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3화
이 서대륙은 중앙을 제패한 철의 제국 프락시온을 기준으로 북으로는 얼어붙은 동토가, 남으로는 대초원과 대수림이, 서쪽으로는 7왕국의 연합이 존재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동쪽에는 대해를 무대로 활동하는 거대 해적단들이 여럿 존재하기는 하지만 이들은 그리 큰 위협은 아니었다.
대륙 중앙의 비옥한 옥토를 바탕으로 제국은 천 년의 세월 동안 단 한 순간도 대륙의 패권을 놓친 적이 없었지만, 건국 천 년이 되던 해가 지나자마자 누군가 마법이라도 부린 것처럼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권불십년權不十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했던가.
처음에는 무능한 황제들이 줄줄이 배출되기 시작하며 주지육림에 빠져서 국사를 등한시하더니 바른말만 고하는 충신들은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하여 멀리하고, 달콤하고 듣기 좋은 말만 하는 간신들을 총애하고 가까이했다.
그런 일들이 반복되다 보니 결국 국가의 요직 전반에 걸쳐 간신들이 판을 치기 시작했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는 간신들은 나라에서 지정한 세율을 멋대로 올리고는 백성들을 착취하더니, 그것으로도 모자라 관직을 돈으로 사고파는 매관매직을 일삼으며 재물을 축적했다.
그렇게 축적한 재물을 바탕으로 각 지방에서 저마다 사병을 불려 나가며 세력을 키우기 시작하니 그들이 스스로를 칭하기를 선제후選帝侯라 하였다.
그리하여 작금에 와서는 황실에서조차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7인의 선제후가 탄생했다. 대공 레온하르트 칼 프란츠를 필두로 한 4인의 공작들과 제도의 두 대신이 그 주인공이었다.
그들은 황위 계승이 장자승계라고 명시되어 있던 제국법을 수정하고는 황제 선출권을 나눠 가지며 그들의 입맛에 맞는 황제를 선출할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쥐었다.
한 가지 우스운 것은 이 선제후 중에서 황실에 충성하는 이는 놀랍게도 단 하나도 없다는 점이었다.
이쯤 되면 황실이 얼마나 무능한지 갓 태어난 아이라고 해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여하튼 북부 전선을 담당하던 선제후는 로마노프 공작으로, 일전에 야만인들의 침공에 가장 먼저 명을 달리한 3군 총사령관이었다.
권력욕이 강하던 로마노프 공작은 제 자식에게도 권력을 나눠 주기 꺼려 하여 후계를 정해두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다 갑작스레 공작이 사망하게 되니 공작위를 노린 로마노프 공작가의 내전이 시작되었다.
공작위를 노리는 자식이 한두 명 정도라면 그런대로 빠른 시일 안에 결판이 났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권력욕만큼이나 성욕도 강했던 로마노프 공작의 슬하에는 수십 명의 자식이 존재했다.
당연히 그 수만큼 파벌도 여러 갈래로 나뉘었고 이는 공작가의 약화를 초래했다. 그렇게 로마노프 공작가는 내전으로 몰락하게 되고, 이때 급부상하는 것이 바로 나.
무너진 전선을 수복하고, 열세인 전력으로 야만인들을 몰아낸 영웅 알레한드로 발타자르다.
당시의 나는 딱히 권력욕이 없었기 때문에 후작위와 3군 총사령관의 직위마저 과분하다고 생각하며 내전으로 인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로마노프 공작가의 상황을 노리고 벌어지는 이권 다툼을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방관하기만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멍청한 짓이었다.
이때 나도 이권 다툼에 끼어들어 미리부터 세력을 키워두었다면 차후에 공작위에 올랐을 때 이름뿐인 허수아비 공작이 되지 않았을 테니까.
그랬다면 황제파의…….
“아니, 아니지.”
오늘부터 권신이 되기로 마음먹어 놓고선 또다시 황제를 위하는 일을 생각해 버렸다. 이래서 습관이 무섭다는 것인가 싶었다.
“장군. 준비가 끝났습니다.”
때마침 가웨인이 막사 안으로 들어와 그동안 하던 상념을 저 멀리 날려 보냈다.
“이번엔 얼마나 모였는가?”
“골드로 환산하면 30만 골드가량 되더군요. 한데…….”
가웨인이 말끝을 흐리며 멋쩍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데?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아무래도 야만족의 약탈품들을 제도로 올려 보내는 것에 대해 인근 영주들이 불만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만…….”
“그런가?”
