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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이 회귀함-14화 (14/183)

공작이 회귀함 14화

발타자르를 포박한 검은 산양 기사들은 그를 어디론가 끌고 갈 거라는 예상을 깨고, 무릎 꿇은 그의 목에 검을 겨눈 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기다리기를 잠시.

낯익은 얼굴의 사내가 포위망을 구성한 병사들 너머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저 녀석……?’

분명 판자촌의 골목길에서 발타자르의 어깨를 망가뜨리려 했던 사내였다.

“이자인가?”

사내는 발타자르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예, 단장.”

“흐음…….”

사내, 아그리파는 발타자르를 내려다보며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가 알고 있는 마스터 중 그 누구와도 닮지 않았다.

겉보기에 평범한 일반 장교 같았다.

마스터가 제 기운을 숨기려고 든다면 눈앞에 마스터를 두고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새로운 마스터가 등장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으니 역시 조금 전에 느꼈던 기운은 그의 착각인 것 같았다.

“복장을 보아하니 장교인 것 같은데.”

아그리파가 발타자르의 앞으로 다가가 쪼그려 앉으며 그와 시선을 마주하며 물었다.

“소속이 어디인가?”

“3군단입니다.”

발타자르의 대답에 아그리파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다른 영지군 소속이면 대충 어르고 타일러 보내면 되겠지만 3군단 소속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차기 공작위를 노리는 로마노프 공작가의 직계들 사이에서도 가장 화제가 되는 인물이 3군단장 알레한드로 발타자르였다.

야만족과의 전쟁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리며 기병대장에서 3군단장 직에 오른 것 물론 백작위에서 후작위로 승작까지 한 북부에 한해서는 영웅이나 다름없는 인물이었다.

심지어 그를 파벌로 끌어들이는 자가 차기 로마노프 공작이 될 것이란 소문도 공공연히 떠도는 판국에 괜히 그와 마찰을 빚을 경우 곤란해지는 것은 온두라스 백작 측이었다.

“3군단이라……. 곤란하군. 그래, 온두라스에 방문한 목적이 무언가?”

“휴가인지라 고향에 가는 길에 잠시 들렀습니다.”

“잠시 들렀다더니 판자촌에는 왜 있었던 거지? 그것도 온두라스 영지군의 행사를 방해하면서.”

“그냥 관광차 발길 닿는 대로 도시를 둘러보던 중에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딱히 영지군과 마찰을 일으킬 생각은 없었는데 다짜고짜 창부터 들이미는지라 부득이하게 싸울 수밖에 없었구요.”

아그리파가 이 말이 맞냐는 듯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의 시선을 받은 병사들이 몸을 움찔거리며 대답했다.

“마, 맞습니다.”

“장교복을 입고 있음에도 다짜고짜 창부터 들이밀었다라?”

아그리파의 중얼거림을 들은 병사들이 두려움에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자칫하다간 이 자리에서 목이 달아날지 모른다는 생각이 병사들을 엄습해 왔다.

“이것 참 미안하게 되었네.”

“아뇨, 괜찮습니다.”

“그런가? 이해해 줘서 고맙군.”

발타자르의 대답에 아그리파가 생긋 웃어 보이더니 다리를 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퍼억-

아그리파의 발이 발타자르이 명치를 후려 찼다. 솔직히 그다지 아프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걸 티 냈다간 일부러 맞아준 의미가 없어지기에 최대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왜……?”

대체 왜 자신을 공격한 것인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발타자르에게 아그리파가 말했다.

“소속을 나타내는 흉장도 떼어낸 채로 온두라스에 방문한 것은 필시 무슨 다른 목적이 있을 터. 네 녀석이 3군단 소속이라는 것을 증명할 길이 없으니 정말 3군단 소속인지. 아니면 다른 영지의 간자인지 알게 뭔가.”

아그리파는 두려움에 몸을 떨고 있던 병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곳에서 있었던 일은 그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는 아니 된다. 무덤까지 안고 가라는 말이다. 알겠느냐?”

