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9화
대지의 마탑 분점으로 돌아갔을 때 타이밍 좋게 통신구가 개통되었다. 통신구 너머로 서류 뭉치를 품에 안고서 바쁘게 돌아다니는 장교들과 멀뚱멀뚱 통신구를 바라보는 가웨인이 보였다.
“오늘 중으로 오슬로에 있는 본가로 가신다더니 어째 아직 온두라스에 계십니까?”
가웨인의 물음에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오슬로에서 내건 전이 마법진 이용 제한에 딱 걸려 버렸지 뭔가.”
“그렇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통신은 왜……? 장군 성격에 상황 보고를 받으시려고 연락하신 것은 아닐 테고. 혹시 뭔가 문제라도 생기신 겁니까?”
“문제라면 문제겠지.”
두루뭉술한 내 대답에 가웨인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그러게 제가 호위라도 대동하고 가시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요즘 북부에 영지전이 얼마나 빈번한데요.”
처음에는 내 걱정을 하는 듯하더니 이내 삐딱한 자세를 하며 본격적인 잔소리가 시작했다.
“분명 가실 때 뭐라고 하셨습니까. 하급 장교복을 입고 가신다면 알아보는 이들이 없으니 크게 문제 될 것은 없다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애초에 장군의 어깨에 걸린 식구들이 몇인데 호위 수백을 달고 가셔도 모자랄 판에 그런 철없는 짓을 하셔서는…… 뭐? 오랜만에 여행하는 기분도 낼 겸, 어수선한 시국에선 조용히 다녀오는 것이 여러모로 좋다구요? 3군단 총사령관이시면 3군단의 얼굴이나 다름없으신데 나중에 다른 귀족들이 알아채고 입소문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러신 겁니까? 제가 그렇게 말렸건만 잘도 새벽에 도망가셨더군요?”
입이 두 개라도 할 말이 없는 나로서는 묵묵히 가웨인의 잔소리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가웨인의 잔소리를 피해 새벽 도주를 감행한 것이 이렇게 돌아오는 건가 싶었다.
“장군이 아무리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셨다고는 해도 북부 전체가 전쟁의 열기에 휩싸여 있는데 그 와중에 휩쓸려서 몸이라도 상하신다면 어쩌시려고 그리 생각 없이…….”
계속 듣고 있다가는 날이 새도록 이어질 기세인지라 어쩔 수 없이 가웨인의 잔소리를 중간에 끊어낼 수밖에 없었다.
“말하는 중에 미안하네만.”
“……뭡니까? 정말 무슨 문제라도 생기신 겁니까? 혹시 영지전에라도 휩쓸리신 겁니까?”
당장에라도 군을 이끌고 나설 기세라 서둘러 가웨인을 진정시켰다.
“그건 아닐세.”
“그럼요? 뭔가 문제가 있으니 새벽 도주를 감행하신 장군께서 연락을 주신 것 아닙니까?”
눈치 빠르기는.
오랜 세월을 함께 하다 보니 날 너무 잘 아는 가웨인이 가끔은 무서웠다. 잔소리에 반박을 할 수가 없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군을 움직여야 할 것 같네.”
“군을요? 한동안 정비에 열중하신다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정말로 영지전에 휘말리신 것입니까?”
“거, 사람 참. 급하기는. 그런 것 아니래도.”
“그러면 군은 왜 움직이신다는 겁니까?”
뚱한 표정으로 가웨인이 물었다.
아무래도 새벽 도주 건으로 단단히 토라진 것 같았다.
“온두라스. 우리가 먹어야겠어.”
가웨인의 물음에 씨익 웃으며 대답하자, 가웨인이 쌜쭉이 뜬 눈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3군을 움직이면 주변 영주들이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을 텐데요? 제도에서도 말이 많을 겁니다.”
“그래서 말인데. 제도에 보내는 진상품의 규모를 좀 더 키워야겠네.”
“……지금까지 하루가 멀다고 주기적으로 보낸 것만 300만 골드에 달하는데 거기서 더요?”
북부 야만족들에게서 노획한 전리품의 규모는 추정하기로 천만 골드. 이 정도면 북부 전체의 한 해 수입의 절반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300만 골드면 전리품의 거진 삼분지 일에 해당하는데 거기서 규모를 더 늘리겠다고 하니 가웨인의 얼굴에 무척이나 아깝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나라고 왜 그 돈이 아깝지 않겠느냐만은 그래도 필히 보내야만 했다.
