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17화
온두라스 백작의 집무실.
창문 너머로 온두라스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가운데 유독 인파가 몰려 있는 광장을 바라보며 온두라스 백작이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참 보기 좋은 풍경이군. 안 그런가?”
후우- 하고 숨을 내뱉자 짙은 담배 연기가 뿜어져 나오며 흩어져갔다. 옆에서 시립해 있던 집사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밀레오 총관이 일을 잘 처리했습니다. 판자촌에서 잡아들인 난민의 수가 500명 가까이 된다고 하더군요.”
“그래? 생각보다 많이 잡아들였군.”
“도시 내에 거주하는 난민의 숫자가 추정하기로 천 명 내외이니 아직 한참 더 잡아들여야 하긴 합니다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한 번에 다 잡아들이는 것보다는 이 정도가 적절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총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온두라스 백작이 인자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지. 아직은 좀 더 노예 경매로 돈을 좀 뽑아내야 하니 말이지.”
온두라스 백작이 창가에 몸을 기대고선 노예 경매가 한창인 광장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좋구만…… 좋아.”
한참을 그렇게 내려다보던 온두라스 백작이 창가에서 떨어지던 순간이었다.
땅땅땅- 땅땅땅-
온두라스의 중심에 위치해 있는 종탑에서 쉴 새 없이 종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비상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크, 큰일 났습니다!”
장교 하나가 집무실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며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무슨 일이냐!”
온두라스 백작이 소리쳤다.
“사, 삼군! 3군단입니다! 3군단이 쳐들어 왔습니다!”
장교의 외침과 동시에 집무실의 창문 너머로 천지를 뒤흔들 거대한 함성이 울려 퍼졌다.
[와아아아─!!]
온두라스 백작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3군단이 대체 언제…… 아니, 왜?”
온두라스 백작은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함성으로 보건대 결코 적지 않은 수가 온 것이 분명했다.
비프로스트 요새에서 야만족을 상대하고 있을 3군단이 대체 무슨 이유로 쳐들어왔단 말인가!
“그것이…….”
장교가 뭔가 알고 있는 눈치였다.
“말하라! 3군단이 대체 왜 대군을 이끌고 온두라스에 왔단 말이냐!”
온두라스 백작의 재촉에 장교가 눈을 질끈 감으며 대답했다.
“3군단의 총사령관이신 발타자르 후작께서 저희 영지에 억류되어 계시다는…….”
“뭐!? 그게 무슨 헛소리야!”
온두라스 백작이 화를 참지 못하고 쾅 하고 집무실의 책상을 내리쳤다. 그런 보고를 들은 적이 없는데 하늘에서 발타자르 후작이 뚝 떨어지지 않고서야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없었다.
누군가의 농간이거나 혹은 온두라스를 노린 3군단의 수작질이라 생각한 온두라스 백작이 코트를 걸치곤 성큼성큼 집무실 밖으로 걸어갔다.
“안내하거라! 내 직접 저들의 지휘관과 만나봐야겠으니!”
* * *
온두라스의 성벽 앞.
지평선 너머로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군세가 온두라스를 둘러 싼 채로 진을 치고 함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하나같이 북부의 냉기로부터 몸을 보호할 털 망토를 덮고 그 아래로 잘 손질된 갑옷과 무구로 무장한 3군단의 병사들은 겉모습만으로도 잘 훈련된 정예군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성인 몸집만 한 타워실드를 전열에 앞세우고 그 뒤로 활시위에 화살을 장전하고 있는 3군단은 지금 당장에라도 일전을 불사할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에 온두라스의 영지군들은 성벽 뒤에 몸을 숨기고선 두려움에 가득 찬 눈동자로 3군단을 바라보았다. 감히 저들에게 맞서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저 대체 왜 저들이 이곳에 왔는지, 그리고 무슨 이유로 저들이 온두라스에 3군단의 총사령관을 내어놓으라고 윽박지르는 것인지 두렵고 무서울 뿐이었다.
