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7화
로마노프 공작가의 내전은 겉으로 보기에는 귀족 가문들이 종종 겪는 작위 계승을 위한 직계들의 권력다툼이었지만, 실상은 북부의 패권을 놓고 벌이는 거대한 전쟁이었다.
1공자와 2공자 그리고 5공녀와 같이 출중한 재능을 바탕으로 가신들의 지지를 받는 이가 로마노프 공작이 된다면 로마노프 공작가는 대를 이어, 북부의 패자가 될 것이요.
그 외 지닌바 능력은 떨어지나 지지하는 가신들의 힘이 강력하다면, 차후 그들 중 로마노프 공작이 되었을 경우 지지하던 가신 중 가장 큰 힘을 지닌 이가 실질적인 북부의 지배자가 될 것이었다.
이렇듯 로마노프 공작가의 직계이든 아니든, 북부의 패자가 되고자 하든 아니든 야망이 있는 군웅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로마노프 공작가의 내전에 끼어들어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는 것에 열을 올렸다.
나 역시 이 패권 전쟁에 참여할 생각이었지만 그것이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기초가 중요하다. 기초가 튼튼하지 않다면, 그 위로 무엇을 쌓던 금방 무너질 뿐이었다.
때문에 공작가의 내전이 물 밑 싸움으로 한창인 지금 시점이야말로 내실을 다지고,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적기였다.
야만족과의 전쟁으로 인해 허물어진 요새들을 정비하고, 초토화된 기반 시설들을 복구하며 전쟁으로 지친 병사들이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조치하는 등 이것저것 할 것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로마노프 공작가의 내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1년 후였다. 시간적 여유는 충분했으니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방금 전 있었던 일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온두라스 백작의 직인이 찍힌 공문을 가지고선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던 벨락스라는 건달패. 그들 덕분에 명분이 생겼다.
공식적으로 나는 휴가 상태.
대놓고 수행원들을 이끌고 오슬로로 향했다면 대번에 로마노프 공작가의 직계들의 눈에 띄어 그들에게 붙들려 무척 시달릴 것이 분명했기에 그것이 싫어 하급 장교의 군복을 빌려 입고, 3군단 소속임을 증명하는 군단 마크마저 떼어낸 상태였다.
정체를 알아차리기 어려웠다고는 하지만 3군단의 총사령관이 휴가 차원에서 방문한 온두라스 영지에서 해당 영주의 사병에게 위협, 아니, 폭행을 당했고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군을 움직이기에는 충분한 사유였다.
또한 사령관의 신변 보호를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온두라스 영지에 3군단의 병력을 주둔시킬 수도 있을 테고 말이다.
한 번 군을 주둔시킨다면 그다음부터는 영지 치안을 위해서다, 북부 안정을 위해서다, 뭐다 온갖 이유를 들먹이며 은근슬쩍 궁둥이를 들이밀면서 눌어붙어 앉으면 온두라스 영주는 그야말로 눈 뜨고 영지를 뺏기는 꼴이 될 수도 있었다.
물론 그렇게 된다면 차기 공작위를 노리는 로마노프 공작가의 대권 주자들이 손을 잡고 날 견제하려 들 가능성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날 자신들 파벌에 끌어들이기 위해 온갖 감언이설로 날 설득하려들 가능성이 더 높았다.
당장 지금만 해도 여러 파벌이 내게 뇌물을 줘가며 자신들의 파벌에 들어올 것을 종용하는 중인데 이 상황에서 온두라스 영지까지 내가 장악한다면 더 안달을 낼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 치들 입장에서야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북부의 패자는 새로이 로마노프 공작에 오르는 이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을 텐데, 거기서 내가 아무리 세를 불려봐야 자기들 장기말이라고 생각하지 경쟁 상대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었다.
* * *
“흠…… 잠시 자리를 비운 건가?”
가게를 나오자마자 내가 향한 곳은 대지의 마탑의 분점이었다. 전이 마법진 이용 예약을 취소할 겸, 다른 볼일도 있고 해서 들렀다.
한데 점원이 잠시 자리를 비웠는지 카운터가 텅 비어 있었다. 점원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가게 안에 진열된 물건들을 구경했다.
