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2화
[장군.]
[장군!]
누구야…….
간만에 푹 자고 있는데 대체 왜 깨우는 거야?
귓가에서 쉴새 없이 들려오는 이명에 결국 참지 못하고 눈을 떴다. 어두웠던 세계가 순식간에 점멸하고 밝은 빛과 함께 비릿한 피 냄새와 함성 소리가 동시에 느껴졌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니 심장이 울리는 북소리와 함께 귀청이 터질 듯 시끄럽게 울려 퍼지는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드넓은 평원을 배경으로 눈대중으로도 수만에 달하는 병사들이 진군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게 무슨…….”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는 분명…….
“죽었을 텐데.”
사후세계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감각들에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정신을 놓고 있을 수 없었다.
지평선 너머로 검은 해일이 일렁인다. 인의 파도. 수십만의 인간들이 물결치듯 일렁이며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복색은 통일되지 않았으며, 손에 쥐고 있는 무기 또한 가지각색이었다. 그것만 보아도 정규군은 아니라는 것을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반면 아군 측의 병사들은 통일된 붉은 갑옷을 입고 전열에는 제 몸집보다 타워 실드를 든 방패병들이, 그 뒤에는 할버드병, 검병, 궁병 순으로 오와 열을 맞추어 마치 한 몸처럼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궁수대! 사격준비이-!]
[사격준비!]
지휘관의 외침에 따라 궁수들이 활시위를 잡아당기기 시작한다. 화살 끝은 하늘을 향하고 언제라도 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춘다.
“장군. 진격령을.”
옆에 있던 풀 플레이트 중갑으로 무장을 한 사내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사내가 소리쳤다.
“진격하라!”
[전군 진겨어어억-!]
사내의 외침과 동시에 북소리가 점점 빨라지고, 진격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길게 이어진다. 그에 발맞추어 걸어나가던 보병들이 일제히 달려나가기 시작한다.
적과 아군의 거리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고 적들의 얼굴이 육안으로 식별될 정도의 거리까지 다가왔을 때 지휘관 중 하나가 사격령을 내리고, 대기하고 있던 궁수들이 일제히 활시위에서 손을 뗀다.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을 정도의 화살들이 하늘 위로 솟구친다.
본능적으로 지금이 돌진할 타이밍이라는 것을 깨닫고 말의 옆구리를 발로 강하게 한 대 후려친다.
히이잉-
그러자 타고 있던 전마戰馬가 거친 울음소리를 토해내더니 빠른 속도로 앞으로 치고 나간다.
힐끗 주위를 둘러보자 대기하고 있던 기병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내 뒤를 따라 땅을 박차고 질주하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선두에서 달리고 있는 보병들을 지나쳐 돌진한다. 눈 깜짝할 사이에 적들의 코앞까지 도달하고, 적의 전열과 맞부딪치기 직전 궁수들이 쏘아 올린 화살들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리며 적의 전열을 무너뜨린다.
순식간에 적의 전열이 실이 끊어진 목각 인형처럼 힘없이 쓰러져 나간다. 일순간 공백이 생겨나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기병들이 양 떼 무리에 뛰어든 늑대들처럼 적의 보병들을 집어삼킨다.
콰아앙-
사방에서 무언가 터져 나가는 소리와 함께 적의 보병들이 하늘 위로 떠오른다. 적의 무리가 한 마리의 거대한 짐승이라면, 기병대는 그 짐승의 벌어진 상처를 헤집는 맹수의 이빨이었다.
일체의 망설임 없이 기병대는 적의 진영 속으로 파고들고 뒤이어 달려온 보병들이 상처를 수복하려는 것을 막아선다.
“죽여라!”
“막아라!”
아군과 적들의 괴성이 사방에서 울려 퍼지고, 가장 선두에서 달려나가는 기병대는 적들의 심장부로 돌진하며 보병들이 파고들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다.
적들이 기병대의 돌진을 막아보려 몸을 내던져 보지만 변변한 갑옷조차 입지 않은 적의 보병 따위가 강철의 갑옷으로 중무장한 기병대의 앞을 막아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카앙-
누군가가 내던진 도끼를 검을 휘둘러 쳐내고는 앞을 막아서는 보병의 목을 일말의 망설임 없이 쳐낸다.