군대의 가장 선두에서 성벽을 올려다보고 있는 가웨인에게 트리스탄이 말을 걸어왔다.
비프로스트 요새의 성벽에 비해 그 반이나 될까 싶을 정도로 온두라스의 성벽은 트리스탄에게 무척 높이가 낮다는 인상을 주었다.
“생각보다 성벽이 낮네요? 제국의 성벽은 비프로스트처럼 막 크고 올라갈 생각에 막막한 느낌일 줄 알았는데.”
그런 트리스탄에게 가웨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비프로스트 요새의 성벽 같은 경우에는 협곡을 인위적으로 무너뜨려 그것을 다듬고 성벽으로 탈바꿈시킨 경우인지라 그 높이가 일반적인 성벽들과 궤를 달리할 정도로 드높았다.
“비프로스트 요새가 특별한 경우이고 보통은 다 저 정도 높이입니다.”
“그런가요? 솔직히 저 정도 높이면 다이어 울프도 뛰어넘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다이어 울프는 탈것이 귀한 북부에서 주로 애용하는 맹수로 그 크기가 황소만 하며, 다이어 울프 자체로도 훌륭한 공격 수단이었다.
겨울 전쟁 당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모르는 듯 맹렬히 돌진하는 다이어 울프와 그 기수들의 돌진은 제국군에게 있어 공포 그 자체였다.
“그보다 계속 이렇게 대치만 하고 있을 건가요?”
몸이 슬슬 달아오르는지 트리스탄이 기대에 찬 눈으로 몸을 달싹였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죠. 일단 이쪽의 의사를 전달했으니 조만간 답신이 올 겁니다.”
가웨인의 대답에 트리스탄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개인적으로는 무슨 헛소리냐고 반발했으면 좋겠네요. 이곳에 오면서 손맛을 보긴 했지만 전부 감질났거든요.”
트리스탄이 고운 얼굴로 살벌한 소리를 태연하게 해대었다. 비단 트리스탄만이 아니라 3군단의 무장들 대다수가 이런 성향이 강했다.
야만족들과 하루가 멀다 하고 얼굴을 맞대고 싸워대다 보니 그들을 닮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 싸움을 좋아하고 손속이 잔혹했다.
길들여지지 않는 맹수들.
그들의 고삐를 쥘 수 있는 자는 오직 한 명.
발타자르뿐이었다.
‘골치 아프군.’
최대한 통제해 보고는 있지만 슬슬 한계였다. 가웨인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곤 시선을 돌려 온두라스의 성벽을 바라보았다.
지휘관으로 보이는 자가 계속 병사들을 닦달하는 것으로 보아 조만간 어떠한 형태로든 답이 올 듯싶었다.
순순히 성문을 열고 이쪽의 요청에 응답한다면 아무 문제도 없겠지만 만약 거부한다면 그때는 가웨인도 별 수 없었다.
맹수에게 먹이를 줄 수밖에.
“만약 저들이 응전을 하려 한다면 그땐 부탁드리겠습니다.”
가웨인의 말에 트리스탄이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개미 새끼 한 마리 남기지 않고 싹 다 처리할게요!”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가웨인이 쓴 웃음을 지었다.
* * *
“20실버! 20실버 나왔습니다! 더 없으십니까?”
“30실버!”
“에잇! 50실버!”
온두라스의 광장에서는 노예 경매가 한창이었다.
광장에 설치된 높은 단상 위에서 야만족으로 분장시킨 난민들이 밧줄에 묶인 채 생기 없는 모습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고, 그 옆에선 사회자가 신이 나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경매를 주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노예 경매를 구경 온 시민들과 경매에 참석하기 위한 상인들로 북적였으며 그들 사이로 먹거리를 팔려는 이들이 뒤엉켜 무척이나 난잡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밀레오에게 아그리파가 다가왔다.
“경매는 잘되어 가는가?”
밀레오가 반색하며 대답했다.
“아! 아그리파경! 예. 덕분에요. 그보다 일은 잘 처리하셨습니까?”