뭐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야만족들의 약탈품은 본디 인근 영주들의 것이었다. 그들은 당연히 내가 돌려줄 것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제도로 보내 버리니 불만을 품을 만도 했다.
하지만 야만족과 전투를 벌이는 동안 코빼기도 비치지 않고 숨어 있던 것들이 야만족이 물러나자마자 부리나케 돌아와서는 뭐 먹을 것이 없나 이곳저곳 들쑤시며 다니는 꼴인데 뭐가 이쁘다고 돌려주겠는가.
회귀 전에야 내가 워낙 순진해서, 영지민들이 굶어 죽고 있다며 하소연하는 영주 놈들의 말에 속아서 죄다 돌려주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어차피 돌려주어 봐야 저들 배 채우기에 바쁠 테고 영지민에게 돌아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게 뻔했으니 그냥 내가 전부 가지기로 했다.
물론 그냥 나 홀로 독식했다가는 아무리 전쟁 영웅이라도 배가 터져 죽을 것이 분명하니 적당히 쓸 것은 제외하고 일부분만을 제도帝都로 올려보냈다.
하지만 야만족들이 워낙 대대적으로 약탈을 자행했던지라 회수한 것의 대략 5% 정도만 추슬러 보냈음에도 그 행렬이 사흘간 이어질 정도로 엄청났다.
명목상으로는 제국을 위해 헌신하는 제도의 충신들에게 바치는 자그마한 위로금이었지만 실상은 야만족들의 약탈품들을 내가 해 먹을 테니 그거 받고 눈감아 달라는 뜻이었다.
더불어서 이번에 받게 될 후작위와 3군 총사령관직을 보다 확실하게 가져오기 위함이기도 하고 말이다.
아마 제도의 실권을 쥐고 있는 두 대신은 내가 올려보낸 진상품들을 보고 기뻐서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지 않을까 싶었다.
그 치들이야 워낙 재물욕이 강하니까 말이다.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조만간 우르르 몰려올 것 같던데. 어찌하실 겁니까?”
“어쩌긴 뭘 어째? 그냥 무시하면 되지.”
로마노프 공작가가 건재했다면야 그쪽 눈치를 봐서라도 이곳저곳에 적당히 눈치 봐가면서 뱉어내야 했겠지만, 현재 로마노프 공작가는 내전으로 정신없는 상황이니 이쪽에까지 신경 쓸 정신이 없을 것은 안 봐도 뻔했다.
로마노프 공작가를 제외하면 솔직히 현재 북부에서 내게 큰소리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인근 영주들이 암만 징징대도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만약 허튼수작을 부리려고 한다면 그땐 적당히 손봐주면 될 테고 말이다.
“이 이야기는 이쯤 하기로 하고, 군수물자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가?”
“안 그래도 여러 상단을 수소문해 봤는데 조만간 검은 태양 상단에서 대대적으로 상행을 이끌고 방문하겠다는 답신을 받았습니다.”
“검은 태양 상단이?”
검은 태양 상단은 제국 5대 상단 중 하나였다. 그리고 검은 태양 상단주 오슬란 메멘토는 칼 프란츠 대공의 수족이고 말이다.
“네. 저희가 포로로 잡은 야만족들을 구매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아무래도 그게 상행의 주목적인 것 같습니다만.”
주로 남부에서 활동하는 이들이 왜 굳이 북부까지 찾아오는 것인가 싶었는데, 이 시기쯤에 남부에서 대대적으로 노예가 필요한 사건이 떠올랐다.
‘그렇군. 남부 방어선을 구축하던 시기가 이때쯤이었지. 노예가 필요한 것도 다 그것 때문이구나!’
남부 방어선은 칼 프란츠 대공령과 맞닿은 대수림과, 대초원의 경계에 건설되는 수십 개의 크고 작은 요새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칼 프란츠는 황실의 관료들에게 거금을 들여 로비하며 뜬금없이 기존에 있던 요새들의 주변으로 요새들을 새로이 축성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다들 비웃었지.’
기존에 있던 요새들로도 충분히 남부를 방어할 수 있었음에도 요새들을 축성하는 행동에 호사가들은 대공이 돈지랄을 한다며 비웃었다.
‘그 누가 알았을까. 대수림의 몬스터들이 숲을 빠져나오는 빈도가 잦아진 것이 대이동의 시작이라는 것을.’
어느 날부터인가.
