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31 잠깐의 심호흡 =========================================================================
마계에 떠날 때 태상은 반을 데리고 가지 않았다. 레베카를 혼자 둘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이에게 맡기기엔 찜찜했고 또 일이 잘못됐다간 큰일이 날 수 있었기에 반을 두고 가는 게 최선이었다.
그가 옆에 있기에 악화는 되지 않을 것이라 믿었는데, 그건 태상의 바람일 뿐인 듯 했다.
“반 아저씨한테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막막하네요.”
“........”
태상이 자신의 오른팔을 바라봤다.
천계의 심장을 볼 때마다 그때의 분노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화가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사샤에게 공을 들였던 걸 모두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놈이었다.
“빌어먹을....”
자신의 실수이기도 했다. 천계의 심장이 돌발 행동을 할 거라는 걸 생각했어야 했다.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던 뜻밖의 돌발 행동이었기에 그에게 책임을 묻는 이는 없었지만, 태상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태상의 마음이 무척 무거웠다.
“이런 말 하면 안 되는 건 알지만, 나중에 시간이 되시면 레베카를 좀 보러 가주실 수 있을까요? 여전히 태상님을 찾아요.”
어차피 그녀에게 의견을 물으러 가려고 했었다.
그녀는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어차피 가야 했어. 살 건지, 죽을 건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는 해줘야지.”
레베카와 반이 아직도 진전이 없다면, 태상은 레베카에게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반이 결국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의 생각이 바뀌었다면, 아직 그녀에게 선택권을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즉, 레베카가 살고 죽고는 반의 선택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편, 둘의 대화를 듣고 잇는 송이는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지금 둘의 대화 내용을 들어봤을 때, 그 여자한테 죽을 건지 살 건지를 결정하게 한다는 말일 것이다. 왜 그녀가 죽어야 하는 걸까?
그때 봤던 레베카는 멀쩡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송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물었다.
“왜 죽어야 하는 거야?”
“음?”
태상이 송이를 쳐다봤다.
“그때 그 여자 얘기하는 거잖아. 레베카....라고 하는 사람. 그 여자, 왜 죽어야 하는 건데? 뭔가 잘못이라도 한 거야?”
그런 거라면 살 건지 죽을 건지 선택하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태상이 잠시 침묵하다가 설명했다.
“저주에 걸렸어. 그리고 그 저주에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고. 그래서 선택권을 주려고 하는 거야. 죽을 건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 건지.”
“저주.....”
송이는 저주라는 게 얼마나 끔찍하기에 본인 스스로에게 그런 걸 묻게 할까 싶었다.
“개똥밭에 굴러도 사는 게 낫다는 말도 몰라? 본인이 그렇게 하고 싶다고 한 것도 아닌데, 네가 먼저 묻는 건 아닌 것 같아.”
만약 레베카가 태상에게 그런 질문을 받는다면, 굉장히 절망하고 슬퍼할 것이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죽고 싶지 않냐는 말을 듣는 건.....상상하고 싶지 않은 일이 분명했다.
“그러지마. 그건 아닌 것 같아.”
태상은 송이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레베카를 귀여운 동생으로 여기고 잘 대해주려고 노력하고 있긴 했지만, 그녀의 사정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레베카가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무거운지도 모르고 있었다.
“하지 말라고?”
태상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을 무렵, 혜연은 송이의 말을 듣고 만약 자신이 레베카의 사정이었고, 그에게 죽고 싶지 않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느낄 감정을 상상해보았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제가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아요. 그냥 차라리 제가 물어볼게요.”
혜연까지 그러지 말라고 하니 더 이상 자신이 하겠다고 주장 할 수가 없어졌다. 태상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만나러는 갈 거야.”
그녀의 상태가 더 나빠졌다면, 태상이 보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에 대해 결정을 내리는 게 맞았다. 혜연이 웃으면서 그의 말에 대답했다.
“물론이죠.”
누구 말씀이라고.
**
태상은 혜연에게 마계에서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주었다.
토다베스가 같잖은 짓으로 그와 거래를 하려 했다는 말을 들은 그녀는 그런 악마도 있냐며 신기해했다. 그리고 그가 아마도 인간계에 있을 거란 소리를 듣자 표정을 굳혔다.
지금까지 대악마가 없었기에 팽팽하게 맞설 수 있었던 거였다. 그런데 대악마가 인간계로 왔다면, 아마 큰 변화가 일어날 게 분명했다. 하지만 혜연은 엄청나게 좋지 않은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대악마가 인간계로 온 것과 동시에 태상도 함께 인간계로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태상이 돌아 온 이상, 분명 이 지긋지긋한 악마들과의 싸움이 멈춰질 거라 생각했다. 그를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의 믿음을 배신하지 않으려는 모양인지, 그가 사람들 앞에 섰다.
TV속에는 수많은 기자들이 모여 있었고 모두들 태상이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마계에는 악마들을 다스리는 대악마라는 놈이 존재합니다. 대악마는 다섯이었고, 우리들은 마계로 가서 4명의 대악마를 죽이고 돌아왔습니다.]
대악마?
대악마라는 처음 들어보는 단어에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당장이라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했다.
[다섯명의 대악마는 일반 악마들보다 훨씬 영악하고 강한 힘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악마들을 다스리죠. 전쟁을 가장 빨리 끝내는 방법은 한 가지, 그들 수장의 목을 치는 거였습니다.]
웅성웅성
태상의 기자회견은 당연하게도 많은 이들의 관심을 샀다.
[저희들은 모든 일을 끝내고 인간계로 돌아오려고 했습니다만 마지막 남은 대악마 한 명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놈이 인간계로 와서 우리와 전쟁을 치르려고 하고 있습니다. 고로 여러분들의 협조가 그 무엇보다 필요한 시점입니다.]
