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22 침략 =========================================================================
사실 태상은 알고 있었다.
갑자기 뜬금없이 일어난 싸움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일 만큼 태상은 어수룩한 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맥콜에게 어떤 이유에서 일어난 싸움인지 물었고, 그다지 입 밖으로 꺼내고 싶지 않은 얘기였으나 어쩔 수 없이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일의 사정을 들은 태상은 토비의 일방적인 잘못이라는 것을 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가 알고 있는 토비는 그런 말을 할 성격이 되질 못했다. 그런 말을 함부로 입 밖에 내뱉는 사람이었다면 태상이 받아주지도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이번 일이 너무 토비가 노골적으로 그에게 시비를 걸고 있다는 것이 너무 티가 났다.
해서 태상은 토비가 자신이 알던 그 토비가 아닌 다른 인물로 바뀌었거나, 아예 작정을 하고 그의 전투조원으로 숨어 든 스파이 둘 중 하나 일거라 생각했다.
고작 한 명이 뭐 그렇게 많은 일들을 할 수 있겠냐 한다면, 오산이었다. 지금 일행은 그 어느 때보다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강한 상태였다. 그러니 토비가 자꾸만 원인을 제공하게 되면 내부의 기강이 엉망이 될 수 있었다.
태상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고, 위험한 상황을 초례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단언 컨데, 그가 이렇게 대놓고 문제를 일으킬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태상이 토비의 멱살을 잡아 위로 잡아들어 올린 후 바닥으로 내던져버렸다.
“크헉!”
태상의 힘이 그냥 힘인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지자 갈비뼈가 우득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토비의 몸이 곧 축 늘어지고, 기절을 했는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태상은 소은의 옷이 완전히 찢겨져서 제대로 된 기능을 하고 있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외투를 벗어 주었다.
“다리가 엉망이군.”
혼자서 들어가긴 글렀으니 아무래도 이곳에서 응급처치를 해야 할 듯싶었다.
“훅.....전...흐윽..괜찮..으니까...저..개자식 죽여 버려..주세요.”
단단히 화가 났는지 그녀의 눈이 독하게 번쩍였다. 하지만 태상은 일의 원인을 찾아야 했기에 그를 지금 당장 죽일 순 없었다. 태상이 그녀에게 참으라는 듯, 상처를 치료해주는 체력포션을 꺼내 그녀의 다리에 부어주었다.
“너 치료부터 받고. 지금 당장은 안 돼. 왜 너한테 그랬는지 알아봐야 한다.”
“뭘 물어봐요!!! 저 개 자식이!! 아랫도리를 형편없이 놀린 거죠!!”
“소은아.”
“저 새끼....흑...죽여줘요.”
소은의 눈에 깃든 분노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다리부터 다시 맞출 거야.”
태상이 그녀의 퉁퉁 부은 다리를 붙잡았다.
“아악!”
닿는 것만으로도 통증이 왔다. 소은이 비명을 지름과 동시에 태상은 망설이지 않고 그녀의 다리뼈를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우득! 우드득!!
“아아아아아악!!!”
그녀의 비명소리가 한차례 더 크게 울렸다.
제법 떨어진 곳에서 일을 치른 토비였지만, 귀가 좋은 그들이 이렇게까지 울려 퍼지는 비명 소리를 듣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행이 전부 그녀의 비명소리에 놀라 일어났고, 근원지로 서둘러 달려왔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세상에! 소은아!”
힐러들이 서둘러 소은의 다리를 살폈다. 그리고 간신히 태상의 외투로 몸을 가리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분개했다.
상황을 정확히 알진 못해도 대충은 알 것 같았기에 일행이 모두 토비를 향해 서늘한 시선을 보냈다. 태상은 그녀의 다리를 붙잡고 치료를 해주고 있었고, 토비는 바닥에 쓰러져 기절해 있는 모습이, 딱 봐도 나쁜 놈과 영웅을 구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저놈이 일 치른 거야?”
맥콜이 짐작이 된다는 듯 말했다. 태상은 조심스럽게 소은의 다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일단 상황은.”
“젠장, 저놈 저거 요새 불안하더니 사고 칠 줄 알았어!!”
빌어먹을 일이라며 증오 섞인 눈빛으로 토비를 바라봤다. 칠 수 있는 사고 중 가장 최악을 선택한 상황이었다.
“그냥 죽여 버리지 왜 기절만 시켜놨어?!”
“맞아, 그냥 죽여 버려요!!”
특히 여자들 쪽에서 경멸어린 시선이 토비에게 쏟아졌다.
