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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자-218화 (218/251)

00218  바로세  =========================================================================

“네가 왜 여기에 있어?”

태상이 현재 자신이 무슨 꼴로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평하게 물었다. 송이는 흐음...하며 낯선 여자를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는 태상에게 말했다.

“점심 같이 먹으려고.”

혜연이 송이의 말에 이어서 말했다.

“오늘 직원들한테 고급 출장 뷔페 선물해주셨어요.”

“뭐야, 그랬어? 전혀 몰랐는데.”

“깜짝 선물이셔서 제가 일부러 알려드리지 않았어요.”

레베카는 한국어를 전혀 몰랐기에 그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알지 못했다. 그녀의 눈동자에 불쾌함이 서리고 목소리가 절로 뾰족해졌다.

[저 여자 누구에요?]

태상은 그녀의 물음에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아내.]

송이가 영어를 아무리 짧게 한다 해도, 태상이 한 말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더불어 그의 말에 레베카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도 말이다.

[말도 안 돼! 그런 거짓말 하지 말아요! 오빠는 나랑 같이 동거했어요. 그리고 아기까지 생겼다고요! 그런데 저 여자가 아내라고요?]

레베카가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그녀가 현실과 꿈을 구분하지 못하는 건 ‘태상’이 유일했다. 해서 일행들이 그녀에게 가장 꺼내기 어려워 하는 것이 태상에 관련 된 얘기였고 말이다.

송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던 태상은 레베카가 힘들더라도 모든 진실을 말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해서 송이가 자신의 아내라는 것을 솔직하게 말한 것이다.

[꿈과 현실을 구분해. 나와 그녀는 이미 법적으로 부부야.]

태상이 그렇게 냉정하게 말하며 그녀에게 자신의 무릎 위에서 내려갈 것을 말했다. 레베카는 간절하게 그를 바라봤지만, 태상은 외면했다. 이게 그녀를 위한 일이라는 걸 믿었기 때문이다.

송이는 둘이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며 천천히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혜연은 어찌해야 하나 싶어 안절부절 못했는데, 송이가 레베카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 손 잡고 내려와요.”

레베카는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했지만, 송이가 왜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것인지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손을 잡으라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무릎에서 내려오고 싶지 않았으니 말이다.

[나한테 왜 이래요? 고작 그런 손 하나로 내가 이 자리에서 물러 날 것 같아요?!]

레베카가 더욱 태상의 몸을 끌어안으며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의 무릎에서 내려오면 태상을 영영 그녀에게 빼앗길 거란 생각이 들었는지 제법 필사적이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본 송이는 화를 내지 않고, 도리어 다시 한 번 그녀에게 권유했다.

"내 손 잡고 내려와요. 내가 엄청나게 착한 여자였다고 해도 더 이상은 그냥 두고 볼 수가 없거든요. 그리고 난 그리 착한 여자가 아니에요."

그녀의 뺨을 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녀는 착했다.

혜연은 송이의 그런 태도를 보고 속으로 놀랐다. 만약 자신이 송이였다면 저렇게 웃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그에게 따지기부터 했을 것이다. 흥분하고, 화내고, 그가 바람을 피웠을까 싶어 전전긍긍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송이는 태상에게 아무런 책망의 시선도 보내지 않으며, 오히려 레베카에게 손을 내밀었다.

태상에게 레베카의 얘기를 들은 것인가 싶었는데, 태상의 표정을 보니 그것도 아닌 듯 했다.

손을 잡으려 하지 않은 레베카 때문에 송이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에게 여전히 날을 세우는 것이 그를 향하는 마음이 생각보다 깊은 모양이었다.

“넌 괜찮은 거지?”

결국 송이가 손을 거두고 태상에게 물었다.

태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레베카의 몸을 안아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내려가지 않을 거라 고개를 젓는 그녀의 몸을 억지로 바닥에 내려주었다.

레베카는 마지막 보루로 그의 팔을 선택해서 손을 놓지 않았는데, 태상이 그 팔까지 풀려고 하자 송이가 도리어 그를 말렸다.

“싫다잖아.”

“넌 이 꼴을 봤는데도 아무 느낌이 안 들어?”

태상이 어이없어하며 송이에게 물었다.

