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20화
“후작 각하! 전부 오해이십니다! 조금만! 조금만 제게 시간을 주신다면 충분히 다 설명해 드릴 수 있습니다!”
포박되어 끌려가는 중에 온두라스 백작이 연신 발타자르를 향해 애원했다.
“대체 제 영지에서 무슨 일을 겪으셨는지는 몰라도 저와 대화하신다면 오해가 다 풀릴 것입니다! 후작 각하에게 이런 천인공노할 죄를 저지른 놈들을 잡아 목을 베는 것은 물론이고 고초를 겪으신 것에 대한 보상도 만족하실 정도로 해드리겠습니다! 각하! 각하!”
온두라스 백작의 애절한 마음이 발타자르에게 와닿았는지 선두에서 말을 몰고 가던 발타자르가 말머리를 돌려 백작에게로 다가왔다.
“백작.”
발타자르가 나직히 온두라스 백작을 불렀다.
이에 백작이 반색하며 황급히 말했다.
“각하. 제 얘기를 좀 들어주십시오. 제가 다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건 누군가의 농간이 분명합니다.”
“시끄럽네.”
“예?”
순간 온두라스 백작이 얼어붙었다.
“아직도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가?”
“그게 무슨……?”
어리둥절한 모습을 보이는 온두라스 백작을 발타자르가 한심하단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허리를 숙여 온두라스 백작의 귓가에 속삭였다.
“평민들이 자주 하는 말을 빌리자면. 자넨 한마디로 좆된 걸세.”
백작이 벙찐 표정으로 멍하니 발타자르를 바라보았다.
“알겠으면 이제 닥치고 조용히 따라오게.”
말머리를 돌려 다시 선두로 돌아가는 발타자르를 바라보던 온두라스 백작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이내 고래고래 소리쳤다.
“이럴 리가 없다! 네놈! 정말로 발타자르 후작이 맞느냐!”
백작이 발타자르를 향해 달려들려 했지만 그의 몸을 결박하고 있는 포승줄을 쥐고 있는 병사들로 인해 미수에 그쳤다.
그러자 백작은 제 화를 이기지 못하고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쳤다.
“발타자르으으! 네놈이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빌로스 공자님께서 네놈을 결코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더니 이내 황급히 고개를 조아리며 연신 허리를 숙여대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제가 잠시 미쳤나 봅니다. 각하.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내어드리겠습니다. 재물? 영지? 미녀? 말만 하신다면 무엇이든 바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사형을 앞둔 사형수의 모습을 그대로 답습하는 온두라스 백작의 모습에 발타자르가 혀를 찼다.
아직 죽인다는 말도 꺼내지 않았건만 저런 모습이라니.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트리스탄이 온두라스 백작을 가리키며 가웨인에게 물었다.
“제국 영주들은 다 저래요?”
“아닙니다. 전부 저렇지는 않습니다.”
“다행이네요. 제국 영주들이 다 저랬다면 저 정말 자괴감 들었을 거예요.”
“……그렇습니까?”
트리스탄의 말에 가웨인이 쓰게 웃었다.
전부 저렇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영주들이 저랬다.
그리고 저런 자들만이 살아남아 권력을 손에 쥘 수 있는 것이 제국의 현실이었다.
뒤에서 잡담을 나누던 두 사람에게 발타자르가 지시를 내렸다.
“가웨인. 자네는 지금 즉시 광장으로 달려가게. 그곳에 노예 경매가 한창이니 포위하여 도망치는 이들이 없도록 조치하게.”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트리스탄은 싸움 냄새를 귀신같이 맡고는 반색하며 말을 몰아 발타자르에게 다가갔다.
“저는요?”
눈을 반짝이며 바라보는 트리스탄에게 발타자르가 웃으며 말했다.
“트리스탄 자네는 도시 내에 있는 장교급 이상의 지휘관들을 모두 잡아들여 광장으로 끌고 오게. 반항하는 자는 그 자리에서 목을 베어도 좋네.”
그 말에 트리스탄이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멋들어지게 경례를 올리곤 힘차게 대답했다.