푸하학-
보병의 목이 허공으로 날아오르고, 절단된 목에서 거친 피 분수가 뿜어져 나온다. 그러는 와중에도 적은 끊임없이 기병대의 진격을 막기 위해 애를 써 보지만 그때마다 맥없이 쓰러져갈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나가자 점점 달리는 속도가 줄어들기 시작하고, 그 무렵에 적의 장수로 추정되는 인물이 보병들 사이로 튀어나온다.
“발타자르으으!”
무척이나 익숙한 얼굴이다.
얼굴 가득 푸른색의 문신이 가득하고, 덥수룩한 수염은 가슴께까지 길게 이어져 있다. 늑대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거대한 손도끼를 양손에 각각 하나씩 쥐고 있는 사내의 정체가 불현듯 떠올랐다.
북부 동토의 야만족 요툰의 대전사 브라키다.
천둥의 군주라는 이명으로 더 잘 알려진 이 사내는 전쟁 동안 나와 무수히 많은 검을 나누며 싸워댄 숙적이었다.
브라키가 전신에 샛노란 뇌기를 휘감으며 순식간에 허공으로 뛰어올라 도끼를 휘둘러 왔다.
심장을 휘감고 있던 오러하트AuraHeart가 공명하며, 손에 쥔 검신을 타고 붉은 오러를 뿜어낸다.
콰아앙-
브라키의 도끼와 내가 휘두른 검이 맞부딪치며, 거친 폭음과 함께 브라키가 뒤로 나가떨어진다.
순식간에 브라키가 적의 보병들 사이로 사라지자 말에서 뛰어내리며 브라키가 사라진 곳을 향해 뛰어든다.
“마, 막아!”
보병들이 재빠르게 앞을 막아서지만 오러를 머금은 검 앞에 두부 썰리듯 그들이 손에 쥐고 있던 무기들과 함께 썰려 나간다.
그러는 와중에도 기병대들은 내게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적들의 진영을 관통해 나가고, 적의 진영에서 멀어진다.
그러곤 재차 말머리를 틀어 일자로 길게 펼쳐지더니 적을 향해 다시 한번 돌진을 감행한다. 적들의 진영은 와해되고 뒤에는 기병이, 앞에는 아군의 보병들이 좁혀오기 시작한다.
“빌어먹을! 저리 비켜!”
두려움에 젖은 눈동자로 나에게서 슬금슬금 거리를 벌리던 보병들 사이로 브라키의 욕설과 함께 그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단 한 번의 격돌로 제법 큰 상처를 입었는지 이마를 타고 흐르는 붉은 피를 흘리고 있는 브라키는 연신 ‘빌어먹을’을 연발한다.
“쳐 죽일 제국 놈들!”
터덜터덜 브라키가 내 앞으로 다가오며 부리부리한 눈으로 나를 응시한다. 나 역시 그를 무감정한 눈빛으로 지긋이 노려보았다.
“네놈만은 내 기필코 저승길의 길동무로 삼으리라!”
브라키가 도끼를 휘둘러 왔다.
순간적으로 이것이 이 전투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에 맞서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 * *
“고생하셨습니다.”
멍하니 브라키의 시신을 내려다보는 내게 누군가 다가오며 말을 걸어왔다. 내게 진격령을 내려달라 요청했던 사내였다.
그동안은 정신이 없어서 눈치채지 못했는데, 지금에 와서 보니 오랜 세월 나와 함께한 가신이었다.
북부의 황금사자로 불리는 가웨인.
가웨인 말퓨리스.
최후의 순간까지 나와 함께했던 충직한 나의 기사.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요툰족 마저 패주하였으니, 이제 남은 것은 비프로스트 요새를 복구하고 뒷수습을 하는 일만 남았군요.”
그의 말에 현재 어떤 상황인지가 떠올랐다.
북부는 사시사철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얼어붙은 동토이지만, 특히나 그 한파가 강해지는 시기가 있다.
야만족들이 ‘혹한의 시련’이라 부르는 시기가 다가오자 북부의 맹주를 자처하는 야만족들의 왕 우트가르드 로키가 수십개의 부족들을 규합하여 비옥한 제국의 옥토를 노리고 침략하였다.
변변한 무장조차 하지 않은 야만족의 군세를 무시하던 3군단장은 군을 이끌고 성벽에서 뛰쳐나와 적과 대규모 회전을 벌이는 멍청한 짓을 저질렀고, 첫 전투에서 그 목이 달아났다.
