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30 잠깐의 심호흡 =========================================================================
은은한 빛을 내뿜는 마법진으로 보이는 것이 만들어졌다.
갑작스러운 일이었고, 한 번도 없었던 일이 아니기에 처음에는 놀라 그 자리에서 도망치는 이들도 있었다.
악마들이 드나드는 거대한 포탈과는 다른 모양새였지만, 악마들이 침략을 하고 있는 지금,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던 지라 곧 소식을 들은 계약자들이 마법진 주변을 감싸고 경계를 했다.
뭐가 튀어나오건 순식간에 죽여주겠다는 다짐으로 말이다.
마법진이 만들어진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수의 계약자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마법진이 만들어진 곳이 공교롭게도 CMC 건물 옥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감히 CMC 건물을 노릴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며 호랑이 주둥이에 머리를 집어 넣는 꼴이라고 낄낄댔다.
튀어나오기만 하면 아주 그냥 사지를 태워 죽일 작정이었다.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 온 혜연은 무기를 꺼내들고 경계하고 있는 계약자들에게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요! 모두 무기를 내리세요!”
“예? 하지만 뭐가 나올 줄 알고....혹시 아시는 마법진인 겁니까?”
혜연의 얼굴이 무척이나 밝았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네! 이 마법진이 너무 보고 싶어서 꿈에 나올 지경이었죠.”
“꿈요? 도대체 뭐기에...?”
어리둥절해 하는 계약자들 사이로, 마법진이 드디어 강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마법진이 만들어졌는데도 금방 이동할 수 없는 이유는 그만큼 이동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건 마계에서 많은 사상자가 생기지 않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것이기도 했다.
화아아악-!
강하게 한 번 빛이 내뿜어지고, 곧 그 빛은 흔적을 찾을 수 없게 사라졌다. 하지만 그 빛을 대신할 이들이 그곳에 있었다.
“뭐야?!”
“계약자?”
“계약자가 갑자기 왜 여기에 나타나?”
혜연은 나타난 그들을 향해 달려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태상님!!”
태상은 자신을 향해 달려와 와락 안기는 혜연 때문에 잠시 당황하긴 했으나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둘러 혜연의 몸을 살짝 끌어안아 주었다.
“많이 기다렸나보네.”
“우린 보이지도 않나봐. 태상한테만 달려가고.”
사로나가 웃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혜연은 정신이 없어서 그녀의 말을 듣질 못했다.
“왜 이렇게 얼굴이 상했어?”
태상이 묻자 혜연은 조금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졌다.
“악마들이 쳐들어왔어요.”
“뭐?”
“어억! 벌써?!”
일행들은 화들짝 놀라 각기 다른 모습으로 경악했다. 토다베스와의 일을 끝내고 최대한 빨리 돌아온다고 한 거였는데, 악마들이 쳐들어왔다고 하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악마들이 인간계를 공격한 것이 제법 오래 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언제부터?”
태상은 악마들이 쳐들어왔다고 해서 그녀의 안색이 이렇게 단번에 안 좋아 질 리 없다고 생각했다. 해서 묻자 혜연이 말했다.
“오래됐죠. 마계로 가신 후에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시작됐어요.”
“........”
태상은 주먹을 꽉 쥐었다. 악마, 이것들이 뒤로 이딴 짓을 하고 있었다 이거지?
아마도 악마 일부를 인간계에 보낸 것은 토다베스의 짓일 것이다. 그놈이 아니면 이런 짓을 할 리가 없었다. 대부분의 악마들은 다소 충동적이고 흥분을 잘 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토다베스는 그런 느낌이 전혀 없었다.
그는 악마답지 않게 차분하고 다분히 계산적이었다.
그래서 태상은 그가 악마들 중 가장 까다로운 상대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역시나 그의 짐작이 옳았다는 걸 알려주듯 인간계에 손을 써놓은 것이다.
“피해가 심해?”
“아뇨, 그렇진 않아요. 다만 계속해서 소모전을 하고 있어요. 계속해서 무승부죠. 시간을 오래 끌면 끌수록 당연히 피해는 늘어갈 거에요. 시간이 우리 편이 아니라는 게 정말 절 피 말리게 했어요.”
