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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이 회귀함-4화 (4/183)

공작이 회귀함 4화

내 가문 발타자르 백작가는 영지귀족이 아닌지라 가문의 이름으로 배속된 영지는 없고 오래전에 하사받은 자그마한 땅과 저택 하나가 가문이 가진 재산 전부였다.

이 중에서 가문의 저택은 북부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인 오슬로의 중심지에 위치해 있었는데, 이곳 비프로스트 요새에서 오슬로까지는 말을 타고도 사흘은 이동해야 도착할 정도로 제법 먼 거리였다.

때문에 조금 돈을 투자해서라도 전이 마법진을 이용하기로 결정한 나는 인근에서 유일하게 마법진을 운영하고 있는 온두라스로 향했다.

가웨인이 호위를 붙여준다는 것을 한사코 거절한 덕분에 홀로 떠나는 여행길은 무척이나 여유로웠다.

전쟁의 여파로 지나는 곳마다 무너진 건물들과 불에 탄 나무의 잔해들이 자주 보였지만, 그런 만큼 복구를 하기 위해 투입된 인원들로 인해 활기를 띠는 모습이 무척 보기 좋았다.

그렇게 주변 풍경을 구경하며 협곡을 따라 길게 이어진 길을 따라 이동하다 보니 자연스레 몇 개의 관문들을 지나게 되었고, 마지막 관문을 지나자 저 멀리 제국 최대의 곡창지대인 에버나스 평야가 보이기 시작했다.

지평선 너머로 끝없이 펼쳐진 농지들이 황금빛으로 물들어 바람에 살랑거리고 있었다.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그 광경에 나는 잠시 말을 멈추어 세우고는 풍경을 감상했다.

선선한 가을바람도 좋고, 따사로운 햇살도 좋았다.

이게 얼마 만에 맛보는 여유로움인지.

마음 같아서는 말에서 내려 적당한 곳에 자리 잡고 한숨 푹 자고 싶었지만 일정이 빠듯한지라 그렇게까지 여유를 부릴 수는 없었다.

아쉽기는 하지만 다음을 기약하기로 하고는 다시 이동하기 위해 말의 고삐를 가볍게 채찍질하듯 휘둘렀다.

히이잉-

말이 시원한 울음소리와 함께 다각 다각 움직이기 시작하고, 느릿하게 주변 풍경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말을 몰고 가기를 얼마 지나지 않아 논길 한복판에서 징수관과 촌장으로 보이는 두 사내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그들의 주위로는 마을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두 사내의 실랑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이고! 나으리! 그렇게나 세율을 올리시면 어찌합니까요!”

촌장이 징수관의 손을 양손으로 꼭 부여잡으며 애원하자, 징수관은 촌장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며 말했다.

“거, 사람 참. 세율을 내가 올리는가? 영주님께서 올리라고 하시니 올리는 것이지. 그리고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올리는 것도 아니고, 영지 재건을 위해 세율을 올리는 것인데 뭘 그리 말이 많은가. 하여튼 그리 알고 준비하게나.”

촌장은 이제는 숫제 애원하듯 두 무릎을 꿇고서 징수관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렸다.

“저희라고 왜 영지를 재건하는 데 한 손 보태고 싶지 않겠습니까요. 마음은 저희도 굴뚝같지만 나으리도 아시다시피 야만족 놈들이 마을 곡창은 물론 집집이 돈 될 만한 것은 모두 약탈해 갔습니다요. 해서, 이번에 추수하는 곡식으로 겨울을 보내야 하는데 올린 세율대로 지급하고 나면 저희 마을의 반 이상은 올해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굶어 죽고 말 겁니다요.”

징수관이라고 왜 촌장의 심정을 모르겠는가만은, 그도 영주의 명을 받고 움직이는 몸인지라 그들의 사정을 봐줄 처지가 아니었다.

야만족들을 피해 도망치느라 미처 재산을 챙기지 못하였고 그 결과 영주성에 남아 있던 재산이 모조리 약탈당해 다시 재산을 모으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는 영주였다.

