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5화
“죄송하지만 오슬로의 금일 인원 제한이 끝난지라 오늘은 더 이상의 전이 마법진의 이용이 불가합니다.”
광장에 도착하니 어렵지 않게 온두라스 대지의 마탑 분점을 찾을 수 있었다. 다만 문제가 한 가지 있었는데 오늘은 더 이상 전이 마법진의 사용이 불가하다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오슬로로 향하는 전이 마법진의 이용이 제한되었다. 이유를 물어보자 오슬로 대지의 마탑 분점에서 내건 인원 제한에 걸려서 오늘은 더 이상 오슬로로 향하는 전이 마법진을 이용할 수 없다는 답만 들었다.
가능하다면 이 우중충한 도시를 한시라도 빨리 떠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오늘 하루는 꼼짝없이 이 도시에서 머물러야 할 듯싶었다.
신분을 드러내고 돌아다녔다면 모를까 신분을 숨기고 돌아다니는 중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면, 예약은 가능하겠나?”
“네. 가능합니다.”
다행히도 예약이 밀릴 정도로 유동인구가 많은 것은 아닌 듯 흔쾌히 대답하는 마법사에게 가장 빠른 시간대를 예약하려는데 문 너머로 일사불란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척척척-
발소리에서 쇳소리가 섞여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중무장한 군인들 같았다. 순찰이라도 돌고 있는 것일까?
도시의 치안이 개판인 것을 보면 그건 또 아닌 것 같은데…….
“서둘러라!”
발걸음을 재촉하는 목소리와 함께 발소리가 들려오는 간격이 짧아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기에 저리 서두르는 것인지 궁금증이 생기려던 찰나, 마법사가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아무래도 접경지역에서 또 국지전이 일어난 것 같네요.”
“또……?”
자주 있는 일이라는 듯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마법사를 바라보며 되묻자 아무도 없는 주변을 힐끔 둘러본 마법사가 낮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지만 북부에서 조만간 전쟁이 터질 것 같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거든요. 최근 들어 영지 간의 국지전이 종종 발생하는 것을 보면 아주 없는 얘기도 아닌 것 같구요.”
아무래도 이 마법사는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하는지 묻지도 않은 것들을 줄줄 늘어놓기 시작했다.
“불의의 사고로 전대 로마노프 공작 각하께서 돌아가시고 그 사후에 후계자 자리가 붕 떠버리지 않았습니까? 그것 때문에 차기 로마노프 공작의 자리를 놓고 공작가의 자제분들께서 이리저리 패를 나누어 다투는데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다고들 하더라구요.”
이건 나도 알고 있는 이야기인지라 크게 흥미가 동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묵묵히 마법사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하긴 그분들 입장에서 보자면 이건 아주 큰 기회이지 않습니까? 후계 서열에서 밀리더라도, 능력과 세력만 있다면 운이 좋아 공작위에 오를 수도 있는 것이고 그도 아니라면 가장 유력한 후보에게 붙어서 공신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니까요.”
마법사는 이야기하는 것이 무척이나 즐거운지 한 번도 쉬지 않고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댔다.
말하는 것만 들어보면 무슨 정보상이라도 된 것처럼 북부의 정세를 이야기하는데, 마탑 분점의 일개 마법사가 알 정도로 공작가의 알력다툼이 겉으로 심화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조금 불경스러운 말이기는 합니다만 제국의 공작가들은 어찌 보면 각 지방의 왕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만약 자신이 지지하는 이가 왕이 된다면 바로 개국공신이 되어 권신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니 영주들이 저마다 지지하는 후계자들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혈안이 되어서는 세율을 올리며 군비 확장에 열을 올리는 중이지요.”
불경스러운 것을 알면서도 저리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을 보니 제국 황실의 권위가 추락해도 한참을 추락했다는 것이 새삼 느껴졌다.