덕분에 이렇게 꼴이 말이 아니고 말이다.
잠도 제대로 자질 못했다. 태상이 오면 다 해결 될 거라고 그에게 기대면서도, 스스로 뭔가 해결해보고 싶은 욕심이 났다. 하지만 계약자들의 목숨이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이 그녀의 어깨를 너무나도 무겁게 만들었다.
아무리 유능하다 해도 이건 전쟁이었다.
그녀 혼자서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태상이 왔으니 당연히 안길만도 했다.
그녀는 자신이 아직도 그의 품에 안겨 있다는 것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태상은 그녀의 몸을 미련 없이 놓아 주었다. 덕분에 혜연의 얼굴에는 서운함과 아쉬움이 깃들었다 사라졌다.
“마계에선 어쩌셨어요? 아!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들어가죠. 다들 피곤하시죠?”
“옙. 당장 좀 씻고 침대에 누워서 하루 종일 잠 좀 자고 싶습니다.”
일행 중 누군가가 혜연의 물음에 대답했다. 다들 같은 생각이었기에 반박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른 일행들은 마계라는 말을 듣고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저들이 지금까지 뭘 하고 온 이들인지를 깨달았다. 악마들의 소굴인 마계에 가서 악마들을 처단하고 돌아 온 사람들인 것이다.
물론 그들이 마계에 갔다고 인간계가 침략을 받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혜연이 한 말이 사실임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마계로 가서 그들이 뭘 하고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누구나 궁금해 할 소식이었다.
주변에 있는 이들은 일행의 사진을 몰래 찍었고, 인터넷에 올렸다. 당연히 마계로 갔던 이들이 돌아왔다는 소식은 빠른 속도로 퍼지기 시작했다.
더불어 그들 속에 CMC 사장이 있었다는 것은 크나 큰 이슈가 됐다.
이를 채 신경 쓰지 못한 그들은 모두 각자 아주 오랜만에 찾아 온 평화를 만끽하고 있었다.
마계에서는 24시간 몸에 경계를 하고 있어야 해서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동안 긴장으로 인해 뭉친 근육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그건 태상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직 긴장을 아예 풀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다른 이들처럼 완전히 무방비해지지는 않았다.
“태상아!”
태상이 씻고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나오는데, 누군가가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놀란 표정을 짓지 않았다. 누군가가 오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고, 그 누군가가 송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녕.”
결혼하고 나면 마누라 보는 게 지겨워 진다는데 왜 태상은 그러질 않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그들의 상황이 평범한 다른 이들과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송이가 태상이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걸 신경 쓰지 않고 그의 품속으로 달려왔다.
태상은 혜연을 안을 때와는 달리 그녀의 몸을 힘주어 꽉 끌어안았다.
“하아~.”
그녀를 품에 안고서야 태상은 자신이 지금 이 순간 완벽하게 긴장을 풀었음을 깨달았다.
“다친 곳은?”
송이가 눈물을 매달고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쓰다듬으며 물었다. 태상은 두 팔을 벌려 말했다.
“직접 확인해봐.”
그의 단단하고 오밀조밀하게 붙어 있는 근육이 송이의 시야에 들어왔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태상의 몸을 보고 얼굴을 붉힐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의 몸은 참 아름다운 편이었다. 그래서 송이는 늘 그의 몸을 볼 때마다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우락부락하지 않고, 적당하게 자리 잡혀 있었기에 송이는 그의 근육이 좋았다. 근육을 더 크게 키우고 싶어 하는 태상에게 송이가 도끼눈을 떴던 예전의 일이 아니었다면 이 아름다운 근육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상처는 이미 힐러들이 모두 깨끗하게 치료를 해주었다. 송이는 그의 오른팔이 불과 얼마 전 완전히 떨어졌다가 다시 붙었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
송이는 그의 몸을 더듬거리며 꼼꼼히 확인을 한 후에야 안도의 숨을 쉬었다.
“잘 있었어? 태우는?”
