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18화
“미치겠군.”
성벽에 오른 온두라스 백작은 성벽 아래로 펼쳐진 군세의 위용에 혀를 내둘렀다. 절대 저들과 맞서서는 안 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군단 전체가 규격화된 강철 갑옷으로 무장된 3군단에 비해 온두라스 영지군 측은 대개가 급소만 간신히 가리는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다.
거기다 3군단은 야만족과의 수많은 전투로 단련된 강병인 것에 반해 영지군은 정규군이라고는 해도 변변한 전투 경험 하나 없었다.
차라리 수라도 적었다면 어찌 뻗대어 볼 텐데 병력의 규모 면에서도 현저하게 밀렸다. 성벽을 방패 삼아 버틴다고 해도 하루나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성문 위에 도착한 온두라스 백작은 3군단의 선두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사내를 발견했다.
태양처럼 밝게 빛나는 금발에 수려한 외모는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였다.
‘저자가 3군단의 지휘관이겠군.’
온두라스 백작이 사내, 가웨인을 향해 외쳤다.
“제국의 북부를 지켜야 할 군대가 어찌하여 제국의 도시를 향해 칼날을 들이미는 것인가!”
가웨인이 말을 몰아 성문으로 접근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저희 총사령관께서 현재 온두라스에 억류되어 계시다는 첩보를 받았습니다. 무슨 연유에서 저희 총사령관 각하를 억류하고 계신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이라도 풀어주신다면 아무런 불상사도 없이 조용히 물러날 것입니다.”
온두라스 백작으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대체 없는 이를 어떻게 내어놓으란 말인지.
혹시나 해서 성문으로 오는 길에 집사를 시켜 발타자르 후작이 온두라스를 방문한 것을 본 이가 있는지 수소문해 보았지만 발타자르 후작은커녕 3군단과 관련된 이를 보았다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내 따로 조사해 보니 후작께서 온두라스를 방문하셨다는 것을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네. 혹여 다른 곳에 계신 것을 착각한 것은 아닌가?”
속뜻을 직역하자면 온두라스에는 없으니 다른 곳을 알아보라는 뜻이었다.
“백작 각하. 저희는 총사령관께서 온두라스에 억류되어 계시다는 확증이 있기에 군을 이끌고 온 것입니다.”
온두라스 백작은 속으로 분통이 터지는 것을 꾹 참아내었다. 대체 없는 이를 어떻게 내어놓는단 말인가!
혹시 발타자르 후작은 그저 명분일 뿐이고 온두라스를 치기 위해 저리 수작을 부리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이 일었다.
“내 분명 후작께서 온두라스에 계시지 않다고 말했지 않은가! 정 그렇다면 직접 찾아보게나!”
“좋습니다. 성문을 열어주시지요.”
가웨인의 대답에 온두라스 백작은 순간 아차 했다.
설마 이것이 저들이 원하는 것인가?
괜히 성문을 열어주었다가 3군단의 병력이 도시 안으로 진입하는 순간 일이 걷잡을 수 없이 더 커질 것처럼 보였다.
“내 요구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그리 해주겠네.”
“그것이 무엇입니까?”
“10명. 딱 10명까지일세. 온두라스에 들어올 수 있는 인원 말일세.”
“불가합니다.”
“그렇다면 성문을 열어줄 수 없네.”
온두라스 백작의 말에 가웨인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백작 각하. 저희가 이런 시시한 언쟁이나 벌이자고 이리 대군을 끌고 왔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명백한 협박이었다.
“만약 백작 각하께서 저희 측의 요구를 거절하신다면 송구하옵게도 저희가 직접 온두라스의 성문을 열어젖히고 총사령관 각하를 찾아볼 수밖에 없습니다.”
쉽게 말해서 당장 발타자르를 내어놓지 않는다면 강제로 성문을 뚫고 들어가겠다는 소리였다.
“무례하오! 감히 온두라스 백작 각하를 겁박하는 것이오!”
장교 하나가 나서며 소리쳤다.
가웨인은 대답 대신 작게 손짓했다.
뒤에서 따분하단 표정으로 이를 지켜보던 트리스탄이 가웨인의 수신호를 보곤 피식 웃으며 재빠른 손놀림으로 활시위에 화살을 걸고는 길게 뒤로 잡아당겼다.
활이 비명을 내지를 때까지 활시위를 잡아당기던 트리스탄이 활시위를 놓자 화살이 대기를 찢어 갈기며 섬뜩한 파공음과 함께 쏘아져 나갔다.
퍼억─
단박에 화살이 소리치던 장교의 머리통을 꿰뚫었다.