마계에 들어오기 전에는 저런 아이가 아니었는데, 어떻게 저렇게 사람이 180도 바뀔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며 수군거리기도 했다.
태상은 고개를 저으며 토비의 몸을 안아 들었다.
“치료해. 갈비뼈가 전부 다 나갔을 거다.”
“싫어요! 왜 그딴 놈을 저희보고 치료하래요?!”
“맞아! 나도 싫어! 절대 안 할 거야! 쓰레기 같은 놈!”
하지만 힐러들이 토비를 고치는 것을 격하게 거부했다. 그녀들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는 하지만, 태상은 단호하게 말했다.
“어서 치료해. 너희들도 토비랑 친했잖아.”
토비의 성격이 이상했다면 소은이 의심 없이 그를 따라오지 않았을 거다. 솔직히 소은은 토비에게 마음이 있기도 했다. 해서 그가 잠시 함께 산책을 하지 않겠냐는 물음에 그가 자신에게 고백을 하려는 건가 싶어 따라 나선 거였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사람을 강간하려고 하는 남자에게 호감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에 대한 마음이 산산조각 난 것도 모자라 큰 충격과 기억이 생겨 소은은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다 알고 있는 그녀들이기에 절대 토비를 치료하고 싶지 않아했다.
“그러니까 더 역겹죠! 그놈 얼굴 보고 싶지 않아요. 오빠가 죽이지 않으면 저희들이 치료하는 척 하고 데려가서 죽여 버릴 거에요!”
힐러들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불같았다.
태상도 마음 같아서는 토비의 목을 그대로 그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토비에게 무언가 미심쩍은 것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자백을 듣기 위해서는 치료를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단순히 충동적인 일이라면 그렇게 처벌하면 되겠지만, 그게 아닌 것 같아서 이러는 거다. 그러니까 내 말 듣고 치료해. 그가 원하는 일이 아닐 거라는 느낌이 들어. 그리고 그럴지도 모른다는 증거가 있고.”
“......”
힐러들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모두들 선뜻 나서지 않고 눈치를 봤다. 그만큼 분노가 컸으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태상의 말을 허투루 들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그녀들이 태상의 말에 어쩔 수 없이 토비를 치료해야 했다.
다만 그의 몸은 줄로 꽁꽁 묶어서 절대 도망칠 수 없게 만들었다.
“소은이 치료 잘 해주고, 다독여 줘.”
“네....”
마지못해 치료를 해주고, 힐러들이 소은을 데리고 사라졌다.
남은 일행들은 태상이 왜 그를 선뜻 죽이지 못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어했다.
“형님.”
그때, 종구가 조심스럽게 태상에게 다가왔다. 그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해 보였다.
“왜? 무슨 일이야?”
태상이 조금 지친 얼굴로 말하자 종구가 자신의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자 그의 옆에 있던 아이라가 말했다.
“종구씨가 할 말이 있대요. 토비......저 남자에 관해서요.”
아이라는 토비를 오빠라고 친근하게 불렀지만, 끔찍한 광경을 보았던 지라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태상은 무슨 정보이든 듣길 원했기에 종구에게 어서 말해보라고 말했다.
“그게.....조금 이상하게 생각 될진 모르지만, 제가 미친 놈이라고 할 지도 모르겠지만요.”
종구가 한참 머뭇거리며 자꾸만 눈동자를 불안하게 떨었다. 태상은 차분하게 그가 말하기를 기다려 주었다.
“토비형이 소은 누나를 분명히 좋아 했어요. 그것도 되게되게요. 순수하게!”
“순수하게 좋아하는 사이였다고?”
“네! 진짜에요. 저한테 연애 상담을 해달라고 했을 정도란 말이에요. 아, 이거 비밀로 해달랬는데....아, 아무튼 그랬던 토비 형이 어제부터인가? 좀 이상해졌었어요.”
“어제부터 이상해졌다라....”
태상은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상기했다. 하지만 딱히 특별한 일은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날 오늘 있었던 전투를 위해 정찰을 하러 간 조원들 중 토비가 섞여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혹시 이상해진 게 정찰을 다녀온 후부터였나?”
태상이 생각하기에도 토비는 이런 일을 저지를 만한 놈이 아니었다.
“네! 진짜 딱 그때부터 이상했어요. 엄청 까칠해지고 막 사방에 시비 걸고 다니구요. 눈동자가 탁한 게 무슨 약한 사람 같았다니까요?”
종구가 박수를 짝 치며 태상의 말에 격하게 공감했다.