대수림에서 서식하던 몬스터들이 숲을 벗어나 대초원과 제국의 국경을 넘어오는 일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대수림의 생태계의 특성상 영역 다툼에서 밀린 몬스터들이 숲을 나오는 일은 가끔 있었던 일이었기에 그 빈도가 잦아졌다고 해서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이는 없었다.
칼 프란츠 대공을 제외한다면.
갑작스레 잦아진 몬스터들의 침입에 수상쩍음을 느낀 대공은 비밀리에 대수림으로 대규모 조사단을 파견하였고 그곳에서 마물들이 급격히 불어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일반적인 귀족들이었다면 조사단을 파견하지도, 그러한 보고를 받았다고 해도 거액이 투입되는 요새 축성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겠지만, 대공은 달랐다.
‘난 인물은 난 인물이지. 대공은.’
자칫 별생각 없이 넘길 수 있었던 일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그는 문제에 대해서 조사하고, 예측하여 대비하였다.
덕분에 강대한 세를 자랑하던 대초원의 슈리마 왕국을 멸망에 이르게 한 몬스터들의 대이동을 막아낼 수 있었다.
결단력과 추진력. 거기에 더해서 선견지명까지.
그저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저리도 주도면밀하니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 테지.
이번 생에서는 그와 대적할 생각이 단 하나도 없기 때문에 그가 하는 일을 방해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의 편에 설 생각도 아니지만 말이다.
능력 출중하고, 황제의 자리를 노릴 정도로 야심도 크고, 그것을 실행할 인내심과 추진력도 충분하니 그의 밑으로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기는 했다.
하지만 워낙 그 양반에게 당한 것이 많다 보니 솔직히 웃으며 대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고 말이다.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 미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바탕으로 성장한다면 칼 프란츠와 비견될 세력을 일구어낼 수도 있을 텐데, 굳이 그의 밑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쓸데도 없는 녀석들이었으니 적당한 값에 파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알겠다고 전해주게나.”
“알겠습니다. 그럼. 그리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대답하고 물러나려는 가웨인이었으나 이내 무언가 생각났는지 걸음을 멈추고는 내게 다시 다가왔다.
“깜빡 잊을 뻔했습니다. 이거…….”
가웨인이 품에서 밀랍으로 밀봉된 편지를 꺼내어 내밀었다. 인장을 보니 본가에서 보낸 편지 같았다.
“아가씨께서 보내신 편지입니다.”
“……린이? 그러고 보니 린이 올해 일곱이던가?”
내 물음에 가웨인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빤히 바라보았다.
“아니, 뭘 또 그렇게 바라보는 겐가?”
“일곱 살이요? 확실하십니까?”
가웨인의 말에 순간 아차 싶었다.
나와는 열일곱 살 차이가 나니 올해 일곱 살이 아니라 열 살이었다. 내가 막 정정을 하기도 전에 가웨인이 한숨을 내쉬며 먼저 말했다.
“올해 열 살 되십니다. 자주 뵙기는 힘들어도 나이와 생일 정도는 기억하고 계셔야지요.”
가웨인의 꾸중에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입이 두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반성하겠네.”
“반성하셔야지요. 하나뿐인 혈육이신데 걱정도 안 되십니까?”
그러고 보니 지금 본가에는 우리 꼬맹이 홀로 집을 지키고 있겠구나. 부모님은 8년 전에 돌아가셨고, 형제라고는 나뿐인데 이렇게 타지에 있으니.
회귀 전에는 내 한 몸 추스르기에 급급해서 아이에게 신경을 쓰지 못했던 것이 떠올랐다. 나중에 아이가 크고, 혼례를 올릴 때 내게 슬그머니 말했었지.
‘그때 무척 외롭고, 무서웠고 보고 싶었다고.’
그 말을 듣고 미안함에 혼자서 얼마나 울었는지…….
“잠시 본가에 다녀오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검은 태양 상단이 도착하는 시일은 꽤 남아 있고, 이곳에 남은 일들도 얼추 정리가 끝났으니 다녀오시죠.”
가만히 나를 지켜보고 있던 가웨인이 꺼낸 제안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게 좋겠군. 자네도 같이 가지 그러나? 린이 무척이나 반가워할 텐데.”
내 동생 아이린이 태어날 무렵부터 줄곧 나와 함께한 가웨인이었기에 아이린과도 무척 친했다. 오죽하면 나보다 더 친남매 같아 보일 정도로 말이다.
“아뇨. 할 일도 있고 하니 다음에 함께하겠습니다.”
“그런가?”
가웨인의 거절에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