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19화
온두라스 백작은 선택을 해야만 했다.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이대로 저항하느냐, 저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느냐.
두 가지 선택지 모두 그리 썩 달갑지 않은 것이지만 어찌 되었든 선택을 해야 하니 후자를 선택하기로 결심했다.
전자는 그야말로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 선택이 마냥 손해 보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 3군단이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전부 발타자르 후작이 온두라스에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것이었다.
때문에 중요 관건은 발타자르 후작이 온두라스에 있느냐, 없느냐였다. 있다면 큰 문제이나 없다면 이 일을 빌미로 3군단에게 큰 빚을 지울 수도 있는 것이었다.
이것은 온두라스 백작에게 있어 위기임과 동시에 기회였다. 이 기회를 잘 살릴 수만 있다면 로마노프 공작가의 후계 구도에 큰 변화를 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었다.
복잡한 북부의 정세를 감안하면 최악의 상황도 염두에 두어야 하겠지만, 그 최악의 상황이 온다고 해도 빌로스 파벌의 핵심 중 하나인 자신에게 감히 손을 대지 못할 것이란 자신감이 있었기에 온두라스 백작의 선택에는 더 이상 망설임이 없었다.
“좋네! 성문을 열도록 하겠네. 단! 후작 각하를 찾는 것에 나도 동행하겠네.”
“좋으실 대로.”
온두라스 백작의 제안을 가웨인이 흔쾌히 승낙했다.
구구궁─
굳게 닫혀 있던 온두라스의 성문이 열리고, 가웨인을 비롯한 3군단의 군세가 온두라스로 진입했다.
* * *
“……?”
두 눈을 감고선 다가올 죽음을 기다리던 아그리파는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자 의아함을 느끼곤 눈을 떴다.
그러자 담벼락에 등을 기대고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발타자르가 보였다. 그의 표정은 무언가를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왜 죽이지 않으십니까?”
“고민 중이라네.”
“무엇을 말입니까?”
아그리파가 되묻자 발타자르는 뭘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넬 살릴지. 말지. 그걸 고민 중이라네.”
처음만 해도 발타자르는 아그리파를 죽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검은 산양 기사단을 쓰러뜨리는 순간 자신에게 맞서기를 빠르게 포기하는 아그리파의 모습을 보곤 문득 제법 쓸 만한 패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열 랭크급의 고급 전력이 흔한 것은 아니지만 심성이 나쁜 데다 심지어 충성심도 없어 보였다. 전형적인 소인배였다.
이것만 놓고 볼 때는 썩 매력적인 인재는 아니었다. 하지만 하는 짓을 보아하니 제법 잔머리를 굴릴 줄 아는 데다 눈치도 제법 빨라 보였다.
가웨인을 제외하면 죄다 무식한 싸움꾼만 득실거리는 수하들을 생각한다면 이런 녀석 한둘쯤은 있어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온두라스의 관리를 맡기면 제법 볼만 할 것 같단 말이지.’
감시역을 붙여두고 목줄만 잘 채워 둔다면 쓸 만할 것 같다는 판단이 섰다.
“살려주도록 하지. 단, 조건이 있네.”
살려주겠다는 말에 아그리파가 얼굴에서 체념의 빛을 지우곤 눈을 빛내었다. 왜 살려주겠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살려준다니 일단 살고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무엇입니까?”
“우선 첫째. 내가 온두라스에 억류되고, 고문받은 것은 모두 온두라스 백작의 지시였다고 증언해야 하네.”
그 말에 아그리파는 깨달았다.
‘이자가 온두라스를 노리고 있구나’ 하고 말이다.
슬슬 발타자르가 왜 자신을 살려두려는 것인지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알겠습니다.”
아그리파가 일말의 고민도 없이 제안을 승낙했다.
어렵지 않은 선택이었다.
명예는 땅에 추락하겠지만 최소한 목숨을 건질 수는 있으니까 말이다.
“둘째. 자네 손으로 그동안 고생한 온두라스 백작이 푹 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네.”
