게 한바탕 학살극이 벌어지고 발타자르 일행을 습격했던 무리 중 생존자는 트리스탄 앞에 무릎을 꿇고 손발이 닳도록 빌고 있는 사내뿐이었다.

“죽일까요?”

트리스탄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도끼를 사내의 목에 겨누며 물었다. 그러자 사내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는 바지에 오줌을 지리며 애원했다.

“잘못했습니다! 먹고살려다 보니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사내는 자신의 기구한 사연을 줄줄 내뱉었다.

사내의 말에 따르면 그는 파판 영지의 소작농이었는데 파판 영주가 내건 세율에 맞추어 세금을 지급하지 못해 농지를 회수당하고 가족들은 농노로 끌려갔다고 했다.

이에 사내는 절망하며 자살을 결심하였으나 그때 그에게 한 무리가 다가왔다고 했다.

그들은 스스로를 ‘붉은 십자가 혁명단’들이라 칭하며 ‘신과 소통하는 자’ 오스왈드 간다르바와 함께 마신이 강림할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대업을 준비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한낱 무지렁이인 사내에게는 크게 와닿지 않은 이야기였지만 악덕 영주들을 몰아내고 썩어 빠진 제국을 다시 찬란했던 과거로 되돌려 미래를 대비하려 한다는 그 말에 그들의 무리에 가담하기로 결심했다.

빈곤하였지만 소소한 행복이 가득하던 일상을 무너뜨린 파판 영주에게 복수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그들의 무리에 가담한 사내는 붉은 십자가 혁명단의 동지들과 함께 군자금 확보를 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말이 군자금 확보지 실상은 도적질이나 다름이 없었다. 사람들이 자주 왕래하는 길목에 자리를 잡고 일반인이라면 돈을 수금하고, 병사라면 죽여 그들이 가진 무구를 약탈했다.

그러던 중에 발타자르 일행을 발견하고 평소대로 움직였다가 이 꼴을 당한 것이었고 말이다.

사내의 말이 끝나자 발타자르는 미간을 찌푸렸다. 민란이 코앞까지 다가온 것이 피부로 실감 되었다.

발타자르는 차가운 눈동자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정이 딱하긴 하지만 동정심이 들지는 않았다.

붉은 십자가 혁명단이 내건 대의는 올바를지 모르겠으나, 그들이 행하고 있는, 혹은 앞으로 행할 일들은 결코 올바르다 할 수 없다.

“죽이게.”

발타자르의 사형선고가 떨어지고, 사내가 재차 애원하기도 전에 트리스탄의 손도끼가 사내의 목을 쳤다. 거친 피 분수가 뿜어져 나오고 사내의 머리가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무엇이 그리도 억울한지 눈조차 감지 못한 사내의 수급을 바라보던 발타자르는 힐끗 신시아와 로젠다르크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사람이 죽는 것을 처음 봤는지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 모습이 안쓰럽기는 하지만 가서 달래주거나 위로해 주지는 않았다.

“일단 조금만 더 이동하다 야영하는 것으로 하세.”

더 이상 이동할 분위기가 아니기도 하고, 슬슬 해가 저물 기미가 보였다.

아직 도원경의 정확한 행방을 모르기도 하고 서두른다고 선발대로 보낸 기수들이 빨리 돌아오는 것도 아니니 이쯤에서 쉬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 * *

파판, 멜리우스, 리스펄.

이 세 남작은 온두라스와 맞닿은 영지의 주인들로 이슈카 로마노프의 파벌이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남작연맹이라 칭하며 서로 손을 잡고 장차 벌어질 로마노프 공작가의 내전에서 큰 공을 세우겠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때문에 종종 서로의 영지를 돌아가며 모여 앞으로의 계획에 대하여 회의를 하곤 하였는데 이번에는 파판 영지에서 모임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그 모임에서 큰 문제가 하나 발생했다.

비록 미수에 그치기는 하였으나 파판 남작의 아들 필로폰 파판이 리스펄 남작의 여식을 겁탈하려 한 것이었다.

본인 말로는 술에 취하여 실수를 저질렀다고 하는데 딸 사랑이 극진한 리스펄 남작이 이를 그냥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진노한 리스펄 남작이 노발대발하며 필로폰의 목을 쳐야 한다며 난리를 쳤지만 파판 남작이 고개 숙여 사과하며 그에 따른 보상을 약속하고 나서야 일은 마무리되었다.