“생각외로 별놈 아니더군.”
밀레오가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며 말했다.
“그렇습니까? 고생하셨습니다. 자자. 여기 앉으시죠. 여기 의자 하나 더 가져오거라!”
아그리파가 자리에 앉자 밀레오가 검은 태양 상단의 기가 내걸린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검은 태양 상단에서 이번에 돈을 제대로 쓰기로 마음먹었는지 경매가가 연신 상한가입니다. 이번엔 목돈 좀 만질 것 같습니다.”
온두라스에 검은 태양 상단의 상행을 이끌고 오는 둠이라는 자와 밀레오 사이에는 작은 계약이 있었다.
온두라스에서 평균적으로 경매에 내어놓는 노예의 수는 500명 전후였다.
애초에 노예 경매 자체가 검은 태양 상단에게 노예를 공급하기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다 죽어가던 온두라스의 상권에 숨을 불어 넣기 위한 온두라스 백작의 숨은 의도가 있었기에 실질적으로 검은 태양 상단이 구매하는 노예의 수는 400명 남짓이었다.
해서 경매에 노예를 공급하는 역할을 맡고 있던 밀레오에게 둠은 기존에 나오는 500명에서 추가로 노예를 경매에 내어놓을 경우 따로 수수료를 지급하겠다는 제안을 하였고 밀레오는 이를 냉큼 받아들였다.
비록 그 수수료의 반을 아그리파와 나누어야 하기는 하지만 그가 주는 여러 가지 도움을 생각해 보면 남는 장사였다.
“이번에 경매하는 노예가 모두 920명이니 대충 계산해도 100골드 정도를 수수료로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밀레오의 말에 아그리파가 고개를 끄덕이며 경매를 관람하는데 갑자기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언가 일이 터졌다는 것을 깨달은 아그리파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인지 알아보거라.”
호위를 서고 있던 기사에게 명하자 기사가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3군단! 3군단이다!”
“3군단이 쳐들어왔다! 병사들은 서둘러 성벽으로 향하라!”
기수들이 소리치며 병사들을 소집하고 있었으니까.
3군단이 쳐들어왔다는 소리에 아그리파는 순간 판자촌에서 잡아들였던 장교가 떠올랐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아그리파의 몸이 움직이고 있었다.
“따라와라! 취조실로 향한다!”
* * *
[병사들은 서둘러 성벽으로 향해라!]
[뭘 꾸물대고 있어! 서둘러!]
갑작스레 문 너머가 소란스러워졌다.
밖으로 향하는 계단에 걸터앉아 담배를 태우고 있던 발타자르는 문 너머로 소란이 일자 슬슬 이곳에서 나갈 때가 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가만히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슬슬 질려가던 찰나에 잘되었다 싶었다.
생각대로 가웨인이 발 빠르게 움직여 준듯하니 더 이상 이곳에서 꾸물거릴 시간이 없었다.
후우- 하고 발타자르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짙은 담배 연기가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뿌연 연기는 순식간에 흩어져 사라졌는데 연기에 의해 잠시간 가려졌던 방안의 풍경이 재차 모습을 드러내었다.
아딘을 비롯한 기사들과 고문관은 목이 꺾이거나 사지가 기이할 정도로 뒤틀려진 모습으로 죽어 있었고 그 아래로 붉은 피 웅덩이가 고여 있었다.
방안에 별다른 전투의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즉사한 것처럼 보였다.
툭-
발타자르는 반쯤 태운 담배를 시체들을 향해 내던졌다.
화르륵─
미리 뿌려둔 기름에 불이 붙으며 시체들을 집어삼키는 것은 물론이고 빠른 속도로 사방으로 번져갔다.
이윽고 고문실이 붉은 불길에 휩싸였다. 발타자르는 감흥 없는 눈동자로 그것을 한동안 응시하더니 이내 등을 돌려 계단을 따라 올라가기 시작했다.
“슬슬 나가볼까?”
시간이 되었다.
온두라스 백작이 지금쯤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심히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