순간 아그리파는 말문이 턱 하고 막혔다.
설마 제 손으로 온두라스 백작의 목숨을 취하게 한 후 토사구팽하려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아! 물론 자네는 온두라스 백작이 그동안 행했던 불의를 참지 못하고 벌인 일로 해야 할 걸세. 주군의 불의를 참다못해 스스로의 명예를 저버리면서까지 정의를 구현한 정의로운 기사!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씨익 웃으며 말하는 발타자르의 모습이 무척 섬뜩하게 보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네에게 불리한 증언을 할 만한 이들 역시 모두 처리해야 하겠지?”
발타자르는 대외적으로 욕심이 없고 황실에 대한 충성심이 깊다고 알려져 있었다. 오죽하면 야만족의 전리품 대다수를 황실에 진상해 올릴 정도였다.
때문에 황실에 충성하는 이는 멍청이라는 인식이 강한 제국의 현 상황에서 발타자르가 가진 효용성을 탐낼지언정 그를 견제하려는 권력자는 없었다.
야만족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북부의 영웅이라는 명성과 그가 가진 3군단의 지휘권은 효용 가치가 충분하지만 결국은 주변에 널리고 널린 사냥개 중 하나일 뿐이다.
라는 것이 발타자르에 대한 권력자들의 평가였다. 하지만 지금 모습을 보니 발타자르가 무척이나 저평가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위험한 자다.’
황실에 충성하고 욕심이 없다는 자가 굳이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는 것을 지금껏 숨기고 있었던 것만 보아 대외적인 평가와 달리 속에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거기다 말을 들어보니 온두라스 백작을 쳐내고 온두라스의 실권을 장악할 요량인 것 같은데 3군단의 지휘관인 그가 온두라스를 장악한다면 북부의 권력자들이 가만히 두고 보지 않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자신감에 가득한 저 모습을 보고 있자면 무언가 사전에 조치를 해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지닌바 능력이 출중하고, 야망도 있었으며, 처세술에도 능한 것 같았다. 그리고 이런 이들은 대개…….
‘권신權臣이 되는 법이지.’
아그리파는 결심했다.
발타자르가 건넨 동아줄을 잡기로 말이다.
“절 믿으십니까?”
“믿지 않네. 자네 같은 종자들은 언제 제 주인의 등을 찌를지 모를 자들이지. 속에 늘 칼을 품고 있는 자를 믿을 리가 없지 않나.”
“그러면 왜……?”
발타자르가 아그리파에게 손을 내밀며 대답했다.
“자네 말고도 맹수는 많이 기르고 있거든. 거기서 하나 더 늘어난들 뭐가 다르겠나.”
아그리파는 멍하니 발타자르가 내민 손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내 마주 손을 내밀며 손을 맞잡았다.
우드득─
발타자르가 맞잡은 아그리파의 손을 갑작스레 비틀어버렸다.
“큭- 갑자기 왜……?”
밀려오는 고통에 아그리파가 얼굴을 와락 찌푸리며 묻자 발타자르가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좀 소심하거든.”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었지만 아그리파는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그저 자신의 머릿속에 있던 발타자르에 대한 위험도를 조금 더 상향시킬 뿐이었다.
* * *
“어떤가. 내 말대로 온두라스에 계시지 않지 않은가?”
온두라스 백작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가웨인에게 말했다. 3군단의 병사들이 온두라스를 이 잡듯 뒤지며 발타자르를 찾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아무런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글쎄요. 아직 전부 찾아본 것이 아니니 조금 더 기다려 보시죠.”
가웨인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발타자르가 이곳에 없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지금 어디선가 노닥거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게나. 얼마든지 더 찾아보게.”
불안한 기색은 오간 데 없고 시종일관 방실방실 웃는 낯짝이 썩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가웨인은 온두라스 백작에게서 신경을 끄고는 옆에서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트리스탄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불만에 가득 찬 얼굴로 보건대 기대했던 전투가 없으니 저리 심통이 난 것이 분명했다. 저러다 사고라도 치는 것은 아닌지 불안하기는 했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장군께서 알아서 하시겠지.’