“스카디의 은총이 함께하기를! 확실하게 처리하고 올게요!”
그러곤 신이 나서 팔랑팔랑거리며 제 수하들을 이끌고 떠나갔다.
멀어져 가는 트리스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가웨인은 그녀와는 달리 휘하 기사들을 보내는 것으로 지시를 이행하곤 발타자르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뭘 말인가?”
“한바탕 피바람이 불 텐데요? 민심이 흉흉해질 겁니다.”
분명 트리스탄은 도시를 활개 치고 다니며 발타자르의 지시를 수행할 것이 뻔했다. 그것은 맹수를 도심 한복판에 풀어놓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동안 따분했을 터인데 가끔 저렇게 분위기 전환도 시켜주어야 순해지지 않겠는가?”
물론 단순히 이러한 이유 때문에 트리스탄을 보낸 것은 아니었다. 온두라스의 영지민들은 그들의 영주인 온두라스 백작의 수탈에 저항하기보다 순응하기를 택한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에게 이제 와서 제국 신민의 권리다 뭐다 그들의 목에 걸린 족쇄를 풀어준다면 빠른 시일 안에 여러 문제가 발생할 것이 뻔했다.
갑작스러운 변화는 혼돈을 초래할 뿐이고, 투쟁 없는 자유는 그들을 오만에 빠지게 할 뿐이었다.
그것은 발타자르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조만간 로마노프 공작가의 내전이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고 북부는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들 정도로 혼란 속에 빠지게 된다.
그것은 내부를 정비할 시간이 없다는 뜻이었다.
내전에 개입하여 크게 세력을 키울 생각을 하고 있는 발타자르에게는 뒤를 돌아볼 시간조차 아까웠다.
그렇다면 차라리 평상시와 다름없이 영지민의 목을 조이다 서서히 풀어주는 것이 문제가 발생할 확률도 적고 여러모로 낫다는 판단을 내렸다.
때문에 트리스탄을 보낸 것이었다.
다소 잔혹하겠지만 그럼으로써 영지민들에게 알리려는 것이었다. 온두라스의 주인은 바뀌겠지만 여전히 달라지는 것은 없노라고.
“그들을 모두 제거하실 생각이시군요.”
발타자르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던 가웨인이 말했다.
눈치 빠르긴.
“온두라스 백작의 밑에서 온갖 부정을 저지른 이들이네. 물론 이것은 명분일 뿐이고 사실 대외적으로 보여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네.”
“무엇을 말입니까?”
“내가 정의롭다는 것을.”
가웨인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마치 ‘당신이? 정의로워? 정말?’ 이렇게 묻는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그리 보지 말게. 말했지 않았는가. 대외적으로 그런 이미지로 보일 필요가 있다고.”
“그런 이유라면 차라리 그들을 살려주고 갱생시키려 한다는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영지민에게 본보기를 보여줄 수 없지 않은가.”
가웨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장군께선 영지민에게는 온두라스의 새로운 주인이 이렇게 무서운 자다. 하고 알리는 것과 함께 대외적으론 정의롭다는 이미지를 보여주려는 것이군요.”
발타자르가 손뼉을 짝- 하고 치며 대답했다.
“그렇지! 황실에 충성하며, 욕심이 없고 정의로우며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불같은 성정의 사내. 얼마나 이용해 먹기 좋아 보이는가?”
신이 나서 설명하는 발타자르에게 가웨인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뭐, 아무래도 좋습니다만…….”
가웨인이 살짝 말꼬리를 흘리자 발타자르는 그가 혹시 이것을 좋게 보지 않는 것인가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가웨인은 발타자르의 수하 중에선 보기 힘든 정의로운 기사님이니까. 이런 일이 불만일 수도 있었다.
“혹시 자넨 반대하는 것인가?”
하고 묻자 가웨인이 무슨 소리를 하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게 아니라 행정 쪽 관리들은 살려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발타자르가 ‘어째서?’라고 되묻기도 전에 가웨인의 말이 이어졌다.
“참고로 말씀드리지만 전 이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밀렸던 휴가를 떠날 계획입니다. 이후에 서류 더미에 파묻히고 싶으시다면 뜻대로 하시죠.”