“특히 이 온두라스의 영주이신 온두라스 백작께서는 로마노프 공작가의 2공자님을 지지하는 쪽인데, 위치가 하필이면 1공자님의 파벌에 둘러싸인 형국이라……. 최근 심심찮게 이곳저곳에서 국지전을 걸어오는데 그것 때문에 도시가 아주 개판이에요. 손님께서도 보셨을 테지만 도시 치안이 얼마나 나쁜지 백주대낮에도 왈패들이 돌아다니면서 금품을 갈취하고 기승을 부린다니까요.”
그리 영양가 있는 대화는 아니었지만 시간을 때우기에는 제법 나쁘지 않았던 대화가 끝이 나고 나서야 내일 있을 전이 마법진 예약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손님도 이곳에 머무는 동안에는 조심해서 다니셔야 합니다. 왈패 놈들이 겁을 상실했는지 돈 좀 있어 보인다 싶으면 귀족이고 평민이고 가리지 않고 덤벼드니까요.”
가게를 나서는 등 뒤로 마법사의 충고가 뒤따라왔다. 여기서 또 맞장구를 쳐주었다가는 해가 저물 때까지 이야기를 계속할 기세인지라 대충 손을 흔들어주고는 가게를 나섰다.
* * *
“와…….”
가게를 나옴과 동시에 나는 무척이나 황당한 기분을 맛봐야만 했다. 분명 가게 앞에 말을 묶어 두었는데 고삐만 덩그러니 남아 있고 내가 타고 온 말은 오간 데 없이 사라져 있었다.
“어이가 없네.”
눈 뜨고 코 베인 기분이 이런 것일까?
마법사에게 조심하라는 말을 들은 것이 바로 전인데 그게 얼마나 되었다고 그새 말을 도난당해 버렸다.
어차피 말과 함께 전이 마법진을 이용할 수는 없으니 인근 마 시장에 팔 생각이었으니, 그냥 돈 조금 잃어버린 셈 치면 되겠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기분이 무척이나 나빴다.
마음 같아서는 말을 훔쳐간 놈들을 찾아내서 다리 몽둥이를 분질러 버리고 싶은 마음이 치솟았다. 하지만 아는 이 하나 없는 낯선 도시에서 이리저리 수소문해가며 범인을 찾아다니기도 뭐해서 그냥 푹- 한숨을 내쉬고는 말에 대한 것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꼬르륵-
배가 고프던 참에 때마침 바로 앞에 ‘풍요로운 암말’이라는 간판이 내걸린 여관이 보였다.
여관은 3층 건물이었는데 1층은 식당을 하고 그 위층으로는 숙박업을 하는 것 같았다.
번화가에 위치해서 그런지 가게 상태도 썩 나빠 보이지 않고, 가게 앞에 가드로 보이는 사내 둘이 경비를 서고 있는 것이 오늘 밤은 저기서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물론 찾아본다면 여관보다 상위 개념인 ‘호텔’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도저히 이 기분 나쁜 도시를 돌아다닐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서 오십시오.”
가게 앞으로 다가서자 잘 교육된 가드들이 살짝 고개 숙여 인사를 해왔다. 적당히 고개를 까딱여 인사를 받아주고는 가드들이 열어준 문을 통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와하하! 내가 그래서 말이야…….”
“크하아! 술맛 좋다!”
“요 앞 창관의 아비게일이 그렇게 예쁘다지? 어디 나도 한번 가볼까?”
“아오! 벨락스 놈들! 또 상납금이라며 돈을 무지막지하게 뜯어갔다니까? 그 깡패 놈들 때문에 요즘 살 수가 없다, 살 수가.”
“그게 다 이곳 토박이들만 모여 있던 레펜서가 세력 다툼에서 밀리니 그런 것 아니겠나.”
“쉿! 듣겠네. 여기에 레펜서 놈들이 있는 것이 안 보이는가?”
가드들까지 고용한 여관이기에 호텔처럼 조용한 분위기일 줄 알았는데 여타의 여관들과 다를 바 없이 무척이나 시끌벅적했다.
“어서 오세요. 여기 메뉴판이에요.”
적당히 빈자리에 앉자 조그마한 아이가 쪼르르 다가와 메뉴판을 내밀었다. 이것저것 무척이나 메뉴가 다양했지만, 딱히 끌리는 것이 없어 그냥 간단하게 빵과 스프, 그리고 스테이크가 포함된 세트 메뉴를 주문했다.
