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15화
병력의 규모, 원활한 보급선, 지리적 이점 등등…….
야만족에 비해 모든 면에서 한참이나 열세이던 3군단이 아무런 지원 없이 야만족들을 물리치고 끝내 그들을 북부의 동토로 몰아낼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기동력이었다.
북부의 특성상 탈것이 드물었고, 따라서 승마를 익힌 기수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런 점을 착안하여 3군단의 임시 총사령관 알레한드로 발타자르는 병력을 수송할 특수 수송마차를 제작하였고, 이는 곧 전쟁의 승패를 가를 강력한 패가 되어주었다.
북부의 비옥한 옥토 에버나스 평야를 점거한 야만족이 병력들을 정비하며 숨 고르기에 들어가자 알레한드로 발타자르는 병력의 정비보다는 수송마차 제작을 우선하여 모든 여력을 끌어모아 대규모의 수송단을 창설하였다.
몇몇 3군단의 장교들은 이를 두고 쓸데없는 전력 낭비라며 차라리 보급선을 확보하여, 보다 안정적인 전투를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자 간언하였으나 알레한드로 발타자르는 이를 무시하고 일을 강행하였다.
우려 섞인 시선 속에 수송단이 창설되었고, 우연의 일치로 그와 비슷한 시기에 야만족들이 진군을 재개하였다.
그리고 야만족과 3군단의 초전初戰.
수송단의 진가가 드러났다.
야만족은 병력의 규모가 큰 만큼 수많은 갈래로 나뉘어 사방에서 진격해 나가다 보니 비교적 취약한 곳이 여러 군데 존재하였는데, 3군단은 발 빠른 기동성을 바탕으로 그 틈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전장 이곳저곳에서 신출귀몰하게 나타나 분산된 적들을 휩쓸고 다니며 종횡무진하니 적들은 아군의 습격에 제대로 된 방비를 할 수 없었다.
주요 보급창이 습격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병력을 급파하면 이미 잿더미로 변한 보급고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 그런 식으로 피해가 누적된 적들은 결국 최후의 결전.
에버나스 평야에서 이루어졌던 대회전에서 대패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알레한드로 발타자르는 수송단을 해산하지 않고 유지시켰다. 3군단의 주둔지는 대개 산맥이 주를 이루다 보니 수송단을 유지하는 것이 막대한 손해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심지어는 수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큰돈을 들여 3군단의 주둔지에서 에버나스 평야로 향하는 좁은 소로길을 확장하고 정비하여 드넓은 대로를 만들기까지 하며 수송단에 힘을 실었다.
덕분에 비프로스트 요새에서 말을 타고 꼬박 반나절이 걸리는 거리에 있던 베르덴에 7만에 달하는 대군이 불과 하루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지!”
가웨인이 손을 들어 올리며 소리치자 흙먼지를 흩날리며 빠르게 질주하던 군대가 일사불란하게 정지했다.
흙먼지가 서서히 걷히고 선두에 선 기사단과 기마대의 뒤로 지평선 너머를 가득 메운 그 수를 헤아리기조차 힘들 정도로 많은 수송마차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10분간 휴식 후에 진군을 재개한다.”
가웨인이 지시를 내리자 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10분간 휴식’을 큰 목소리로 외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언제 봐도 수송단의 모습은 대단하네요.”
수송마차에서 내려 휴식을 취하는 병사들을 바라보던 가웨인에게 연분홍빛 머리칼의 미인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특이하게도 그녀는 새하얀 늑대의 모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은빛의 경갑으로 무장하고 그녀의 키만 한 장궁을 등에 메고 있는 모습은 날렵한 사냥꾼을 연상하게 했다.
“아, 트리스탄 경.”
트리스탄.
그녀는 야만족과의 전쟁 당시 요툰의 대전사 브라키를 압도하던 알레한드로 발타자르의 무위에 매료되어 전향한 야만족 출신의 기사로 3군단 최고의 명사수였다.
“온두라스까지는 이제 반나절 남았나요?”
“예. 조금 더 서두른다면 두세 시간이면 도착할 겁니다.”
“두근두근하네요. 간만에 시원하게 한판 할 수 있겠죠?”
