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11화
아이들에게 줄 선물과 음식들이 한가득 담긴 수레를 보니 절로 마음이 뿌듯해졌다. 이 정도면 아이들도 기뻐할 테고 신시아도 어제처럼 매몰차게 대하기 힘들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금세 판자촌에 도착하였고 판자촌 특유의 좁은 길목을 따라 방랑자들의 집으로 향했다.
골목길을 따라 걸어가던 도중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사내가 보였다. 사내는 허리춤에 검을 차고 있었는데 발의 보폭이나 손의 굳은살 등으로 미루어 보아 제법 실력 있는 용병 혹은 기사로 추정되었다.
툭-
길이 좁다 보니 피하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사내와 어깨를 부딪쳐야만 했다.
“미안합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딱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상황이고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였다. 어디까지나 겉으로 보기에는 말이다.
‘이 새끼 봐라?’
방금 전 부딪친 부위에서 이질감과 함께 찌릿 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그 짧은 새에 마나를 흘려보낸 것이었다.
만약 내가 일반인이었다면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저녁쯤에야 작은 통증과 함께 어깨가 뻐근하다고 느끼겠지만, 그 역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을 거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면 영문도 모른 채 팔을 쓰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고, 부랴부랴 신전이나 의사를 찾아가도 부정적인 답변만 듣고 절망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최소 고위기사. 최대 로열 랭크다.’
다분히 악의적인 행동이었다.
그런데 이런 수법을 이렇게나 자연스럽게 사용할 정도면 최소 고위기사 이상의 실력자가 분명한데, 그런 실력자가 왜 난민촌을 방문했는지 의아했다.
나처럼 인재를 얻기 위해서 방문한 것은 아닐 테고, 그렇다고 지인이 있어 방문했다고 보기에는 성정이 너무 나빠 보였다.
저런 녀석이 신시아가 머물고 있는 판자촌을 다녀갔다고 생각하니 괜히 기분이 찝찝했다.
‘다음에 만나면 손모가지를 분질러 버려야지.’
당장은 사정상 눈에 띄면 안 되기에 녀석이 내게 헛수작을 부려도 모른 척 당해주었지만 만약 다음에도 같은 수작을 부려 온다면…….
아니, 내 눈에 띈다면 최소 손목 하나는 부러뜨려놓고 차분하게 대화를 나누어볼 생각이었다.
당한 건 배로 갚아 주어야 하는 성격인지라 다시 만난다면 가만히 두고 볼 자신이 없거든.
* * *
온두라스 백작의 집무실.
굳게 닫힌 문틈 사이로 백작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검은 태양 상단과 거래를 튼 것은 정말 행운이었어.”
담배를 태우며 즐거워하던 백작이 후우- 하고 담배 연기를 뿜어내었다.
뿜어져 나온 연기는 곧장 총관의 얼굴을 휘감았는데 총관은 미간 하나 찌푸리지 않고 생글생글 웃기만 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노예의 값을 무척 후하게 쳐준 덕분에 엉망이었던 내성을 복구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번에 거액의 군자금을 빌로스 공자님께 보낼 수 있지 않았습니까.”
야만족이 한창 기승을 부리던 당시.
온두라스 백작은 해일처럼 밀려오는 야만족의 군세에 싸울 생각조차 하지 않고 영지민은 나 몰라라 하고 내버려 둔 채 재산만을 챙겨서 도망쳤다.
그러곤 전쟁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영지로 돌아와 전략적 후퇴였다며 다시 통치를 시작하였지만 그를 비난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온두라스 백작 같은 이들이 한둘도 아니거니와 만약 그랬다가는 목이 달아날 테니까.
여하튼 다시 도시로 돌아온 온두라스 백작은 황폐해진 도시를 보곤 무척이나 막막해했는데 그때 찾아온 것이 검은 태양 상단이었다.
노예를 평균 시세보다 웃돈을 주고서 구입하겠다는 그들의 말에 온두라스 백작은 당장 병사들을 움직여 전쟁으로 터전을 잃은 난민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대놓고 벌이기에는 그도 눈치가 보였는지 병사들을 용병으로 위장시키며 난민들을 잡아들여 판 금액만 50만 골드였다.