아그리파의 말에 병사들이 힘차게 대답했다.

[예!]

그런 병사들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는 아그리파에게 아딘이 다가와 귓속말로 속삭였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정말 3군단 소속이면 곤란해질 텐데요.”

걱정스레 물어오는 아딘에게 아그리파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3군단 소속이든 아니든 흉장을 떼고 영지에 들어온 것으로 보아 무언가 목적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끌고 가서 문초를 해보거라. 뭔가 토해내는 것이 있겠지.”

“하오나…….”

아그리파의 말에 아딘이 당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3군단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들이 아군이 될지 적군이 될지 모르는 판국에 3군단 소속이라고 수상해 보이는 놈을 그냥 풀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아그리파는 발타자르가 3군단 소속이든 아니든 아무래도 좋았다. 만약 3군단 소속이라면 베일에 싸여 있던 3군단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것이고, 아니라면 아닌 대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걱정 말거라. 보아하니 하급 장교 같은데 설령 3군단 소속이 맞다고 해도 혼란스러운 시국에 북부를 돌아다니다 비명횡사한다고 해도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3군단에 소속된 하급 장교만 수백에 달할 것인데 그중 하나가 사라진다고 해도 3군단은 쉽게 움직이지 못할 것이었다.

3군단의 향후 거취에 대해 높으신 분들께서 관심이 무척 많으시니 그들을 향해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현 상황에서 3군단은 쉬이 움직이지 못할 것이었다.

설령 하급 장교의 죽음에 대해 조사를 착수한다고 해도 로마노프 공작가의 내전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북부에서 하급 장교가 어디서 어떤 일을 당했는지 그들이 어찌 알겠는가.

“정보를 토해내거든 적당히 눈치 봐서 목을 베고 인적이 드문 곳에 버려두거라. 영주님께는 내가 따로 보고하마.”

아그리파의 말에도 아딘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자 혼절한 발타자르를 내려다보며 아그리파가 말했다.

“명심하거라. 우리는 온두라스에 잠입한 간자를 색출한 것뿐이다.”

* * *

기사들에게 이끌려 간 곳은 어둠으로 뒤덮인 방이었다. 기사들은 발타자르의 몸을 줄에 묶어 허공 위에 매달아버렸다.

그렇게 대롱대롱 매달린 발타자르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불길에 휩싸여 타오르는 장작의 은은한 불빛 너머로 어둑한 방안의 풍경을 볼 수 있었다.

밖으로 통하는 계단과 주변 바닥에 이리저리 어지럽게 널브러진 고문 도구들이 두 눈 가득 들어왔다.

그것으로 발타자르가 지금 있는 곳이 고문실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이럴 것 같더라니…….’

3군단임을 증명하는 흉장이라도 달고 다녔다면 이렇게 고문실로 향하게 되지는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발타자르의 복장 그 어디에서도 소속을 증명할 만한 것이 없었으니 이리 잡혀 오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솔직히 이렇게 되도록 의도한 것도 있으니 말이다.

‘어찌한다…….’

가웨인이 군을 끌고 오기에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신시아를 만나고 행군을 서두른다는 것을 가정해도 말이다. 그리고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려면 조금 더 이곳에 잡혀 있어야 했다.

‘아이들은 잘 도망쳤으려나?’

온두라스 영지군에게 잡히기 전에 살펴본 바로는 건물 안에 아무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은 데다,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방랑자들의 집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으니 특별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 이상에야 잘 도망갔을 테지.

‘고문은 취향이 아니니.’

방 안의 모습으로 보나 상황으로 보나 고문을 당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어차피 아무리 애를 써봐야 내 몸에 상처 하나 내지 못할 테니까 어울려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저들의 장단에 맞추어주는 것도 여기까지였다.