“호오? 분점에 영상 기록구가 있네?”
단순히 영상을 기록하는 마법이 새겨진 마도구이지만 그 값이 1만 골드나 할 정도로 값비싼 물건이었다. 마도구들이 비싸기는 하지만 이건 유독 비쌌다.
단순한 기능뿐임에도 영상 기록구가 비싼 이유는 이 물건에 새겨지는 마법이 고위 마법이라는 점과 공급이 적다는 점 때문이었다.
여하튼 그 외에도 마도구들은 많았지만, 영상 기록구만큼 값비싼 것은 없었다.
그렇게 가게 안을 둘러보기를 잠시.
“아이고! 죄송합니다. 식사를 하다 보니 미처 손님이 오신 줄 몰랐습니다.”
마법사가 꺼윽- 하고 시원스럽게 트림을 하며 카운터로 돌아오다 날 발견하곤 황급히 고개 숙여 사과해 왔다.
“괜찮네.”
손을 내저으며 괜찮다고 대답하자 마법사는 고개를 들며 나와 잠시간 눈이 마주쳤다. 마법사는 잠시 아리송하다는 표정을 짓다가 곧 무언가 기억났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라? 낮에 오신 분 아니신가요? 그 전이 마법진 이용 예약하신 분. 맞죠?”
“맞네.”
“혹시 예약 취소하러 오셨나요?”
“비슷하네. 급한 일이 생겨 시간을 좀 변경하려고 왔네. 아 참. 그리고 통신구 사용. 가능한가?”
“예약 시간을 변경하는 것이야 당연히 가능합니다만…… 통신구는 준비가 조금 필요합니다.”
통신구는 거리에 상관없이 서로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통신 장치로, 그 효용성은 무척 뛰어나지만 통신을 유지하는데 마나석이 소모되어 귀족이라고 해도 쉬이 사용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또한 통신구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연락을 주고받을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통신구의 고유 마력 코드와 위치 좌표가 필요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마법진을 매번 새로 그려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때문에 보통은 자주 연락이 필요한 인물과 고정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고정 통신구를 따로 구비하고는 했다.)
“얼마나 걸릴 것 같은가?”
내 물음에 마법사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대답했다.
“음…… 한두 시간쯤 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마력 코드와 좌표는 여기 적어두었네. 2시간 뒤에 다시 오도록 하지.”
2시간 동안 이곳에서 가만히 기다리기보다는 주변을 둘러보는 것이 나을 것 같아 마법사에게 비프로스트 요새 통신실에 구비된 통신구의 마력 코드와 좌표가 적힌 쪽지 한 장을 건네주고는 분점을 나왔다.
* * *
대지의 마탑 분점을 나오자 번화가 중심에서 물줄기를 뿜어대는 분수대와 그 주변에 배치된 벤치가 보였다. 저곳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시간을 때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때마침 크레이프를 파는 노점상이 눈에 띄어 생크림 크레이프 하나와 음료 한 잔을 사 들고 빈자리로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맛있네?’
생각대로 크레이프는 맛있었다.
하긴. 어지간하지 않고서야 생크림 크레이프가 맛없기는 힘들 테지.
입안 가득 넘실거리는 부드러운 생크림을 음미하면서 야금야금 생크림 크레이프를 먹어치웠다.
원래는 주변을 구경하면서 느긋하게 먹을 생각이었는데 한번 먹기 시작하니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심지어 식사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그렇게 정신없이 크레이프를 먹고 있는데 문득 머리맡으로 그림자와 함께 인기척이 느껴졌다. 뭔가 싶어서 고개를 들어 인기척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제국에서 보기 드문 흑발이 사자 갈기처럼 사방으로 뻗친 머리를 한 허름한 행색의 소녀가 날 바라보고 있었다.
허름한 행색에도 불구하고 소녀의 외모는 몹시도 아름다웠다. 흑발과 대조되는 새하얀 피부와 앵두처럼 새빨간 입술.
별을 박아 넣은 듯 초롱거리는 금빛의 두 눈동자와 입술 사이로 수줍게 고개를 내민 앙증맞은 송곳니까지.