그 돈을 바탕으로 폐허나 마찬가지였던 내성을 복구하고 그가 지지하는 빌로스 로마노프에게 막대한 군자금을 보낼 수 있었다.
이 일로 빌로스의 신임을 얻는 온두라스 백작은 빌로스의 지지 세력에서 가장 강력한 발언권을 가진 실세로 등극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온두라스 백작은 노예 경매에 특히나 공을 들였는데 노예 경매 시작 전에 잡아들인 노예의 수로 얼마나 돈이 들어올지 계산하는 것이 요즘 그의 취미생활이었다.
“그래, 이번엔 몇이나 준비되었는가?”
온두라스 백작의 물음에 총관이 기다렸다는 듯이 재빠르게 대답했다.
“예. 300명입니다.”
총관의 대답에 온두라스 백작의 미간이 작게 찌푸려졌다.
“지난번보다 수가 적군.”
불편한 백작의 심기를 눈치채곤 총관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변명하기 시작했다.
“예에…… 그것이 아무래도 그동안 난민들을 하도 잡아들여서인지 이젠 난민들이 뜸합니다. 덕분에 노예 수급에 큰 차질도 있구요.”
쾅-!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는가!”
백작이 책상을 내리치며 소리치자 총관이 황급히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죄, 죄송합니다! 하, 하지만 정말 이젠 난민들도 타 영지로 도망치거나 산속 깊은 곳으로 숨어들어 찾기가 힘들고, 또 납세를 거부하는 이들을 잡아들이는 것도 한계에 달한지라…….”
“그래서. 더 이상 노예 공급이 힘들다?”
노기 어린 백작의 음성에 총관이 다급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아직 노예를 수급할 곳이 있습니다.”
총관의 말에 금방이라도 그를 때려죽일 기세로 벌떡 일어났던 백작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말해보게.”
“그…… 도시 판자촌의 빈민들을 잡아들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어차피 도시에 도움은커녕 미관만 해치는 이들이고, 또 그들 대다수가 몰래 도시에 숨어든 난민들이니 이 기회에 싹 소탕을 하심이 어떠실는지요?”
힐끔- 온두라스 백작의 눈치를 보던 총관은 그의 표정이 온화해진 것을 보곤 한시름 덜었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쁘지 않군.”
온두라스 백작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안 그래도 영주님께서 승낙하실 것 같다고 아그리파 경께서 한발 먼저 판자촌을 둘러보러 가셨습니다.”
“아그리파가?”
“예.”
아그리파 로델로.
검은 산양 기사단의 단장이며, 기사들의 정점인 마스터를 목전에 앞둔 로열 랭크의 기사로 달리 ‘붉은 도살자’라는 이명으로도 불리는 온두라스 백작령의 최강자였다.
가진바 무력도 무력이지만 제법 머리가 잘 돌아가는 편인지라 백작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으며, 검은 태양 상단과 거래할 노예를 난민으로 충당하자는 의견을 낸 것이 바로 아그리파였다.
총관의 대답에 온두라스 백작이 껄껄대며 웃었다.
“그 친구도 참 성실하단 말이지. 머리도 좋고 말이야.”
“예, 그렇죠. 저희 온두라스 백작령 최고의 인재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백작 각하께서 중히 쓰시는 것이구요.”
아그리파를 칭찬하는 온두라스 백작의 말에 총관이 그를 칭찬하며 맞장구쳤다.
“그럼. 노예 경매 시작 전까지 노예들을 충당할 수 있겠지?”
불쑥 온두라스 백작이 묻자 총관이 당황하여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예?”
그러거나 말거나 백작이 툭 한마디를 내뱉었다.
“경매가 시작되기 전까지 추가로 노예 500을 채워 놓아야 할 걸세. 그 목이 달아나기 싫다면 말일세.”
껄껄거리며 웃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던 총관은 이내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것을 깨닫곤 황급히 백작의 집무실을 뛰쳐나가 어디론가 달려갔다.
* * *
“뭐야. 왜 또 온 거야?”