화를 냈으면 그가 이렇게 황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송이는 화를 내지도, 무언가를 묻지도 않았다. 송이가 왜 저렇게 행동하는 건지 태상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송이는 송이 나름대로 지금 상황에서 태연할 수 있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태상은 잘나도 너무 잘난 남자였다. 재력도, 외모도 어느 하나 빠지는 곳이 없는데 그를 좋아하는 여자들이 어떻게 없을 수 있겠는가. 그가 유부남이라고 해도 태상이 마음을 먹는다면 자신은 그를 말릴 수가 없었다.

다만 다행인 것은 그가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리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그는 자신의 가족을 충분히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송이가 봤을 때, 저 여자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를 사랑하는 것은 맞으나 일방적인 감정일 거란 짐작이 들었다.

그리고 태상이 만약 그녀와의 신뢰를 깼다면 저렇게 당당한 표정을 지을 수 없었을 거다. 송이는 그를 믿기에, 이렇게 태연하게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으며 그를 원망할 생각이 없었다.

“왜 아무 느낌이 없니? 당연히 있지.”

처음에는 생각지 못한 광경에 좋았던 송이의 기분이 바닥을 쳤었다. 하지만 그 기분 나쁨은 그가 바람을 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다른 여자에게 무릎을 허락한 것 때문이었다.

그녀가 질투 때문에 레베카와 자신을 몰아붙이는 건 곤란했지만, 이렇게 태연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던 태상이다. 뜻밖의 일이긴 했지만 송이가 침착하게 행동해준 덕분에 레베카를 차분히 설득시킬 수 있게 되었으니 다행인 일이었다.

“일단 자세한 건 나중에 설명 할게. 혜연! 반 부른 거야?”

“아! 네. 바로 연락 넣을 게요.”

[반? 지금 반 부르려는 거에요?]

레베카의 쏟아지는 한국어 중에서 '반'이라는 이름을 캐치해내고,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어지간히 그가 오는 게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그녀가 태상의 몸에 매달려 애타게 말했다.

[부르지 말아줘요! 아저씨가 오빠를 못 보게 만들었단 말이에요!]

[지금 네게 필요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반이야.그리고 못 보게 만든 게 아니라 내가 안 본거고.]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요. 나한테 필요한 사람은 반 아저씨가 아니라 오빠에요! 왜 그걸 몰라줘요?]

레베카는 그것이 무척이나 서럽다는 듯 눈물을 흘리려 했다. 태상은 그녀가 잡은 자신의 팔을 기어코 빼냈다. 그리고 그녀의 두 어깨에 손을 올린 뒤 시선을 마주하며 말했다.

[잘 들어. 나한테는 가족이 있어. 그래서 네가 꿨던 꿈에서처럼 네 옆에 있어 줄 수 없어. 넌 그걸 깨달아야 해.]

[오빠 가족은 나에요!]

[내 가족은 네가 아니야.]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자신에게 얼마나 다정했던 사람인데...얼마나 우리가 서로를 사랑했는데!

이제 와서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왜 하필이면 가장 바뀌지 않았으면 좋겠을 태상과의 일이 거짓말이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불과 며칠 전만해도 그녀를 위해 무엇이든 해주었던 사랑스러운 남자가 바로 태상이었다.

더욱이....더욱이 그녀에겐...!

레베카가 자신의 허전한 배를 쓰다듬었다. 검은색 줄기가 갑자기 나타나 그녀의 몸을 사로잡기 전에 쳐낸 덕분인지 그녀의 불룩 솟아 있었던 배가 제법 꺼져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또 언제 그 줄기들에게 그녀의 몸이 농락당할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현실은 그녀에게 너무도 끔찍하기만 했다.

그곳에서 레베카의 배에는 새끼 악마가 들어 있지 않았다. 오히려 축복받을 존재인 태상과 레베카의 아이가 들어 있었다.

도대체 이런 끔찍한 현실을 보여줄 거면, 왜 자신을 깨웠을까! 그냥 평생 그곳에서 사는 게 더 나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태상이 단호하게 레베카와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며 송이가 조금 누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송이는 레베카의 가련한 모습을 보며 불쌍하다는 동정심이 들었다. 역시 그녀의 짐작대로 태상이 원해서 그녀를 무릎에 앉힌 건 아닌 모양이었다.

때문에 그녀가 태상에게 말했다.

“진정시키고 좀 다정하게 얘기 해. 너 지금 윽박지르고 있다고.”

나름대로 그녀에게 친절하게 말을 해주고 있다고 여겼는데, 송이가 봤을 땐 아닌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레베카의 눈에 눈물이 잔뜩 맺혀 있었고, 누가 봐도 그녀가 태상에게 매달리고 있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하고 있어.”