발타자르의 머리에 벼락이 내리쳤다.
“아니, 곧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일 텐데 휴가라니!”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휴가라니!
날 두고 휴가라니!
그 많은 서류들은 어쩌고!
“장군께서도 지금 휴가 중이시지 않습니까.”
왜 너는 휴가를 가면서 나보곤 못 가게 하려고 하냐는 듯한 말에 발타자르는 말문이 막혔다.
“……그 휴가 조금만 뒤로 미루면 안 되겠는가?”
“안 됩니다. 그리고 다 자업자득 아닙니까. 장군께서 벌이신 일이니 뒷수습도 장군께서 하셔야지요.”
부탁이 통하지 않자 이번에는 숫제 협박을 해대었다.
“어허! 난 자네 주군일세! 지금 내 말을 듣지 않겠다는 것인가!”
그러나 씨알도 먹히지 않는 협박이었다.
“송구스럽게도 자꾸 이리 나오시면 휴가 일수를 더 늘릴 수밖에 없습니다. 장군.”
얄미운 녀석.
한 마디를 안 지네.
이렇게까지 하는데 빈말이라도 안가겠다고 하면 어디 덧나나?
“행정 쪽 관리들을 살려둔다면 휴가는 취소하는 것인가?”
“그럴 리가요.”
가웨인이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그들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애초에 행정 관련 인사들은 어느 정도 살려둘 생각이었다. 가웨인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3군단에 현재 가장 시급한 것이 행정업무를 처리할 인재들이니 말이다.
“마음대로 하시죠. 물론 그 뒷감당은 장군께서 하셔야겠지만 말입니다.”
결국 발타자르가 포기를 선언하곤 뚱한 표정으로 물었다.
“대체 얼마나 좋은 곳을 가려고 그리 휴가를 고집하는 것인가?”
가웨인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린 아가씨를 모셔 와야 할 것 아닙니까.”
발타자르는 순간 아차 싶었다.
회귀 전에 못 해주었던 만큼 이번에는 세상 그 누구보다 아껴주겠다고 결심했건만 당장에 처리해야 할 일이 많다는 핑계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이를 뒷전으로 미뤄두고 있었다.
둔기로 머리를 한 대 후려 맞은 것같이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발타자르를 바라보며 가웨인이 말했다.
“언제까지 린 아가씨를 볼모로 둘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장군께서 온두라스를 장악한 것이 알려지면 분명 아가씨께 접근하려는 이들이 부지기수일 테니 말입니다. 그리고 지난번에 장군께서 말씀하신 대로 정말 시일 내로 내전이 벌어진다면 가장 안전한 곳은 장군의 곁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당장 로마노프 공작가와 마찰이 생기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아가씨를 모셔 와야지 않겠습니까.”
입이 두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무어라 변명하겠는가.
애초에 온두라스를 방문한 것도 다 린을 만나기 위해서였는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것도 잊고선 온두라스를 장악하는 것에만 열을 올린 것이 바로 발타자르 본인인데.
“알겠네. 다녀오게.”
발타자르의 승낙이 떨어지자 가웨인은 깜빡 잊었다는 듯이 말을 덧붙였다.
“아 참. 휴가는 일주일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순간 발타자르는 휴가를 취소하겠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간신히 꾹 참아내었다.
“……삼일이면 충분하지 않겠나?”
전이 마법진이 있으니 오슬로에 있는 본가에서 짐을 정리하고 이것저것 뒤처리를 마무리한 후에 온다고 해도 넉넉잡아 삼 일이면 충분했다.
그런데 칠일이나 휴가를 가겠다니.
마음 같아서는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말리고 싶었지만 린의 일도 있고 해서 차마 대놓고 말리진 못하고 조심스레 운을 떼 보았다.
“열흘로 늘릴까요?”
괜히 말을 꺼냈다가 본전도 찾지 못했다.
“그렇다면 나도 함께 가는 것은 어떤…… 알겠네, 알았어. 그만하겠네. 그러니 제발 그 한심하단 표정은 저리 치우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