방랑자의 집을 방문한 내게 신시아는 예상대로 뚱한 표정을 지으며 삐딱한 자세로 날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뒤따라온 아이들에게 가져온 선물을 건네주며 모든 관심을 단번에 사로잡게 되자 더 이상 내게 쌀쌀맞게 굴지 못했다.
“와! 인형이야!”
“장난감 칼도 있어!”
“나 곰팡이 안 핀 빵 처음 봐.”
“스프 냄새 좋다아…… 스프에서 고기 냄새가 나.”
아이들은 내가 건네준 선물들을 살펴보며 무척이나 즐거워했다. 신시아는 그런 아이들과 나를 번갈아 보더니 이내 푹- 한숨을 내쉬더니 아이들을 향해 소리쳤다.
“빨리 고맙다고 인사 안 하고 뭣들 해!”
신시아의 호통에 저들끼리 떠들며 즐거워하던 아이들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지으며 쪼르르 내 앞으로 몰려와 허리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착하기도 하지.
아이들을 향해 웃어 보이며 말했다.
“맛있게 먹고 재밌게 가지고 놀렴.”
[네!]
아이들이 한목소리로 힘차게 대답하곤 선물들을 가지고선 우르르 건물 안으로 몰려 들어갔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고 있는데 신시아가 말을 걸어왔다.
“선물로 아들 환심을 사서 꼬셔 보겠다 이거야?”
“정답이야.”
당당하게 그렇다고 대답하자 신시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대체 왜 우리 애들을 데려가려고 그러는 건데?”
“필요하니까.”
“필요하다고? 저런 조막만 한 애들을? 왜, 어디 노예상에라도 팔려고?”
요 꼬맹이 봐라. 말투가 제법 공격적인데?
“그럴 리가. 그럴 거라면 굳이 이렇게 환심을 사려고 노력하지도 않았겠지. 그냥 납치해 가면 될 테니까.”
내 대답에 신시아가 코웃음을 쳤다.
“헹- 내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잘도 그럴 수 있겠다. 암튼 애들한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그녀의 경고에 나는 피식 웃어 보였다.
대번에 신시아의 두 눈에 불이 붙었다.
그녀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내게 다가와선 손가락으로 툭툭- 내 가슴을 밀치며 노려보았다.
“그렇게 못하겠단 뜻이야?”
연거푸 찔러대는 그녀의 손가락을 잡아채며 말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오해는 무슨 오해! 절대 애들은 못 데려간다고 했잖아!”
마치 제 새끼를 보호하는 어미 고양이처럼 날을 잔뜩 세운 신시아의 이마에 딱밤을 먹여주었다.
따악-
순식간에 그녀의 고개가 뒤로 크게 젖혀지며 한동안 움직임을 뚝 멈추었다.
이내 천천히 뒤로 젖혀진 고개를 바로 한 신시아는 빨갛게 달아오른 이마를 양손으로 문지르며 버럭 소리 질렀다.
“씨이! 아저씨 지금 나랑 한번 해보자는 거지!”
신시아가 주먹을 휘둘러 왔다.
제법 자세가 잡힌 것이 한두 번 휘둘러 본 솜씨가 아니었다.
물론 맞아줄 생각이 없었던 나는 요리조리 그녀의 주먹질을 간발의 차이로 피해내며 도망쳐다녔다.
그러자 약이 올랐는지 그녀가 ‘아아악! 죽여 버린다!’ 하고 소리 지르며 더 기를 쓰고 달려들었다.
슬쩍- 옆으로 피하며 발을 내밀자 신시아가 바닥에 얼굴부터 들이박으며 크게 나자빠졌다.
‘아프겠네.’
한동안 신시아는 말이 없었다.
미동조차 하지 않던 그녀는 이내 몸을 부르르 떨더니 이내 고개를 홱 들어 올리곤 표독스러운 눈동자로 나를 노려보았다.
“인상 좀 피고.”
신시아의 머리맡에 쪼그려 앉아 노려보는 그녀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으겍-’ 하고 신시아가 요상한 소리를 내며 몸을 뒹굴어 내게서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