“혜연씨가 엄청 챙겨줘서 어머님 아버님 할아버님 모두 무사하셔. 그리고 태우 큰 거 보면 너 깜짝 놀랄 걸?”
“이런, 태우가 아직 내가 아빠라는 거 기억할까?”
“솔직히 난 자신 없어.”
“젠장. 끝나기만 해봐. 지겨워할 때까지 집에 붙어 있을 거야.”
“그래, 제발 그렇게 해. 백수 남편이라도 좋아.”
송이의 입술에 자신의 입을 비비며 태상이 잠시 그녀와의 해우를 즐겼다.
똑똑똑
노크가 들리지 않았다면 이곳에서 좀 더 농염한 짓을 하게 됐을 테지만 그런 일은 아쉽게도 일어나지 않았다.
“들어와.”
태상이 말하자 노크를 안 이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들어 온 이는 혜연이었다.
“쉬시는 데 제가 와서 싫으시죠?”
“네가 싫은 게 아니라 네가 가져 온 일들이 싫은 거지. 이리와서 앉아.”
태상이 자신의 앞에 있는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혜연이 태상의 옆에 딱 달라붙어 있는 송이를 보면서 웃음을 지었다. 송이는 마치 그의 옆구리에 매미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태상은 나른한 표정으로 그런 송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었고 말이다.
태상이 저렇게 풀린 얼굴을 짓는 건 아마 송이의 앞에서밖에 없을 것이다. 본인은 모르고 있는 것 같지만 말이다.
혜연이 소파에 앉은 후 그의 앞에 서류를 내밀었다.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간략하게 보고서 형태로 정리했어요. 현재 상황을 이해하시는 데 도움이 되실 거에요.”
“수고했어.”
태상이 서류를 들고 읽기 시작했다. 송이도 덩달아 그의 옆에 붙어 있었기에 함께 서류를 봤는데, 송이가 혜연에게 정말 대단하다는 듯말했다.
“이걸 혼자서 다 하신 거에요?”
“안타깝게도 저 밖에 할 사람이 없어서요.”
“와.....”
그의 옆에서 일을 하기에 유능하고 똑똑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라곤 생각하질 못했다. 송이는 어쩐지 그녀에게 사모님이라고 불리는 게 무척이나 황송한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상은 다 읽은 서류를 테이블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리곤 마른세수를 했다.
“고생했다.”
“아니에요. 오히려 죄송해요. 좀 더 피해를 줄였어야 했는데....그동안 그렇게나 열심히 준비했는데, 솔직히 초반에는 좀 버벅 거렸어요.”
“일단 우린 마계에 가서 사샤를 죽였다. 지금 남은 대악마는 한 명이야. 근데 그 남은 놈이 무척이나 까다로운 놈일 것 같다는 게 문제지.”
“사샤....그럼 혹시 레베카는...?”
대악마 사샤를 죽였다는 말에 혜연이 역시나 레베카의 일을 물어왔다. 그녀는 여전히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
태상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혜연은 크게 실망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그녀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막막해졌던 것이다. 악마들이 침략한 것도 문제였지만, 그녀에 관한 문제도 제법 심각했다.
"사샤가 죽어서 레베카가 원래대로 돌아왔으면 벌써 연락이 왔겠지?"
“네, 그랬을 거에요. 아무런 연락이 없는 걸 보니, 죽이는 걸로는 풀 수 없나봐요."
젠장맞은 일이었다.
"그럼 평생 그런 모습으로 살아야 할 텐데....과연 받아들일 까요?”
“뭔가 호전 된 건 없는 거야?”
“없어요. 똑같죠. 늘.....아니 솔직히 더 안 좋아졌어요.”
송이는 레베카라는 말에 귀를 기울이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정확히 어떤 사정인지 송이는 아직도 태상에게 깊게 묻지 않았다.
하지만 묻지 않았다고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다.
“반은?”
“.....애쓰고 계시죠. 하지만 뾰족한 수가 없으니 그냥 옆을 지켜주고 있는 게 전부에요.”
============================ 작품 후기 ============================
다음편은 17분에 올라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