선물을 기다리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에 가웨인이 쓰게 웃었다. 누가 야만족 출신 아니랄까 봐 싸움 하나는 광적일 정도로 좋아했다.
“아마 생각하신 대규모 전투는 없을 겁니다. 장군께서도 전투는 없을 것이라 말씀하셨고요.”
“에이. 사람 일이 마음대로 되나요? 혹시 모르잖아요. 그리고 말을 안 한다뿐이지 대부분 기대하고 있을 걸요? 겨울 전쟁 이후로 이렇게 대규모로 움직이는 적은 처음이잖아요?”
겨울 전쟁은 야만족과 제국의 전쟁을 칭하는 말이었다.
달리 싸움 귀신이라고도 불리는 야만족들을 상대하려면 그만큼 호전적이지 않고서는 겨울 전쟁에서 살아남기가 힘들었고 따라서 3군단의 병력 대다수가 호전적인 성향이 강했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대규모로 이동하는 것을 두고 병사들 사이에서 은연중 조만간 큰 전투가 벌어질 것이란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아무튼 전 싸움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제국의 풍경은 북부보다 아름다운데 너무 심심하거든요.”
제 할 말만 하고선 트리스탄은 말을 몰아 달려나갔다. 그런 그녀의 뒤로 기병 십수 명이 재빨리 따라붙었다. 척후대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떠난 것이었다.
“저 열정으로 행정업무를 좀 도와주면 좋으련만…….”
멀어져가는 트리스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가웨인이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된 것이 이 군에는 무장은 차고 넘치면서 행정가들은 한 줌조차 되지 않는 것인지 원.
“어휴…….”
속에서 우러나온 깊은 한숨을 내쉬는 가웨인이었다.
* * *
비밀통로를 통해 도망친 신시아와 아이들이 도착한 곳은 판자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작은 공터였다.
“누나, 이제 어떻게 할 거야?”
한 아이의 물음에 신시아가 팔짱을 끼고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냉정하게 판단했을 때 더 이상 온두라스에 아이들이 머물 곳이 없어졌으니 떠나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이 많은 아이들을 데리고 움직였다간 눈에 띄는 것은 둘째치고서라도 성문에서 제지당할 것이 뻔했다.
차선책으로 짝을 맞추어 흩어져 각 성문으로 빠져나간 뒤 약속한 장소에서 만나 움직이는 방법도 있지만, 그렇게 해서 도시를 떠난다고 해도 갈 곳이 없었다.
온두라스에 온 것도 북부의 치안이 몹시도 어지러워 아이들끼리 돌아다니다간 좋지 않은 일을 당할 것이 뻔해서였다.
도시에 계속 있다가는 붙잡혀서 노예로 팔려갈 것이 뻔하고, 그렇다고 도시를 벗어나자니 그 이후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신시아는 결국 결정을 내렸다.
“너희. 여기서 쥐죽은 듯 숨어 있어.”
“설마 아까 그 아저씨 부탁대로 움직이려는 거야?”
한 아이가 묻자 신시아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줄이잖아. 그렇다면 잡아야지.”
‘그렇지만 어른은 믿을 수 없잖아.’ 하고 한 아이가 중얼거렸다. 신시아는 그 말을 못 들은 척하며 로젠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새벽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너희들끼리 도시를 벗어나야 해. 알겠지?”
신시아는 아이들의 대답을 듣지 않았다.
달려가는 신시아의 등 뒤로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못 들은 척하곤 발걸음을 재촉했다.
* * *
베르덴으로 향하기 위해 신시아는 북문으로 향했다. 때마침 북문에서는 상단의 행렬이 줄지어 들어오고 있었다.
검은색 바탕에 미소 짓는 태양이 그려진 깃발과 함께 갖가지 물품들을 산처럼 쌓은 수레들이 도시로 들어왔다. 검은 태양 상단의 행렬은 주변의 이목을 단번에 집중시켰지만, 그중에서도 특히나 신시아의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
상단의 행렬 가장 후미에서 주변 동료들과 낄낄대며 웃고 있는 사내의 얼굴이 분노로 얼룩진 신시아의 동공에 맺혔다.
“더그. 이 쳐 죽일 새끼가…….”