태상이 송이에게 그렇게 말하고 레베카에게 다시 영어로 말했다.

[이 여자가 내가 사랑하는 여자다. 그곳에서의 일은 모두 꿈일 뿐이야. 너도 이미 인정한 일이잖아. 그러니까 그만해. 언제까지 날 붙잡고 약하게 있을 거야? 네 어리광을 받아주기엔 지금 사정이 너무 좋지 않아. 그러니까 이제 그만 정신을 차리고, 널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을 보라고.]

[......]

태상의 말에 레베카가 입을 다물었다. 지금 그녀를 위해서 전투조원들이 얼마나 노력을 하고 있고, 길드원들이 또 반이 얼마나 열심히 뛰어다니냔 말이다.

그녀를 위해 태상이 대악마를 천계의 심장으로 유인했고, 그로인해 천계의 심장을 그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들켰다.

덕분에 인간계는 위험해졌으니 레베카 때문에 일어난 일들에 대한 책임이 제법 무거웠다. 그녀를 위해 이만큼의 일들을 감수했는데, 정작 당사자가 꿈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면, 그 얼마나 허무한 일이냔 말이다.

태상은 레베카를 여동생처럼 여기며 좋아했다.

처음 천계에 갔을 때, 만난 인연이기도 했고 그녀의 귀여운 모습들을 아직도 똑똑히 기억했다.

그런데 레베카는 그런 그의 기억들을 실망으로 바꾸고 있었다.

[네가 강해졌으면 좋겠다.]

태상이 입을 열지 못하는 레베카에게 말했다.

그의 말에 크게 느끼는 것이 있는 걸까? 레베카는 축 늘어진 어깨를 한 채 뒷걸음질을 쳤다. 태상과 송이를 번갈아 바라보면서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잡는 것인지 끝내 눈물을 흘렸고 말이다. 송이는 도중에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는지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 팔을 벌렸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위로가 필요 한 것 같아요. 마음에 들어 할지는 모르겠지만, 위로해드릴까요?”

레베카는 송이가 갑자기 자신의 앞으로 와서 팔을 벌리자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이내 그녀가 자신을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주자 얌전히 그녀의 다독임을 받았다.

레베카는 깨어난 후로 누군가에게 동정 받는 것이 익숙했다. 그 대상이 태상의 여자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말이다.

쾅!

[레베카!]

그때, 헐레벌떡하며 반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반은 방 안 상황을 보며 잠시 당황스러워하다가 레베카가 얌전히 송이에게 안겨 있는 것을 보고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둘이 왜 서로를 안고 있는 거지?]

[위로해주겠대.]

태상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머리 끄댕이 잡고 싸우지 않아 얼마나 다행인가. 나름 보고 있으면 훈훈한 마음도 들고 말이다.

송이의 위로 덕분인지, 레베카는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어째서 태상의 아내인 송이에게 위로를 받고 안정이 될 수 있는지 묻는다면, 방금 있었던 일들은 레베카가 충동적으로 벌인 일이었기 때문이라 말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 흥분이 가라앉으니 다시 이성이 돌아 온 것이다. 송이의 품이 아예 도움이 되지 않은 건 아니었기에 레베카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죄송해요. 제가 어떻게 됐나봐요. 어떻게 여기에 온 건지 기억이 잘 안나요.]

레베카는 때때로 현실과 꿈을 구분하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말하거나 행동했다. 방금 전에 있었던 것도 마찬가지의 일이었고 말이다. 그녀는 수시로 태상을 찾았고, 오지 못한다고 분명히 말했음에도 전혀 듣지 못했던 사람처럼 다시 묻고, 또 물었던 것과 같았다.

[네가 힘들다는 거 알아.]

태상은 괜찮다며 그녀에게 웃어주었다. 레베카는 고개를 푹 숙이고 깊게 한숨을 쉬었다. 여전히 그녀의 눈동자에 미련이 남아 있었지만, 반까지 온 이상 그에게 계속 매달릴 순 없었다.

머리가 너무 아팠다. 지금은 태상에게 매달리는 것보다 눕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눕고 싶어요.]

레베카가 몸을 휘청이자 반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의 몸을 부축했다.

[알았다. 어서 돌아가자.]

============================ 작품 후기 ============================

레베카의 정신이 좀....좋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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