일찍이 아내를 사별하고 애지중지하며 키운 아들이었다. 사고를 쳐도 파판 남작이 싸고돌기만 하니 올바르게 자랄 리가 없었다.

10살 무렵부터 성에 눈을 뜬 그는 영주관저에서 일하는 30대의 하녀를 겁간하는 것을 시작으로 심심하면 영지의 아녀자들을 겁간하곤 했다. 그 누구도 말릴 수 없는 패악한 녀석이었다.

심지어 필로폰에게 겁간당한 아내와 딸의 억울함을 토로하기 위해 영주를 찾아온 영지민들을 몽둥이로 때려죽이는 만행까지 저지르니 실로 파판 영지의 재앙 그 자체였다.

이런 필로폰이었지만 파판 남작은 단 한 번도 그를 혼내거나 다그치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도저히 용서하지 못하겠는지 필로폰의 뺨을 때리며 당분간 자숙하며 근신해 있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자택에 연금되다시피 한 필로폰이 제 잘못을 뉘우칠 리가 없었다. 오히려 리스펄 영애가 일을 키웠다며 그녀에 대한 복수심을 불태웠다.

그러던 중 한 가지 재밌는 소식을 물어왔다.

파판 영지에 싸움꾼이 하나 나타났는데 어찌나 싸움을 잘하는지 그를 체포하러 갔던 기사가 오히려 실컷 두들겨 맞고 올 정도였다.

때문에 녀석을 어쩌지 못해 파판 남작이 근심하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들은 필로폰은 자신이 녀석을 잡는다면 파판 남작도 화를 풀고 근신령을 풀어줄 것이라 생각했다.

“따라와라! 놈을 잡으러 간다!”

필로폰이 기세등등하게 소리쳤다.

“예? 하지만 남작께서 당분간 근신하고 있으라셨지 않습니까?”

“흥! 놈을 잡는다면 아버님도 화를 푸시고 내게 근신하라 하지 않으실 거다.”

“하지만 요즘 영지 분위기도 뒤숭숭한데 괜히 나가셨다가 크게 다치시기라도 하면…….”

수하 녀석이 그런 필로폰을 말려보려 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오히려 필로폰은 자신을 말리는 수하의 뺨을 후려치며 소리쳤다.

짜악-

“에잇! 시끄럽다! 군말 말고 따라오기나 해!”

필로폰은 그길로 곧장 검을 챙겨 들고는 그의 수족을 자처하는 영지의 건달패들을 이끌고 소문의 주인공을 찾아 나섰다.

* * *

파판 영지의 기사 코돔은 도저히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비록 하위 기사라고는 하나 검술 실력만큼은 중위 기사 못지않은 실력이라고 자부하던 그는 투기가 흘러넘치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소문들이 으레 그렇듯이 과장되고 부풀려진 것이라고 생각했던 코돔은 소문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내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한걸음에 달려갔다.

그렇게 달려간 장소에서는 한참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동네 건달패들과 주먹질을 하고 있는 흑발의 사내.

그가 바로 소문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코돔은 멀리서 사내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별거 없네.’

주먹질이 제법이기는 하지만 검을 든 자신의 상대는 되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이에 코돔은 자신만만하게 싸움이 벌어지는 곳으로 다가가 윽박을 지르며 건달패들을 쫓아내었다.

“넌 뭐야?”

그러자 사내가 사나운 눈빛으로 코돔을 노려보았다. 코돔이 그런 사내를 가소롭다는 듯 비웃으며 말했다.

“어디서 주먹질 좀 한다고 자신만만한 모양인데 내가 친히 기사의 무서움을 알려주마!”

코돔이 검을 뽑아 들며 재빠른 몸놀림으로 사내를 향해 달려들었다.

쐐애액─

코돔의 검이 사선으로 휘둘러지며 사내의 몸을 당장에라도 베어 넘길 듯 휘둘러졌다.

미처 반응하지 못한 것인지 사내는 피하려는 움직임도 없이 휘둘러지는 코돔의 검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윽고 코돔의 검이 사내의 몸을 베어 넘기려는 순간.

사내가 한걸음 뒤로 물러나는 것으로 가볍게 코돔의 검을 피해냈다.

이 일격을 피해내지 못하리라 생각했던지 전력을 다해 휘두른 덕분에 일순간 큰 빈틈이 생겼다.

사내는 그 틈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뒤로 물러남과 동시에 왼발을 축으로 삼아 몸을 한 바퀴 회전시키며 코돔의 머리에 돌려차기를 때려 박았다.