그런 상황을 뻔히 알면서도 괜히 그들의 사정을 봐준답시고 세금을 덜 거두었다가는 당장 그의 목이 달아날 것이 뻔했으니 안타깝지만 지시한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총관께 말씀은 드려보겠네만…… 아마 소용없을 걸세. 다음에는 병사들과 올 것이니 괜히 버티다가 괘씸죄로 몰매 맞지 말고, 힘들더라도 올린 세율대로 지급하는 것이 좋을 걸세.”

그리 말하고는 징수관은 촌장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을 볼 면목이 없는지 황급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 * *

“에라! 씨발! 야만족들 쳐들어올 적엔 영지민들 다 내팽개치고 지가 제일 먼저 도망치더니. 뭐!? 영지 재건!? 캬악- 퉷!”

“아니. 이건 해도 너무하잖아! 세율이 7할이라니! 줄 거 다 주고 나면 우리는! 우리 애들은! 다 굶어 죽으라는 소리와 뭐가 다르냔 말이야!”

“이번 농사가 풍작이면 또 몰라. 평작도 아니고 거의 흉작 수준인데 7할!? 으아아아! 개 같은 영주 새끼!”

“니미럴.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고. 씨이펄. 확 뒤엎어버려!?”

징수관이 떠나고 난 뒤의 분위기는 무척이나 흉흉했다. 평상시라면 감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할 영주를 성토하는 말들을 내뱉으며 금방이라도 민란을 일으킬 것만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실제로도 회귀 전 이맘때쯤에 야만족들에게 재산을 약탈당한 영주들이 재산을 복구하고자 세율을 올리면서 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농사는 흉작이지, 겨울은 코앞으로 다가오는데 자신들 버리고 도망쳤던 영주는 야만족들이 물러나자마자 은근슬쩍 돌아와서는 숨 막힐 정도로 세율을 올려대니 결국 참다못한 영지민들이 들고 일어서게 된 것이다.

북부 전역에서 일어난 민란은 그 규모가 수십만에 이를 정도였으니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한 가지 우스운 점은 민란이 가장 먼저 일어난 영지의 영주들이 내게서 영지민 운운하며 야만족들의 약탈품들을 받아간 이들이라는 것이었다.

“쯧.”

그들의 사정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내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었다.

“린을 요새로 데려가야겠어.”

상황을 보아하니 조만간 민란이 일어날 것은 분명해 보였다. 앞으로 일어날 민란의 불길은 들불처럼 번져나가 순식간에 북부 전역을 휩쓸게 될 것이었다.

영주들이 생각이라는 것을 할 줄 안다면 전쟁의 여파로 궁핍한 삶을 사는 백성들을 자극하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을 텐데.

물론 영주들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내전을 벌이고 있는 로마노프 공작가의 직계들이 군자금 확보에 열을 올리다 보니 덩달아 그들을 지지하는 영주들이 조금이라도 더 눈에 들기 위해 벌인 일이었지만(물론 일부 영주들은 정말로 자신들의 재산을 불리기 위해 한 짓이었다.) 시기가 너무 좋지 않았다.

“뭐…… 내 입장에서야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던 내게는 분명 큰 이득이 되는 일이었지만 씁쓸한 마음만은 어찌할 수 없었다.

* * *

다그닥- 다그닥-

처음 맞닥뜨린 에버나스 평야의 비옥한 농경지와는 달리 안쪽으로 이동할수록 황금빛으로 물든 농지가 아닌 곡물들이 불에 탄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검게 물든 땅들이 심심찮게 보이기 시작했다.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그 모습에 야만족의 침공이 얼마나 대단했던 것인지 쉽게 짐작이 될 정도였다.

영지의 상태가 이 지경인데도 세율을 올리는 멍청한 짓을 하는 영주들이 어떤 면에서는 대단하다면 참 대단했다.

“이제 온두라스인가?”

저 멀리 불에 그을린 자국이 선명한 온두라스의 성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저곳에서 이동 마법진을 타고 오슬로로 이동하면 여행의 목적지인 발타자르 백작가에 도착하는 것도 순식간일 터였다.