“실물이 낫지?”
태상이 자신의 입 쪽으로 내밀어진 사과를 받아먹으며 물었다.
“음....똑같은데? 근데 이거 예전에도 물어본 적 있지 않아?”
“글쎄, 기억 안 나는데.”
예전에 기자회견 했을 때,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송이가 의심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태상의 품에서 울려고 하는 태우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라 장난감을 흔들었다.
“태우야~ 이거 뭐야? 여기 봐야지.”
장난감을 흔들어줬음에도 불구하고 태우의 표정이 좋아지질 않자 송이가 울먹이는 얼굴이 귀여워 웃으면서 말했다.
“어이구~ 싫어? 아빠 싫어? 웬 이상한 남정네가 날 안고 있어?”
“이상한 남정네라니, 아빤데.”
태상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으나 태우는 아무래도 송이의 말이 딱 자신이 느끼고 있는 거였던 모양이다. 송이를 향해 두 팔을 벌리며 서럽게 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흐아앙!!”
“어구 서러워 어떡하면 좋을까.”
결국 태상은 태우를 송이에게 넘겨야 했고, 그녀의 품에 들어가자마자 울음을 뚝 그치는 태우 때문에 서운함을 감추질 못했다.
“젠장, 나중에 커서 이 아빠가 얼마나 뼈 빠지게 세상을 구했는지 알면 너도 다 이해하게 될 걸?”
밖에서 자신이 이런 취급을 당하고 있는 걸 알면 아마 기함할 거다. 나름 카리스마 있는 사장님인데 말이다. 그래도 이런 취급 받게 해주는 가족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태상은 고추달린 걸 제 무릎에 앉히게 될 거라는 걸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맹목적으로 사랑이라는 것을 해본 적도 없고 말이다.
하지만 그는 태우를 맹목적으로 사랑하게 되었으며, 작은 고추를 달고 있는 태우를 무릎에 앉혀놓고 제 품에 가둬놓고 싶어 애걸복걸하곤 했다.
매번 매정하게 엄마 품으로 사라져버리곤 했지만 말이다.
토다베스와 태상이 돌아오고 나서, 악마들의 공격이 일시적으로 멈춰졌다.
아마도 놈이 뭔가 다른 속셈을 갖고 있을 것이다. 인간계를 공격하려는 수작질 말이다. 지금의 평화가 결코 좋은 쪽의 평화는 아니었다. 하지만 덕분에 그동안 마계에서 쌓였던 피로는 충분히 풀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셈이었기에 나쁘진 않았다.
TV에서는 여전히 태상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악마들의 총 공격이 있을 겁니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아직 미지수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피해가 최소화 될 수 있게 최대한 정부의 말에 따라주시길 바랍니다.]
태상은 정부와 손을 잡았다.
그는 악마를 죽이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고, 정부는 민간인들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게 정부와의 계약 조건이었다. 아니, 사실 계약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모두의 목숨이 달린 일이니 서로 협조를 하는 것으로 보는 게 더 좋을 것이다.
태상은 기자회견을 한 후로, 이틀 동안 집에서 쉬면서 평화를 만끽했다.
그리고 다시 일어섰다.
“앞으로 여러모로 일이 많이 터질 거야. 그러니까 가족들 다 데리고 대피소로 가 있어.”
“.......”
태상의 말은 곧 그가 또 다시 악마들과 싸운다는 말이었다.
"조금만 더 이러고 있으면 안 돼??”
송이가 서운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알았기에 자신이 어리광을 부리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 서운함을 집어넣고 집어넣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악마가 침략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송이와 그 가족들은 아주 철저한 보호 속에서 지냈다. 불편함은 밖을 돌아다니지 못한다는 거? 그거 하나밖에 없었다.
의식주 모든 것에 별다른 변화를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가 못했다. 집을 잃고, 가족을 잃은 이들이 많았다.
뉴스에서 그것을 보면서 송이는 안타까워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다."
태상이 그녀의 말에 갑자기 미안하다는 말을 해왔다
"으응?"
철없이 왜 그러냐고 타박을 받을 줄 알았던 송이로서는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최대한 빨리 일 마무리하고 돌아 올게. 그때까지만 참아줘."
"...사과 안해도 돼. 나야 말로 애처럼 어리광 부려서 미안."
태상이 사과를 하는 바람에 있던 원망이 싹 사라지고 말았다. 태상은 태우가 꺅꺅거리며 손을 휘휘 젓자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빨리 일 해결하고, 태우 자라는 거나 보면서 살아야지."
태상의 말에 송이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토다베스를 그때 놓치지만 않았어도 지금 이 평화가 계속 됐을 지도 모른다. 태상은 그것이 참 아쉬워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내일은 레베카에게 가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모든 준비가 끝나면, 지긋지긋한 악마들과의 일을 끝낼 것이다.
얼마 남지 않았다.
태상은 자신의 손에 달린 인간계의 운명을 새삼 다시 한 번 느꼈다. 지금까지 앞만 보면서 달려왔던 지라 끝이 가까워져 오니 심장이 오묘했다.
시원 섭섭했던 것이다.
토다베스를 죽이는 것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다만 놈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찾는 게 중요했다.
어디에 붙어 있는지만 안다면, 태상이 홀로 토다베스와 결전을 치를 생각도 있었다.
태상은 그냥 어서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내고 싶었다.
잠깐 맛 본 평화는 태상의 몸을 더욱 달아 오르게 만들었다.
어서 빨리!
그는 평화를 원했다. 그리고 그 평화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