장교의 몸이 스르륵 허물어지더니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져 성벽 아래로 툭 떨어졌다.
“무, 무슨!?”
바로 코앞에서 장교가 화살에 맞아 나가떨어지자 온두라스 백작이 크게 당황했다. 아예 막 나가기로 작정이라도 한 것인가!
만약 화살이 자신에게로 향했다면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성벽 아래로 추락한 장교의 꼴이 될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백작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게 지금 무슨 짓인가! 지금 전쟁이라도 하자는 것인가!”
크게 진노한 온두라스 백작이 소리치자 가웨인이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백작 각하께서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신 듯하여 말씀드리는 것입니다만 저희는 요청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장에라도 전쟁을 벌일 기세인지라 온두라스 백작이 저도 모르게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감히! 이러고도 무사하길 바라는 것은 아니겠지! 로마노프 공작가에서 결코 이 일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조급해진 온두라스 백작은 로마노프 공작가의 위세를 빌려 가웨인을 압박해 보려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역효과를 낸 듯 겁을 먹기는커녕 가웨인이 서늘한 안광을 빛내며 말했다.
“마지막 통보입니다. 성문을 여시거나, 지금 당장 총사령관 각하를 모셔 오십시오.”
가웨인이 최후통첩을 선고했다.
“그렇지 않다면 각하께서 다스리시는 온두라스가 잿더미로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셔야 할 겁니다.”
* * *
고문실을 벗어나자 불안한 얼굴로 이리저리 황급히 뛰어다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을 지나쳐 북문을 향해 걸어가자 지나치는 사람들이 힐끗힐끗 발타자르를 바라보기는 했지만 그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더 보란 듯이 사람들이 많은 곳만 골라서 이동했다. 그렇게 걷기를 잠시. 반대편에서 황급히 달려오는 일단의 무리가 보였다.
“단장! 저기!”
검은 산양 기사단과 그들의 기사단장 아그리파였다.
날 발견한 그들은 황급히 발타자르에게 다가왔다.
‘제기랄…….’
발타자르의 행색을 살펴본 아그리파는 눈을 질끈 감았다.
최대한 서두른다고 했는데 한발 늦어버렸다.
‘이자가 발타자르 후작인지는 모르겠으나 만약 맞다고 한다면 큰일이다.’
이대로 발타자르를 3군단에게 보내었다간 아그리파 자신의 목이 달아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방법은 하나인가.’
죽여서 증거를 없앨 수밖에.
그 수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보는 눈이 많기에 당장 이곳에서 일을 치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나 묻겠네, 아니, 묻겠습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발타자르 후작 각하. 맞으십니까?”
아그리파의 공손한 질문에 발타자르가 삐딱한 자세로 되물었다.
“맞다고 한다면 무언가 달라지기라도 합니까?”
그 모습에 아그리파는 발타자르를 죽이려는 결심을 굳혔다.
“죄송합니다. 송구스럽게도 저희가 큰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워낙 도시에 잠입하는 첩자들이 많은지라 오해를 하고 말았습니다.”
아그리파가 허리 숙여 용서를 구했다.
첩자라며 고문실로 보낼 때는 언제고 갑작스레 돌변한 아그리파의 행동에 발타자르가 의아한 듯 물었다.
“갑자기 태도를 바꾼 연유가 무엇이오?”
“3군단에서 후작 각하를 모셔가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현재 도시 내에 3군단과 관련된 인물은 후작 각하뿐인지라 뒤늦게서야 각하께서 3군단의 총사령관이시라는 것을 깨닫고 이리 급하게 달려오는 길이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추후 어떠한 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정중한 그의 사과에 발타자르가 한결 누그러진 기색을 내비쳤다. 이에 아그리파는 내심 안도했다.
‘일단 한고비는 넘겼다.’
남은 것은 인적이 드문 곳으로 유인하여 증거를 인멸하는 것뿐이었다.
“3군단까지 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발타자르는 아그리파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했다.
“알겠네. 안내하게.”
아그리파가 손짓하자 검은 산양 기사단이 발타자르를 호위하듯 둘러쌌다.
“따라오시지요.”
아그리파가 선두에서 앞서 걸어나가고 발타자르가 아무런 의심 없이 순순히 그 뒤를 따라갔다.
* * *
“이보게. 이 길이 맞는 것인가?”
아그리파의 뒤를 따라가던 발타자르는 가면 갈수록 인적이 드물어지는 외곽지로 향하는 것에 이상함을 느꼈는지 걸음을 멈추고선 물었다.
이에 아그리파는 마찬가지로 걸음을 멈추고선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왕이면 좀 더 깊숙한 곳에서 일을 치르고 싶었지만, 이곳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후작 각하.”