끼이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탈의한 상체 위로 피범벅이 된 앞치마를 입은 사내가 터벅터벅 계단을 따라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 뒤로는 검은 산양 기사단의 부 기사단장 아딘이 기사 둘을 대동한 채로 따라 내려오고 있었다.

“흐흐…… 이리 누추한 곳에 기사 나리들께서 함께 오실 것까지는 없는데 말입니다.”

고문관으로 추정되는 사내가 그리 말하자 아딘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시끄럽다.”

“예입. 조용히 하겠습니다요. 흐흐. 이곳에 손님이 온 것은 실로 오랜만 인지라 이 미천한 놈이 너무 들떴나 봅니다요.”

“쉰 소리 말고 어서 시작하거라.”

아딘의 재촉에 고문관이 실실 웃으며 대답했다.

“히힛- 그리합죠. 자, 이쁜아. 나랑 데이트할 시간이란다.”

고문관이 고문 도구를 양손에 하나씩 쥐고선 발타자르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어둠 사이에서 화상으로 일그러진 흉측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 가득 희열에 찬 표정을 지으며 다가오는 고문관의 모습은 보고만 있어도 절로 얼굴이 찌푸려지는 모습이었다.

“내가 3군단 소속임을 밝혔음에도 이러는 것이오?”

발타자르가 방 한구석에서 팔짱을 끼고 바라보는 아딘에게 말을 걸었다.

“자네가 3군단 소속이든 아니든 상관 없다네.”

“뒷감당할 자신이 있나 보오?”

아딘이 잠시 한숨을 내쉬더니 대답했다.

“난 그저 지시대로 움직일 뿐이라네. 자네가 어디 소속이건 그건 중요치 않아. 상관으로부터 자네에게 어떤 정보든지 캐내라는 지시를 받았고, 난 그에 따를 뿐일세.”

“총사령관께서 가만히 계시지 않을 것이오.”

분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아딘이 발타자르의 시선을 외면하며 고문관에게 지시했다.

“뭐 하는가. 어서 시작하지 않고.”

아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고문관이 기다렸다는 듯이 발타자르의 손을 덥썩 잡더니 들고 있던 집게를 손톱에 가져다 댔다.

“히히- 예쁜아. 우리 노래 한번 불러볼까?”

그러곤 발타자르의 손톱을 쥔 집게를 비틀었다.

두둑-

“……어라?”

고문관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게 손톱이 뽑혀 나와야 하는데 되려 집게가 부러졌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런……. 이래서 새 걸로 바꿔 달라고 그렇게 요청했는데. 예쁜아, 우리 다른 거로 놀자?”

단순히 고문 도구가 노후 돼서 그런 것이라 치부한 듯 고문관이 이번에는 작은 송곳을 꺼내 들었다. 그러곤 망설임 없는 움직임으로 발타자르의 손톱 밑을 찔렀다.

“이게 다 왜 이래?”

송곳이 휘어버리자 고문관이 신경질적으로 송곳을 내팽개쳤다.

“지금 뭐 하는가?”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아딘이 고문관에게 물었다.

고문관은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제 뒤통수를 긁적였다.

“죄송합니다요. 도구들이 노후 되었는지 다 요 모양 요 꼴입니다요. 제가 누차 윗선에 도구들 좀 바꿔 달라고 요청했는데도 매번 무시하더니 이리되었지 뭡니까. 이래서 사무직은 안 된다는 겁니다요. 기사 나리들이나 저처럼 현장직의 노고를 전혀 모른단 말이지요. 저희가 뭐 중간에서 해 먹으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장비 좀 바꿔 달라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인데 그걸 모르고…….”

고문관의 말이 길어지자 아딘이 손을 내저으며 제지했다.

“알았으니 다른 것으로 다시 해보게.”

“이건 최근에 보급된 것이니 멀쩡할 겁니다요.”

고문관이 다른 고문 도구를 꺼내기 위해 허리를 숙이며 상자를 뒤적거리는 순간.

두둑-

등 뒤로 무언가 터져 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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