휘하의 지휘관들은 군단장의 죽음을 목격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고, 순식간에 지휘부가 사라져 버린 병사들은 오합지졸로 변해 진격하는 야만족들을 피해 흩어졌다.
북부로부터 제국을 지키던 비프로스트 요새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고, 요새를 지키던 제 3군단은 와해 되어 병력들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난공불락의 요새라 칭해지던 비프로스트 요새가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자, 야만족은 그 기세를 몰아 제국의 영토를 침략하기 시작했다.
몇몇 귀족들이 흩어진 병사들을 어떻게든 추슬러 반격을 꾀해 보았지만 이미 오를 대로 오른 적들의 기세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런 와중에 3군단의 기병대장직을 맡고 있던 나는 휘하의 기사단과 기병대들을 이끌고 수십 갈래로 흩어져 본격적인 약탈을 개시한 야만족들을 각개격파하며, 흩어진 3군단의 잔존 병력을 추슬러 적의 본대와 일전을 치렀다.
수많은 위기 끝에 결국 승리를 거머쥐게 된 나는 비프로스트 요새를 수복하고, 야만족들을 북부의 동토로 다시 몰아내게 된다.
이 일로 인해 나는 제국의 용이라 칭송받으며, 백작의 작위에서 후작으로 승작하게 됨과 동시에 3군단장 직을 맡게 된다.
“빌어먹을.”
이 생생한 감각들이 거짓은 아닐 터이니 내가 과거로 돌아온 것은 확정적인 사실일 것이었다.
한데 하필이면 왜 내 일평생 중에서도, 가장 되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순간 중 하나인 때로 돌아온 것인가.
내 일평생에 좋은 시절도 많을 텐데 왜 하필이면 지금 이때로…….
아니, 생각해 보니까 내 일평생에 좋은 시절은 그다지 없었던 것 같다. 한평생을 전장에서 전전하였고, 그나마 전쟁과 거리가 먼 시절에는 권력다툼에 휘말려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고단한 인생을 살아가다 결국 반란군의 손에 죽어버리는 허무한 인생이었다.
워낙 바쁜 삶을 살다 보니 연애 한 번 하지 못하고 심지어 그 흔한 정략혼조차 해보지 못했다.
일평생을 홀로 외롭게 살다가 죽은 지난날의 인생을 떠올리니 자괴감이 물밀 듯 치밀어 올랐다.
“칼 프란츠…….”
으득-
이를 악물었다.
그 빌어먹을 노괴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던지. 또다시 빌어 처먹도록 말을 지지리도 안 듣는 황제 밑에서 노괴를 견제하며 허송세월할 수는 없었다.
‘다 때려치우고 그냥 시골 촌구석에 틀어박힐까?’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보았지만 나만 바라보고 있는 토끼 같은 여동생과 여우 같은 가신들을 생각하자면 또 그럴 수만도 없었다.
“장군. 괜찮으십니까?”
가웨인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을 걸어왔다.
“혹시 방금 전 전투에서 부상이라도 입으신 겁니까?”
“아니, 괜찮네. 걱정해 주어서 고맙네.”
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가웨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그러자 가웨인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왜 그렇게 보는가?”
“장군께서 이런 따듯한 말을 해주시니 적응이 되지 않아서요.”
그제야 그가 왜 이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지 깨달았다. 과거의 나는. 과거라고 칭해도 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과거의 나는 감정을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었다. 타고나기를 표정 변화가 적은 편인지라 감정을 밖으로 내비치는 일이 드물어서 사람들이 쉽게 냉정한 사람으로 오해하곤 했다.
얼추 비슷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내 사람에게는 가슴 따뜻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고생한 가신에게 이런 말도 못 해줄까. 그보다 일이 많을 터인데 가서 볼일 보게.”
“……알겠습니다. 혹시 조금이라도 이상이 느껴지신다면 바로 불러주세요.”
여전히 얼굴에서 걱정을 지우지 않은 채 날 바라보는 가웨인에게 휘휘 손을 내저으며 어서 가 보라고 손짓했다.
마지못해 떠나가는 가웨인의 등 뒤를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회귀라…….”
믿기지는 않지만, 최후의 순간 내 간절한 바람을 신께서 들어주신 것이라고 해석하기로 했다.
기왕 과거로 돌아왔으니 한번 대차게 살아보리라.
속으로 그리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