저 끝을 모르는 대신들의 탐욕을 채워주어야만 내 자리를 보전하는 것은 물론 온두라스를 장악했을 때의 여파를 최소화시킬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얼마나 더 추가하시려고 하시는데요?”
“200만 골드.”
가웨인의 입이 쩍- 하고 벌어졌다.
그 모습이 제법 우스꽝스러운지라 나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물론 그것으로 끝이 아닐세. 100만 골드 정도 따로 빼두어서 로마노프 공작가의 각 파벌에 적당히 뿌려야 하네만.”
내 말에 가웨인은 멍하니 수정구를 응시하더니 이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수정구를 움켜쥐었다.
“600만 골드를 뇌물로 다 날리시겠단 말입니까!?”
터져 나오는 경악성에 나는 두 귀를 막았다.
저렇게 반응할 줄 알았지.
“온두라스를 손에 넣는 것 치고는 싼 가격이니 그렇게 격하게 반응하지 않아도 되네.”
말대로였다.
온두라스는 북부에서도 시골 영지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비옥한 에버나스 평야의 절반에 해당하는 명실상부 북부 최대 곡창지를 보유한 영지였다. 그러니 촌구석의 영주가 백작씩이나 되는 작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고.
온두라스 백작이 2공자를 지지하는 파벌이고, 영지가 1공자를 지지하는 영주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형국이라고는 해도 주변 영주들의 작위는 고작해야 남작들뿐이었다.
그것도 수가 셋뿐이고 말이다. 전력상으로 보자면 제법 처지는 그들이 괜히 온두라스 백작을 향해 국지전을 걸어 대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온두라스를 큰 힘 들이지 않고 손에 넣을 수 있다면 500만 골드를 뇌물로 뿌리는 것은 단기적으로는 손해일지 모르겠으나 장기적으로 봤을 때 손해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500만 골드의 손해는 조만간 비프로스트 요새를 방문할 검은태양 상단으로부터 어느 정도 충당할 수 있을 테고 말이다.
“……장군께서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요. 그러면, 군의 규모는 어느 정도로 생각하고 계십니까?”
가웨인의 물음에 나는 생각할 것도 없이 곧장 대답했다.
“7만.”
“[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
수정구 너머로 알 수 없는 괴성이 흘러들어 왔다.
3군단 전체 병력은 10만.
거기서 7만을 이끌고 오라는 것은 북부의 야만족을 견제할 최소한의 병력만 두고선 모조리 끌고 오라는 소리이니 저리 격한 반응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전투는 없을 테고. 2만 정도만 온두라스에 주둔시키고 곧장 돌려보낼 것이니 그냥 병사들 산책시켜 준다고 생각…….”
“[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
또다시 괴성이 울려 퍼졌다.
저러다 목 상하겠네.
한참 동안 괴성을 내지르던 가웨인은 이내 제풀에 지쳤는지 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500만 골드는 뇌물로 뿌리고. 싸우지 않는다고는 해도 7만에 달하는 병력을 움직이니 보급선은 당연히 유지해야 할 테고 그 큰돈을 추가로 쓰시겠다. 이 말씀이시지요? 가뜩이나 요새 정비로 예산이 빠듯한 지금 시국에요.”
문관이 아닌 무관임에도 나와 함께 행정업무를 분담해야 하는 가웨인으로서는 하루아침에 생돈이 그것도 거액이 나가는 소리에 눈이 뒤집힌 듯했다.
“저 그냥 행정업무 때려치우면 안 되겠습니까?”
한순간에 폭삭 늙어버린 것 같은 가웨인이 애처로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 모습이 안쓰럽기는 하지만 그 말고 따로 맡길 만한 인재가 없으니 그 부탁은 들어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조만간 행정관을 구해볼 생각이었다. 하급행정관이야 널리고 널렸지만, 그들을 총괄할 만한 경력과 실력을 겸비한 인재가 없었기에 가웨인이 저리 고생하는 것이니 말이다.
가웨인도 딱히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닌 듯 고개를 치켜들고는 손으로 눈두덩이를 덮으며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심하세요. 밀정들의 보고에 따르면 근시일 내로 본격적인 영지전이 시작될지도 모른답니다. 온두라스 인근의 세 남작이 연합하여 군을 일으킬 준비를 한다더군요. 용병들을 고용하는 추세를 보면 당장 오늘 시작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어 보였습니다.”