사내의 정체는 신시아와 아이들이 온두라스의 난민촌에서 굶주리며 살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사기꾼이었다. 순간 신시아의 눈앞에 기억 속의 풍경이 펼쳐졌다.
‘혹시 갈 곳이 없니?’
야만족의 침공으로 살고 있던 마을이 사라지고 졸지에 머물 곳을 잃었던 신시아와 아이들에게 처음으로 손을 내밀어 준 성인이었다.
고아라며 박대하고, 괴롭히고, 가진 물건들을 빼앗았던 지금껏 그들이 보지 못했던 어른의 온기에 취해 버렸던 것인지도 모른다.
‘힘들었겠구나. 자. 이것 좀 먹고 다들 힘내려무나.’
따듯한 음식을 제공해 주고 아이들을 이해하는 듯한 그의 말에 절로 경계심이 풀린 아이들은 짧은 시간 사이에 하나둘 그를 믿기 시작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까.
그가 한 가지 제안을 해 왔다.
오슬로에 자신의 집이 있으니 그곳에서 함께 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
‘음……. 이런 제안이 조금 조심스럽기는 한데. 혹시 너희만 괜찮다면 날 따라가지 않을래? 오슬로에 제법 큰 집이 있거든. 혼자 살기에는 너무 넓어서 외로웠는데 너희들이 함께 살아준다면 정말 좋을 것 같거든. 가족은 많을수록 행복한 법이잖니?’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무척이나 수상한 제안이었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자신의 집에 그것도 한두 명도 아닌 수십 명이나 되는 고아들과 함께 살겠다는 그 말은 만약 정말로 순수한 마음에서 그런 제안을 했다고 해도 한 번쯤은 의심해 볼 만 했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말에.
그동안 그가 보여주었던 가슴 따듯해지던 선행들에.
방심이 풀려 버렸고, 의심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좋다고 눈물까지 흘려가며 그의 제안을 수락한 신시아와 아이들은 그를 따라 긴 여행을 떠났다.
제법 긴 여행이었지만 그 시간 동안 그는 한결같은 모습으로 아이들을 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만약 우연히 그와 용병들이 밀담을 나누는 것을 듣지 못했다면.
그래서 그의 계획을 눈치채지 못하고 용병들에게 붙잡혔다면 진즉 아이들과 신시아는 노예로 팔려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천운이 따라 사전에 그의 계획을 듣게 된 신시아는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아이들을 데리고 몰래 도망쳤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이곳 온두라스였다.
천운은 그것으로 끝이었는지 결과는 썩 좋지 않았지만.
난민촌의 생활은 무척이나 궁핍했고, 언제 어디서 아이들을 노리고 달려들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했다.
꾸욱-
신시아는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당장 더그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아니지…….’
문득 신시아의 눈에 더그가 타고 있는 말이 들어왔다.
‘그래. 그 아저씨도 최대한 빨리 가야 한다고 했으니까…….’
휙휙 주변을 둘러보던 신시아는 이내 바닥에서 적당한 돌멩이를 하나 쥐어 들었다. 그러고선 검은 태양 상단의 행렬이 성문을 지나 광장으로 향할 때쯤 행렬의 가장 후미에서 시시덕거리고 있던 더그가 탄 말의 엉덩이를 향해 힘차게 돌을 내던졌다.
퍼억-
단박에 돌멩이는 말의 튼실한 엉덩이를 가격했고, 갑작스러운 고통에 말이 히이잉- 하고 길게 울음소리를 내지르며 앞발을 힘차게 들어 올렸다.
“이 새끼 갑자기 왜 이래!? 우와아악!”
결국 고통에 날뛰는 말 위에서 더그가 낙마했고 돌을 던지는 것과 동시에 달려갔던 신시아는 날뛰는 말의 고삐를 잡아채고선 말 위에 올라탔다.
고삐를 강하게 잡아당기며 말을 진정시킨 신시아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더그에게 퉷- 하고 침을 뱉고는 말을 몰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 어?! 자, 잡아!”
그제야 정신을 차린 더그의 동료들이 황급히 소리쳤다. 하지만 성문의 경비들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바라보기만 할 뿐 도망치는 신시아를 붙잡지 않았고 덕분에 신시아는 아무런 제지 없이 북문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물론 추격자가 따라붙기는 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