“무언가? 설마 길을 잘못 들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물론 그건 아닙니다.”
“그럼 무엇인가?”
스르르릉─
아그리파가 검을 뽑아 들었다.
동시에 발타자르를 둘러싸고 있던 검은 산양 기사단 역시 검을 뽑아 들곤 발타자르를 향해 겨누었다.
“송구스럽지만 이 자리에서 죽어주셔야겠습니다.”
아그리파의 살기 넘치는 모습에도 발타자르가 태연히 물었다.
“내가 발타자르 후작인 것을 알면서도 이러는 것인가?”
“알기에 이러는 것입니다.”
“혹여 내가 후작이 아니라면?”
“그건 그것대로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발타자르가 피식 웃었다.
그 모습에 아그리파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리될 것을 알고 계셨군요.”
“눈에 살기가 흘러넘치는데 내가 모를 줄 알았는가?”
“그렇다면 어찌하여 순순히 따라오셨습니까?”
발타자르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여 보일 뿐이었다.
“죽여라.”
아그리파의 입에서 사형선고가 떨어지고 검은 산양 기사단이 일제히 발타자르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쐐에에엑─
그들의 검이 바람을 가르며 발타자르의 몸을 베어 넘기려는 순간.
발타자르의 신형이 꺼지듯 자리에서 사라졌다.
푸하하학─
동시에 은빛 섬광이 번쩍인다 싶더니 검을 휘두른 기사들의 가슴팍에 긴 검흔이 새겨졌다. 순식간에 기사 일곱이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자네 입장에선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네만.”
어느샌가 모습을 드러낸 발타자르는 느긋한 움직임으로 땅에 떨어진 검을 주워 들었다.
이잉─
가볍게 검을 한 바퀴 돌리자 검이 청아한 검명을 토해내었다.
“썩 좋은 방법은 아닌 듯하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발타자르의 검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휘둘러 졌다.
쉬익- 서걱-
무언가 잘려 나가는 소리와 함께 기사 다섯의 목이 달아났다. 미끄러지듯 그들의 목이 천천히 땅바닥으로 떨어지고, 얼굴이 달아난 목에서 거친 피 분수를 뿜어내며 힘없이 차가운 대지에 그 몸을 뉘었다.
‘빠르다!’
아그리파는 등 뒤로 식은땀을 흘렸다.
본능적으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
“역시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으셨군요.”
아그리파는 태연한 척하며 자세를 고쳐잡았다.
그의 검에서 푸른 오러가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검은 산양 기사단도 마찬가지로 검에서 오러를 줄기줄기 뽑아내며 발타자르를 경계했다.
“쳐라!”
아그리파의 외침을 신호로 오러를 머금은 검들이 일제히 발타자르를 향해 휘둘러졌다. 사각지대까지 모두 장악한 검의 폭풍이 발타자르를 향해 휘몰아쳤다.
휘리릭─
순간, 발타자르의 신형이 둥글게 회전했다.
오러하트가 공명하며 발타자르의 검에서 붉은 오러를 뿜어내었다.
그것은 이 자리에 있는 그 어떠한 오러보다도 선명하고, 강렬한 기운을 풍겼다.
“제길! 피해라!”
저것과 맞서서는 안 된다는 경고가 뇌리를 울렸다.
아그리파가 황급히 검을 휘두르는 기사들에게 소리쳤지만 한발 늦은 경고였다.
꽈과가가강─
붉은 오러의 폭풍이 휘몰아치며 주변의 모든 것을 베어 넘겼다.
같은 오러라도 그 격이 다르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오러를 머금은 검은 산양 기사단의 검들이 속절없이 분쇄되며 오러의 폭풍에 휘말렸다.
“으아아악!”
기사들의 비명성이 울려 퍼지고 아그리파는 이를 악물고 뒤로 물러나며 최대한 오러의 폭풍으로부터 멀어졌다.
이윽고 폭풍이 언제 존재했냐는 듯 자취를 감추었을 때 처참한 광경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골목 이곳저곳에 묽은 선혈이 낭자하고, 토막 난 기사들의 주검이 이곳저곳에 아무렇게나 흩뿌려져 있었다.
강렬한 피 냄새가 휘몰아치며 아그리파의 코끝을 맴돌았다.
“마스터…….”
브라티슬라바.
그 노인과 흡사한 강렬한 기운이 발타자르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당시 느껴졌던 감정들이 아그리파의 몸을 휘감았다.
맹수의 앞에 선 초식동물처럼 온몸이 꼼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그때완 달라졌다고 생각했건만…….’
전의를 상실한 아그리파는 다가오는 붉은 오러를 바라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