온두라스의 성문에 다가가자 삐딱한 자세로 무기와 갑옷마저 내팽개치고 검문을 서고 있는 병사가 보였다.

보통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들은 영지의 얼굴마담인 성격이 강해서 영지군 내에서도 선별된 인원만 세우는데, 온두라스 영지군에는 인재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전체적인 분위기가 느슨한 것인지 저런 모습은 절로 혀를 차게 만들었다.

“통과.”

“통과아.”

“통~과.”

얼굴 한가득 귀찮다는 표정을 달고서 지나가는 행인들을 힐끗 보고선 연신 통과만 반복적으로 외쳐대는 문지기는 장교복을 걸치고, 허리춤에 검을 찬 내 복장을 보고서도 그저 고개만 까딱일 뿐이었다.

‘이건 좀 심한데?’

대우를 받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최소한 상급자가 지나간다면 자세를 바로잡고 경례를 올리는 시늉조차 하지 않는 그 모습은 실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눈이 죽어 있어.’

천천히 말을 몰아 문지기를 스쳐 지나가며 본 그의 눈동자는 죽어 있었다. 군기가 빠진 것이 아니라 아예 혼이 빠져나간 것 같은 눈동자는 생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산송장과도 같은 모습.

문지기를 지나쳐 도시 안으로 들어서자 그가 왜 그런 모습을 보였는지 이해가 되는 풍경이 펼쳐졌다.

성벽과 마찬가지로 불에 그을리거나 무너진 흔적이 가득한 도시의 분위기는 무척이나 우중충했다.

거리를 지나는 행인들의 어깨는 축 처져 있으며, 골목 곳곳에서는 싸우는 소리와 비명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왔다.

전쟁이 끝났음에도 아직도 이곳은 전쟁 한복판에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주었다. 온두라스의 영주는 이곳을 버린 것일까?

도시를 복구하는 광경은 전혀 보이지 않고 난잡하고 불쾌하기 그지없는 광경들만 펼쳐지니 이런 곳에서 한시라도 벗어나고 싶어졌다.

때마침 허름한 복색의 아이가 지나가기에 붙잡고 길을 물었다.

“꼬마야.”

“무, 무슨 일이십니까. 나으리.”

그저 길을 묻기 위해 불러 세운 것인데 장교복을 입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서도 겁에 질린 표정으로 바라보는 아이의 행동에 치안이 정말 개판이구나 싶었다.

“온두라스의 대지의 마탑 분점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니?”

“마, 대지의 마탑이요?”

내 물음에 아이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이 길 따라서 쭉 가시면 광장이 보이실 거예요. 대지의 마탑 분점은 거기에 있어요. 2층 건물이고 외견이 가장 화려한 건물이에요.”

“고맙구나.”

겁에 질려 있으면서도 도망치지 않고 길을 설명해 준 아이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10실버를 손에 쥐여 주었다.

곰팡이 핀 싸구려 바게트 빵이 다섯 개에 1실버 정도이니 10실버 면 열 명이 삼시 세끼 먹어도 이틀은 배불리 먹을 수 있을 양이다.

단순히 길 안내로 주기에는 많은 돈이었지만 이 아이만 있는 것도 아니고, 골목길 안에서 이쪽을 힐끔힐끔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이 눈에 밟혀 준 것이었다.

행색을 보아하니 전쟁고아들 같았는데 개중에는 우리 꼬맹이 또래로 보이는 아이들도 여럿 보였기에 괜히 더 신경 쓰였다. 물론 전쟁고아가 저들뿐이겠냐 만은 말이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으리!”

연신 허리를 숙여 가며 인사하는 아이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었다.

“괜히 동네 왈패들한테 빼앗기지 말고 이 길로 곧장 빵집으로 가서 동생들과 배불리 먹거라. 배가 든든해야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법이다.”

그것이 소매치기든, 잡일이든 말이다.

전쟁고아들이 도시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뻔했으니까.

“네! 그렇게 할게요!”

힘차게 대답하며 골목길로 사라지는 아이를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나 역시 온두라스 대지의 마탑 분점을 향해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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