“주문 확인 도와드릴게요. A 정식 맞으시죠?”
“그래. 맞아.”
“음식값은 선불이에요. 무전취식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요. 대신 음료 한 잔을 서비스로 드려요.”
배시시 웃으며 말하는데 고놈 참 넉살도 좋구나 싶었다.
“그래. 얼마니?”
“2실버예요.”
품에서 2실버를 꺼내어 아이에게 건네자 아이가 냉큼 받아 들며 꾸벅 허리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금방 가져다 드릴게요. 음료는 따로 원하시는 거라도 있으신가요?”
“맥주로 주렴.”
어디 돌아다닐 생각도 없으니 이른 시간이기는 하지만 진탕 마시고 내일 아침까지 잠만 잘 생각이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아이는 그렇게 말하곤 쪼르르 주방으로 달려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도시 주민, 용병, 상인, 건달 등등.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 도시에 와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생기였다.
그렇게 잠시간 구경하고 있으니 양손에 음식이 담긴 접시를 들고선 아이가 돌아왔다.
“식사 나왔습니다. 음료도 곧 가져다 드릴게요.”
미리 준비되어 있던 것을 내놓는 것인지 음식은 주문과 동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금방 나왔다.
술보다 빨리 나오는 음식에 그리 큰 기대를 하진 않았지만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음식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제법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스테이크를 한 입 크기로 썰어 입안에 넣자 따끈한 온기와 함께 고기의 육즙이 퍼져 나가며 육향이 입안 가득 넘실거렸다.
주방장의 음식 솜씨가 제법 괜찮았다. 입구에 가드를 세워 놓을 때부터 좋았던 인상이 더 좋아졌다.
“여기. 맥주 나왔습니다.”
곧이어 맥주까지 나오니 나름 근사한 한 끼가 되었다.
* * *
우당탕탕-
“오늘부터 이 거리는 우리 벨락스가 관리한다! 레펜서 놈들은 뭐해! 얼른 썩 꺼지지 않고선!”
음식을 먹으며 한껏 여유를 만끽하고 있는데 입구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가드가 문을 부수며 가게 안으로 나뒹굴었다.
이어서 건달 여럿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가게가 떠나가라 고래고래 소리쳤다. 당연히 손님들은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기 시작했다.
“이 새끼들이 감히!”
가게 안에서 식사하고 있던 건달 몇이 들이닥친 건달들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비겁한 새끼들! 협정을 위반하고 이렇게 뒤통수를 쳐?”
“협정이고 나발이고 꼬리 내린 개새끼가 제 주제를 알아야지!”
나야 뭐…….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동네 왈패들이 이권 다툼을 벌이는 모양인데 거기에 끼어들 이유도, 생각도 전혀 없기에 그냥 식사만 계속했다.
“아이고! 어르신들! 상납금 드리겠습니다! 드릴 테니 제발!”
“지금 상납금이 문제인 줄 알아!”
식탁이 뒤집히고,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가게의 주인이 나와 왈패들을 달래보려 애쓰는 광경이 펼쳐졌다.
누군가 그랬지.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요.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해석하기 나름이겠지만 내 일이 아니니 저런 모습들도 그저 우스워 보일 뿐이고…….
저 일의 당사자들은 무척이나 심각한 일이었다.
회귀 전의 나처럼 어설픈 정의감에 둘러싸여 책임지지도 못할 일에 끼어드는 것보다는 이렇게 멀리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 것이 훨씬 생산적인 일 아니겠는가.
“맛있네.”
입이 즐겁고.
우당탕탕-
귀가 즐겁고.
“빌어먹을 벨락스 놈들! 죽어라!”
“한물간 레펜서 놈들 따위가 감히! 쳐라!”
눈이 즐거우니 무척 즐거운 식사 시간이었다.
“……개판이야, 개판.”
이것만 다 먹고 방에 틀어박혀서 내일까지 나오지 말아야지. 그렇게 다짐하며 여유로운 식사를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