전체적으로 귀여움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외모였다. 쉽게 말해서 엄청 예뻤다. 그래도 한 가지 흠을 잡자면 사나워 보이는 눈매일까?
물론 그것마저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굳이 흠을 잡자면 그렇다는 소리였다.
“아저씨가 우리 애들한테 빵 사 준 사람 맞지?”
가만히 소녀의 외모를 감상하고 있는데 불쑥 소녀가 말을 걸어왔다. 초면에 다짜고짜 아저씨라니. 조금 상처였다. 내가 그렇게 늙어 보이나?
“빵을 사 주다니?”
내가 되묻자 소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저씨 아니야? 우리 애들이 웬일로 빵을 하나씩 쥐고 있길래 무슨 일인가 물어봤더니 어떤 마음씨 좋은 군인 아저씨가 빵을 사 줬다고 하던데?”
그녀의 말에 불현듯 낮에 대지의 마탑 분점으로 향하는 길을 알려주었던 소년이 떠올랐다. 소년 가장인 줄 알았더니 보호자가 따로 있었구나.
“아! 그 길 안내를 해준 아이를 말하는 것이로군. 아주 의젓한 아이더구나.”
소녀가 왜 날 찾아온 것인지 이해가 되었다.
그러니까 낮에 내가 감사의 표시로 길을 안내해 준 소년과 소년의 일행으로 보였던 아이들에게 빵을 사 준 것에 대해 감사의 인사를 하기 위해 날 찾아온 것 같았다.
그냥 평범하게 상투적인 인사말을 주고받고 헤어지면 되겠지만 소녀를 보고 있자니 문득 장난기가 솟구쳤다.
“……그렇군. 이게 바로 헌팅이라는 것인가?”
“틀려! 나는 그저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온 것뿐이란 말이야!”
슬쩍 장난을 걸어보니 곧장 반응이 오는 것이 무척 재밌었다. 놀리는 맛이 있는 소녀였다.
“미안하지만 난 좀 더 성숙한 여성이 취향인지라. 미안하지만 그대 마음은…….”
“틀리다고오! 그리고 나도 아저씨 같은 못생긴 사람은 취향 아니야!”
이 아가씨가 말로 뼈를 때리네.
반응이 재밌어서 괜히 장난을 걸었다가 본전도 못 찾았다.
“농담일세.”
그래도 제법 대화가 즐거운지라 웃으며 농담이었다고 말하자 소녀가 눈을 가늘게 뜨며 노려보았다.
“아저씨. 평소에 주변 사람들한테 기분 나쁘다는 소리 많이 듣지?”
소녀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저었다.
“평상시에 배려심이 넘치고 매너 좋다는 소리는 자주 듣곤 하네만?”
내 대답에 소녀는 한심하단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어휴. 로젠 그 녀석이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난리 치지만 않았어도 안 오는 건데.”
소녀가 한숨과 함께 손뼉을 짝짝- 하고 쳤다.
그러자 골목길 쪽에서 눈가에 시퍼런 멍이든 소년이 낯익은 말 한 마리를 이끌고 다가왔다.
“아저씨 말 맞지?”
“아마도?”
가까이서 살펴봐야 확신할 수 있겠지만 도난당했던 내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짜악-!
찰진 소리와 함께 소녀의 손바닥이 소년의 등짝을 후려쳤다.
“빨리 사과 안 해?”
“죄, 죄송합니다!”
고통에 얼굴을 와락 찌푸리던 소년이 소녀의 호통에 황급히 허리를 숙이며 사과해 왔다. 힐긋 소년을 바라보던 나는 이내 소녀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어떻게 알았는가?”
“뭘 말이야?”
“내가 말을 도난당했다는 것 말일세.”
내 물음에 소녀는 피식 웃더니 허리춤에 손을 얹고선 그녀의 평평한 가슴을 쭈욱 내밀며 자부심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래 보여도 내가 정보단체의 대장이거든! 들어는 봤는지 모르겠네. ‘방랑자들의 집’이라고.”
생각지도 못한 유명인이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