퍼억-

제대로 공격이 먹혀들어 갔는지 일순간 코돔이 몸을 휘청거렸다. 그러더니 이내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털썩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터벅- 터벅-

사내가 제 자리에 주저앉은 코돔을 향해 다가왔다.

코돔이 떨리는 눈동자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내는 사나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기사라더니. 별거 없네.”

코돔의 얼굴이 수치심에 붉게 달아올랐지만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제길! 처음부터 마나를 사용했다면!’

후회해 보았지만 이미 때늦은 후회였다.

사내는 실망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역시 남작령이라 그런지 병사나 기사나 죄다 약해 빠졌어.”

중얼거리며 살기 어린 눈동자로 자신을 응시하는 사내를 바라보며 코돔이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기사도 아닌 녀석에게 방심하다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는 것이 무서웠다. 이런 놈에게 죽는 것도 서러운데 죽어서도 손가락질받을 생각을 하니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때 코돔의 등 뒤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놈이 그 싸움꾼이냐?”

얼굴은 보지 못하지만 코돔은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코돔이 모시는 파판 남작의 아들 필로폰이었다.

“이야. 이건 또 뭐야?”

사내가 코돔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즐겁다는 듯이 웃기 시작했다. 그 미소가 무척이나 살벌했기에 코돔은 필로폰을 향해 황급히 소리쳤다.

‘도망쳐!’

그러나 소리 없는 아우성일 뿐이었다.

* * *

“그런데 괜찮으시겠어요?”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아 휴식을 취하던 발타자르에게 트리스탄이 다가와 물었다. 경직된 분위기를 풀려고 그러는 것인지 그녀의 목소리엔 장난기가 흘러넘쳤다.

“무엇이 말인가?”

뜬금없는 질문에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묻자 트리스탄은 대뜸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오늘 가웨인 경 복귀 날이잖아요. 그러고 보니 오는 길에 아가씨를 모시고 온다고 했던 것 같은데.”

트리스탄의 말에 발타자르는 몸을 움찔거렸다. 오늘이 가웨인의 복귀 날이라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심지어 아이린까지 함께 오는데도 말이다. 가웨인이 한바탕 잔소리를 하는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일이 바쁘다 보면 깜빡 잊을 수도 있고 그런 것이니 말만 잘한다면 가웨인과 린도 이해해 줄 걸세.”

애써 합리화를 하는 발타자르였다.

“아닐 텐데. 가웨인 나리 말하는 거 들어보니까, 아가씨가 저번부터 벼르고 있다던데.”

이제는 좀 살 만해졌는지 아니면 트리스탄의 의도가 제대로 먹혀들었는지 신시아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흠흠.”

발타자르가 헛기침을 하며 못 들은 척했다.

“아가씨는 어떤 분이세요?”

여전히 안색이 파리하기는 했지만 조금 나아진 얼굴로 로젠다르크가 다가와 물었다. 다른 이들도 관심이 있는지 질문 한 번에 시선이 집중되었다.

분위기도 풀 겸 이야기해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는지 발타자르가 입을 열었다.

“린? 사랑스러운 아이지.”

발타자르는 자신의 여동생 아이린을 떠올려 보았다.

“나처럼 연보랏빛 머리칼에. 웃는 미소가 무척이나 예쁘지.”

품에 안아 들면 조막만 한 손으로 목을 끌어안으며 배시시 웃는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했다.

한참 예쁨을 받을 나이에 부모님을 잃은 그녀에게 발타자르는 오라버니였고, 아버지였으며, 어머니였다. 그 역할을 제대로 해 주지는 못했지만.

로마노프 공작가에 볼모로 잡혀있는 그녀를 내버려 두고서 발타자르는 가문을 다시 일으키겠다는 일념하에 전장을 전전했다.

하나뿐인 혈육은 전장을 전전하며 수년간 얼굴 한 번 내비치지 않았고, 그 큰 저택에 홀로 남아 외로운 나날들을 보내었지만 그럼에도 삐뚤어지지 않고 올바르게 잘 자라준 기특한 아이였다.

심지어 만나러 가겠다는 약속도 종종 어기곤 하는 못난 오라버니였지만 그래도 항상 만날 때마다 사랑한다는 말을 속삭여 주던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못 해준 것이 너무나도 많았기에 항상 미안한 마음뿐이던 아이.

“보고 싶네.”

저도 모르게 속마음이 입 밖으로 나온 발타자르였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로젠다르크가 말했다.

“정말 좋아하시나 봐요.”

발타자르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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