발타자르가 돌아오는 대로 휴가를 내고 한동안 푹 쉴 생각을 하고 있던 가웨인에게 온두라스 백작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그런데 말일세.”
“무엇입니까?”
“만약 후작 각하께서 온두라스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이 증명되면 어찌할 생각인가?”
꿍꿍이가 있는 그 물음에 가웨인이 피식 웃었다.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는 쉬이 짐작이 되었지만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추후 따로 논의를 한 후에 그에 따른 충분한 보상을 할 것이니 걱정 마시지요.”
가웨인의 말에 온두라스 백작이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닐세. 내 어찌 북부를 수호하는 3군단에게 대가를 바랄 수 있겠는가. 그것도 행방불명 되신 총사령관 각하를 찾는 일인데 말이야.”
능구렁이 같은 놈.
슬슬 운을 떼는 그 모습에 무슨 꿍꿍인지 들어나 보자는 심정으로 가웨인이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온두라스 백작을 바라보았다.
“당연히 협조해야 할 일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3군단의 병사들이 도시를 수색하고 다니니 영지민들이 불안해한단 말이지. 영주로서 그들의 불안감을 해소시켜 주어야 할 터인데…….”
온두라스 백작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장교 하나가 소리치며 헐레벌떡 달려왔다.
“차, 찾았습니다!”
달려와 가웨인에게 보고하는 장교를 보곤 온두라스 백작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뭐!? 찾다니? 무엇을?”
장교가 힐끗- 온두라스 백작을 보곤 다시 가웨인에게 보고했다.
“총사령관께서 지금 이리로 오고 계십니다!”
그의 말대로 길목의 저편에서 발타자르가 아그리파와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한데 발타자르의 행색이 말이 아니었다.
의복은 해져 넝마가 되어 있었고, 머리는 산발이었다.
어디서 큰 난리라도 겪고 온 몰골이었다.
“무, 무슨…….”
온두라스 백작은 무언가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수고했네. 바쁠 텐데 안내해 주어서 고맙네. 가서 일 보게나.”
“예, 그럼.”
아그리파가 허리 숙여 인사하곤 사라졌다.
그 모습에 온두라스 백작은 당황해서 입만 뻐끔뻐끔거렸다.
이 난리가 벌어질 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다가 이제야 나타나서는 발타자르를 제 앞에 데려오곤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린 아그리파의 행동에 말문이 턱 하고 막혔다.
온두라스 백작은 대체 왜 발타자르 후작이 온두라스에서 그것도 저런 처참한 몰골로 나타난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발타자르가 느긋한 걸음걸이로 온두라스 백작을 향해 걸어왔다. 순간 백작은 시간이 한없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모든 것이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작. 접대는 아주 잘 받았네.”
채챙─
발타자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3군단의 병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동시에 온두라스 영지군 역시 검을 뽑아 들며 3군단의 병사들과 대치하려 했지만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듯이 3군단의 병사들이 일제히 검을 휘두르며 그들의 목을 베어버렸다.
순식간에 거리에 붉은 선혈이 낭자하며 비릿한 피 냄새가 물씬 풍겼다.
그 갑작스러운 상황에 머리가 새하얘지는 것만 같았다.
일단 무어라 말이라도 꺼내야겠다는 생각에 온두라스 백작이 눈을 질끈 감곤 소리쳤다.
“오, 오해십니다!”
발타자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오해는 무얼. 융숭한 대접을 받았으니 나 역시 그에 걸맞은 대접을 해주는 것이 도리에 맞지 않겠는가?”
필요 없어!
하고 온두라스 백작이 속으로 소리쳤다.
그러나 감히 입 밖으로 낼 엄두는 나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당장에라도 목이 달아날 것만 같았다.
“오는 길에 보니 광장에 좋은 자리가 있더군. 그리로 가세나.”
광장? 온두라스 백작은 재빨리 머리를 굴려 지금 광장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떠올려 보았다.
‘……설마?’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온두라스 백작을 엄습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