“형도 뭔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시죠? 그러니까 토비 형 처벌을 바로 하지 않은 거잖아요. 그렇죠?? 전 솔직히 형이 이런 짓을 했다는 게 아직도 믿겨지지가 않아요. 형은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종구가 괜히 토비와 가까이 지낸 게 아니었다. 둘 모두 다 성격이 조금 소심한 편이었다. 해서 둘은 성격이 맞는지라 자주 친하게 모여 다녔다.
“아! 그렇다고 소은 누나를 강간하려고 한 형 행동을 두둔하려는 건 아니에요. 정말로요. 그냥 그렇다는 거 말씀 드리고 싶었을 뿐이에요. 형을 아무리 두둔한다고 해도 그건 두둔할 수 있을 정도의 일이 아니니까요. 솔직히 저도 화가 나 있는 상태고요.”
종구가 아이라를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말이 자칫 강간을 시도했던 토비의 행동을 두둔하려 하는 것이라 오해할 수 있었기에 뒷말을 붙인 것이다.
태상은 그의 말이 무척이나 도움이 됐다며 고맙다고 말했다.
“일단 저 녀석부터 깨워볼까?”
태상이 물을 가져와 달라고 부탁하자 종구가 알겠다며 움직였다.
기절한 사람을 깨우는데에는 물만한 것이 없었다.
촤아아악!
“으읍! 푸하!”
토비의 몸이 크게 꿈틀거리며 눈이 떠졌다. 어푸어푸 거리며 얼굴 정면에 맞은 물 때문에 한참을 정신 차리지 못하던 그가 자신의 몸이 묶여 있는 것을 확인하고 황당하다는 듯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이내 그의 시선이 태상에게로 향하자 의문을 담은 눈동자로 그를 바라봤다.
“이게.....어떻게 된 거에요?”
“그러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태상은 그의 눈동자에 더 이상 탁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더불어 그가 토비를 선뜻 죽이지 못했던 이유인 오른쪽 손바닥 천계의 심장도 잠잠했고 말이다.
토비의 근처에 갔을 때부터 시작 된 오른쪽 손의 뻐근함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 눈앞에 있는 토비는 진짜 토비라는 뜻이었다.
태상이 힐러들에게 토비를 치료하라고 했던 이유가 바로 천계의 심장 때문이었다. 만약 오른손이 반응을 하지 않았다면 태상은 그 자리에서 토비를 처결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번 문제를 신중하게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됐다.
“네가 방금 전에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 나?”
“아니요.”
토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더할 나위 없이 진심이 담겨 있었다. 태상은 일이 무척이나 꼬였다 싶었는지 깊게 한숨을 쉬었다.
“너 소은이를 강간하려고 했어.”
“.....예?”
토비가 엄청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자신이 도대체 뭘 들었는지 모르겠단 표정이었다.
“누가...누굴....제가 소은이를 강간하려고 했다고요?”
“그래, 방금 전에 소은이를 강간하려다가 나한테 걸려서 기절했다. 정말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 거냐?”
태상의 진지한 표정에 토비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말이 안 되다 보니 웃음부터 나온 것이다. 내가 소은이를?
둘은 나이가 동갑이어서 그런지 편하게 얘기를 하곤 했다. 그리고 함께 생활하는 시간이 늘어가자 자연스럽게 호감이 생겼고 말이다.
그녀에 대한 마음을 자각하자 어쩐지 부끄러워 요즘에는 종구에게 연애 상담을 하기도 했었다. 어떻게 고백을 할까 고민하고 있는 자신이 그녀를 강간했다고?
토비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왜 이런 장난을 치는지 이해할 수도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장난이라 해도 너무 심했다! 토비가 표정을 조금 굳히며 말했다.
“거짓말 하지 마세요. 제가 왜 소은이를 강....그런 걸 해요? 미친놈도 아니고. 이런 장난 재미없어요. 이거 풀어주세요.”
태상은 토비가 연기를 하고 있는건지, 아니면 정말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건지 유심히 살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연기를 하고 있는 거라면 절대 봐줄 수 없는 일이 될 테니 말이다. 하지만 토비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으니 지금 이 일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 조사를 해야 했다.
“네가 최초로 기억하는 기억이 뭐지?”
태상이 묻자 토비가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말했다.
"그야 당연히 형이 정찰 다녀오라고 해서 정찰 갔다가...갔다가....."
갔다가 그 다음에 내가 뭘 했지?
토비의 입이 갑자기 합죽이가 되어버렸다.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자신의 머리를 부여 잡았다.
정찰 다녀오고 그 다음엔?
다음...그 다음.....
혼란스러워 하는 토비를 보며 태상은 확실히 자신의 짐작대로 정찰 때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