영지전이라…….
가능하다면 영지전이 발발하기 전에 가웨인이 군을 이끌고 왔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그러지.”
알겠다고 대답하자, 가웨인이 또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휴우……. 린 아가씨를 뵈러 가신다기에 당분간은 조용할 줄 알았는데, 일거리만 잔뜩 늘려서 오시는군요.”
거기에 대해선 나도 할 말이 없는지라 뭐라 변명하지도 못했다.
“린 아가씨께서 얼마나 오매불망 장군을 기다리고 계실런지……. 오늘 도착한다고 미리 말씀드렸는데, 아직 연락하지 않으셨지요?”
가웨인의 물음에 나는 멋쩍어하며 고개만 끄덕였다.
“아가씨께는 제가 따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제발 몸조심하시고. 여기서 더 일거리를 늘리는 일은 자제해 주세요. 이러다 탈모 오겠습니다. 애초에 문관도 아닌데 왜 제가…….”
가웨인의 하소연이 길어졌다.
원래 이렇게 말 많은 성격이 아니었는데 그동안 행정업무를 보며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듯했다.
“최대한 빨리 행정관을 구해보겠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가웨인이 체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알겠습니다. 그보다 병력은 언제까지 준비하면 되겠습니까?”
가웨인의 물음에 나는 재빨리 대답했다.
“당장.”
“[email protected]#%$%!%!”
또다시 괴성이 울려 퍼졌지만, 말이 끝나자마자 통신구의 연결을 끊어버렸기에 괴성이 그리 길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 * *
통신을 끝내고 방에서 나오자 문 앞에서 잔뜩 긴장한 채로 서 있는 마법사가 보였다. 이 녀석이 왜 이러는 건가 싶었는데 답은 금방 나왔다.
“부, 북부의 영웅을 뵙게 돼서 영광입니댯!”
긴장했는지 막판에 혀를 씹은 마법사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표정을 바로 하며 내게 경례를 해왔다.
“……엿들은 겐가?”
“아, 아닙니다!”
내 물음에 마법사는 절대 아니라는 듯이 황급히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황금사자께서 말씀해 주셔서 알았습니다.”
“가웨인이?”
“네! 처음 통신을 개통하자마자 장군께서 거기 계시느냐고 물으시길래 혹시나 하고 인상착의를 말씀드렸더니 그분이 맞다고 말씀해 주셔서 알았습니다.”
마법사는 갓 들어온 신병처럼 꼿꼿한 차렷 자세를 유지하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볼이 옅게나마 상기된 것이 적잖이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 마법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며 검지로 내 입을 막아 보이는 제스처를 취해 보였다.
“내 정체나 통신 관련한 일은 모두 극비라네. 비밀 지켜줄 수 있겠는가?”
“물론이죠!”
마법사가 두말할 것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고맙네. 이 건에 대해서는 내 추후에 보답하도록 하겠네.”
말하자 마법사는 당치도 않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사양했다.
“아, 아닙니다!”
“아니야. 그래야 내가 마음이 놓일 것 같아서 그러네.”
재차 권하자 마법사는 힐끔힐끔 내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그러면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응? 뭔가 원하는 것이라도 있는가?”
내 물음에 마법사는 눈을 질끈 감더니 손을 불쑥 내밀었다.
“아, 악수, 악수 한 번만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악수?”
“예. 제 우상이신 장군을 이렇게 뵐 기회가 언제 또 올지 몰라서요…….”
보통 마법사들은 자존심이 높아서 이런 행동을 잘 보이지 않는데 이 마법사는 아닌 것 같았다. 내가 우상이라는데 못 해줄 것도 없지. 하는 짓이 귀여워 웃으며 마법사가 내민 손을 맞잡아 주었다.
“이러면 되는가?”
손을 맞잡으며 묻자 마법사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황급히 소리쳤다.
“여, 영광입니다!”
“무얼 영광까지야. 아무튼 비밀 지켜주게나.”
“무덤까지 안고 가겠습니다!”
그럴 것까지는 없고.
가게 앞까지 나와 배웅해 주는 마법사를 뒤로하곤 여관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