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17 바로세 =========================================================================
"할 수 있는 일? 나도 마음 같아선 뭐든 해주고 싶어.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그냥 옆에서 지켜보는 것밖엔 말이야! 적어도 넌 레베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잖아. 그냥 힘들어 하는 레베카를 위해서 얼굴이라도 한 번 보여줘. 널 자꾸만 찾는 다고!"
"내가 레베카를 만나러 가는 건, 그녀를 위한 일이 아니야."
태상이 역시나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반은 답답한 마음에 주먹을 꽉 쥐고 부르르 떨었다.
"그럼 도대체 내가 레베카를 위해서 뭘 해줘야 하는 거지? 아는 거라도 있으면 말 좀 해봐!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어서 돌아버릴 것 같다고!"
"지금 나한테 어리광 피우는 거야?"
태상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자 반이 얼굴을 붉혔다.
"젠장! 지금 내가 애새끼처럼 굴고 있다는 건 나도 알고 있어. 빌어먹을..."
쪽팔린 건 사실이지만, 쪽팔림 하나로 태상이 그녀를 보러 가준다면 감수 할 수 있었다.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으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태상은 갑자기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왜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지? 내가 보기엔 할 수 있는 일이 있는데."
"뭐?"
태상의 뜻밖의 말에 반은 굳어있던 표정을 풀고 되물었다.
'내가 레베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반은 왜 그런 걸 알고 있으면서 여태 말하지 않았냐며 서둘러 말해보라고 태상을 재촉했다.
태상은 정말 듣고 싶냐 며 그에게 재차 물었고, 반은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들을 준비가 됐는지 모르겠지만, 반 네 마음에 솔직해져. 그리고 레베카의 의미가 되어줘.”
“뭐?”
반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되물었다. 태상은 그에게 설명했다.
“난 레베카를 살게 할 의미가 될 수 없어. 그건 너도 알잖아.”
그에겐 사랑하는 사람이 이미 있었으므로 레베카는 절대 그의 여자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태상을 계속해서 원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가 그녀의 옆에 있어준다면, 살고자 하는 의지를 가질 지도 모른다.
“정확히 네가 말하는 의미가 뭔지 모르겠어.”
“모른다고 거짓말 치지 마. 이미 짐작하고 있잖아.”
태상이 어림없다는 듯 말했고, 반은 너무 경악해서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의미..의미라고? 내가 그녀의?
반은 레베카를 자신의 딸처럼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와 사랑에 빠지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반이 어처구니없어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농담 할 거면 재미 하나도 없으니 그만 둬."
"레베카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짓말을 하지 마. 이미 다들 눈치 채고 있으니까."
“헛소리!”
반이 격하게 말했다. 하지만 태상은 피식 웃었다.
“수염이나 좀 깎고 그런 소릴 하지? 그 덩치로 쓰러져서 영양제 먹으러 가기 싫으면 몸 좀 챙겨. 아무것도 아닌 사람에게 그렇게까지 자신의 몸을 망가트려 가면서 간호하는 사람은 없다고.”
하지만.....
반과 레베카의 나이 차이가 얼마인데 그런 소리를 한단 말인가!! 태상이 자리에서 일어나 반의 어깨에 손을 툭! 올렸다.
“나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겠지. 생각 못해봤을 거야. 나도 그렇게 생각 해. 레베카가 많이 어리긴 하니까. 근데 요즘 세상에 나이 차이가 뭐 어때서? 나이 같은 거 다 빼고 사람과 사람 사이만으로 생각해봐. 그럼 다른 대답이 나올 걸?”
“.......”
반은 지금 자신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다는 것을 알기나 할까?
태상은 이만 나가보라며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며칠간 머릿속이 많이 복잡할 것이다. 레베카를 위해선 반이 자신의 마음을 확실하게 직시해야 했다.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진짜 사랑이 아니다. 아니, 진짜 사랑이었다 해도 보답 받지 못하는 사랑이니 접어야 할 것이다.
접어야 하는 사랑 앞에서 그걸 빠르게 치료하는 것은 다른 사랑이 찾아오는 것뿐이다.
태상이 가장 원하는 것은 반이 레베카에게 태상과 같은 의미의 사람이 되어주는 것이었다.
생각지 못해 봤다고,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이 어디 가는 건 아니다. 그 마음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은 태상이 장담할 수 있었다.
뒤늦게 스스로 깨달은 것도 아니고, 남에 의해 자각하게 되었으니 그의 마음이 복잡할 것이다.
지금까지 생각 못해본 거라면, 그는 이제서라도 제대로 생각을 해봐야 할 것이다. 그게 레베카를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일행 중 눈치 빠른 이들은 반의 마음을 알아채고 있었다.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둘 사이의 일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함부로 다른 이가 끼어들 일이 아닌 것이다. 더욱이 레베카가 태상을 사랑하고 있는 지금은 더욱 더 말하기가 꺼려졌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태상이 반에게 자신의 마음을 똑바로 알라며 말을 한 거다.
반은 혼이 쏙 빠진 얼굴로 서서 흔들리는 눈동자로 태상을 바라봤다. 왜 자신이 태상의 말에 아니라고 말을 할 수가 없는 건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결국 태상이 나가라는 의미로 문까지 열어주자, 아까 전엔 붉었던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밖으로 걸어갔다.
본전도 찾지 못하고 혼란만 얻고 가는 반이었다.
**
“잘 다녀오렴.”
“네, 어머니.”
송이가 예쁘게 차려 입고 말했다. 밖으로 나가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운전기사가 그녀에게 문을 열어주었고, 그녀는 우아한 몸놀림으로 뒷좌석에 올라탔다.
미리 목적지가 어디인지 말해놓았기에 굳이 수고스럽게 어디로 가자고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대신 송이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음식은 잘 준비해놓으신 건가요?”
[예, 사모님. 넉넉하게 준비 다 해놨습니다.]
“그래요. 여기서 얼마 걸리지 않으니 금방 도착 할 거에요.”
[알겠습니다.]
간단하게 통화를 끝낸 송이가 가고 있는 곳은 바로 태상의 회사 CMC였다.
요새 태상이 제대로 퇴근도 못하고 계속해서 야근을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 그녀가 이렇게 깜짝 선물처럼 전 직원에게 출장 뷔페를 준비시켜 놓은 것이다.
전직원을 위해 그냥 출장 뷔페도 아닌 고급 출장 뷔페를 부른다는 것을 송이가 마음먹는 데까지는 많은 고민이 필요했다. 하지만 세연의 노력 덕분인지, 송이의 씀씀이에 대한 기준이 점점 높아져 가고 있었고, 그로인해 태상을 위해 출장뷔페를 부른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무리 고급 출장 뷔페라지만, 태상에겐 집밥을 먹이고 싶었던 송이는 자신이 직접 만든 요리로 따로 도시락을 만들어 가져가고 있었다. 집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일하는 태상의 얼굴이 보고 싶기도 했고, 깜짝 이벤트를 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차를 몰고 회사에 도착하자 마침 점심시간이 되어 직원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혜연에게 전화를 걸어 태상이 밥 약속이 따로 없으며 (일부로 혜연이 스케줄을 뺐다)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 정보를 얻은 상태였다.
도시락을 직접 들고 움직인 송이는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생각지 못한 사람을 만나야 했다. 바로 혜연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사모님!”
혜연이 송이를 보자 큰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이곳에서 태상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과 혜연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일반인도 다 알아보는 데, 그녀가 큰 목소리로 별로 나이 차이가 나지 않는 여자에게 ‘사모님!’이라고 부르며 반긴다는 것은 굉장히 놀라운 일이었다. 더불어 시선을 끄는 일이기도 했고 말이다.
“왜 나와 있어요?”
“사모님이 오신다는 데 마중 나와야죠. 지금 직원들이 맛있게 식사하고 있어요.”
회사 전체에 방송을 돌려 출장뷔페를 불렀으니 모두 참석을 하라고 말했다. 덕분에 지금 뷔페로 꾸며진 지하층은 직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맛있게 먹어주고 있다니까 다행이네요.”
“어떻게 이런 깜짝 이벤트를 준비하실 생각을 하셨어요? 반응이 너무 좋아요.”
공짜로 맛있는 거 먹여준다는데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다들 고생하는 것 같아서요. 태상이는요?”
“올라오세요. 아직 사모님이 준비하신 이벤트라는 거 모르세요.”
일부러 사장실을 빼고 방송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늘 태상은 송이에 의해 아무 것도 모르는 바보가 됐다. 하지만 그걸 싫어하진 않을 것이다. 혜연이 잔뜩 신나 하고 있었다. 송이보다 훨씬 더 좋아하고 있었다.
송이가 그런 혜연의 모습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
혜연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송이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제가 혜연씨한테 늘 고마워하고 있다는 걸 말 했던가요?”
“음.....하셨던 것 같은데, 그 말은 다시 들어도 기분이 좋네요. 제가 사모님한테 도움이 되고 있다는 걸 테니까요.”
태상의 곁에서 도움을 주고, 송이를 위해 많은 것들을 도와주었다. 지금도 이렇게 선뜻 나서서 도움을 줬고 말이다.
송이는 그런 혜연에게 늘 고마웠다.
“혜연씨를 위해서 저도 뭔가 해줄 수 있는 게 있다면 좋겠어요.”
혜연은 돈으로 좌지우지 되는 이가 아니었다. 그녀를 스카웃해 하려는 이들이 그동안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CMC의 간판 얼굴이었고, 그녀의 능력이 출중하다는 것 또한 알려진 사실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모든 제안을 거절했다.
“그럴 필요 없으세요.”
이미 삶을 받칠 만큼의 도움을 태상에게서 받았다.
더욱이 혜연의 마음속에는 꺼내지 말아야 할 태상에 대한 마음이 들어 있다는 것 하나 만으로도 송이에게 진 빚이 너무나도 많았다.
해서 혜연은 송이를 볼 때마다 잘해준 것이고 미안해 하는 거였다. 이런 마음을 없애지 못하고 질질 끌기만 하는 자신 때문에 말이다. 말을 하지 못하는 일이었기에 송이에게 감사 인사를 받을 때마다 혜연인 도리어 그녀에게 미안함을 느껴야 했다.
자신을 철석 같이 믿고 있는 송이의 믿음이 사실은 무척이나 부담스럽다는 것을.....
아마도 그녀는 평생 모를 것이다.
“들어가시죠.”
가을로 날이 접어들자, 제법 밖이 쌀쌀했다.
태상이 일하는 곳에 오는 것은 몇 번 되지 않았고, TV에서만 보던 곳을 오니 절로 이리저리 고개가 돌아갔다. 거대한 검을 들고 돌아다니는 사람도 있어서 송이의 눈을 동그랗게 커지게 만들었다.
저런 위협적인 무기를 들고 다님에도 아무런 제재가 없는 이는 계약자밖에 없었다. 하지만 저들이 무기를 함부로 휘둘렀을 때, 그 책임은 배가 된다.
한국에서는 일반인들에겐 여전히 사형을 금지하지만, 계약자들에겐 사형이 허락 되니 말이다.
거리를 나갔을 때, 계약자들을 만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긴 했지만 이렇게 많은 계약자들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저 방에 계세요.”
“아!”
태상이 있는 층에 올라오자 송이는 들고 있는 도시락을 다시 한 번 바라봤다. 혹시나 움직일 때 망가지지는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혜연은 그녀의 기척을 태상이 느끼지 못할 리는 없었지만, 깨금발을 들고 살금살금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송이의 모습을 귀엽게 바라봤다.
쿵!
그때, 갑자기 태상이 있는 방 안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송이와 혜연 둘 모두가 들릴 만한 소리였기에 깜짝 놀라 그녀들은 시선을 마주했다.
“잠시만요.”
태상이 분명 안에 있는 것을 방금 전에 확인하고 왔기에 쿵소리가 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뭔가 일이 일어난 게 아니라면 저 소리가 났을 리가 없었다.
위험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혜연이 송이를 자신의 뒤로 숨기고, 문을 벌컥 열었다.
“태상님?! 괜찮으...레베카?”
혜연이 당황스러워 하며 안의 광경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레베카가 소파에 앉아 있는 태상을 덮치고 있는 모습이었다. 태상은 미처 혜연의 뒤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레베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영어로 말했다.
[레베카, 네 자리로 돌아가.]
[싫어요!!]
레베카는 태상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일어나지 않겠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상황이 좋지 않았기에 거친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그냥 내버려둘 순 없었다.
[도대체 여긴 어떻게 온 거야?]
[혼자서 왔어요. 아무도 태상 오빠랑 만나게 해주질 않잖아요!]
하아.
태상이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반한테 얘 좀 데려가라고 해.”
"음...그 전에 사모님이랑 얘기를 좀 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혜연이 몸을 옆으로 움직여 태상이 송이를 발견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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