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자-216화 (216/251)

00216  바로세  =========================================================================

“시간을 앞당긴다. 일주일 내로 마계로 이동할 거야. 내가 마계로 간다면 저들도 날 찾으러 마계로 올 테지. 이곳에서 전쟁을 할 순 없어.”

“그건 너무 위험해요. 아직 전투조들은 준비가 되지 않았어요! 지금도 최대한으로 빠르게 준비를 하고 있는 거라고요. 이대로 막무가내로 도전하면, 분명 문제가 될 거에요!”

혜연이 그를 말렸다. 이 일은 급하게 진행한다고 성공률이 올라가는 일이 아니었다. 지금도 충분히 최대한으로 시간을 단축시키면서 일을 진행시키고 있었는데, 어떻게 일주일 내로 모든 준비를 마친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뜻밖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닙니다! 저희들은 이미 준비가 됐습니다!”

전투조원 중 한 명이 말한 것이다.

그에게로 시선이 쏠리자 그 옆에 있던 전투조원이 덩달아 말했다.

“맞습니다! 비록 실력은 뛰어나지 않을지 몰라도, 놈들을 죽이고 싶은 마음은 충분하다 못해 넘칩니다! 사장님이 함께 해주신다면 저희들은 할 수 있습니다!”

그들 모두가 같은 생각인지 눈빛이 강렬했다. 그들은 태상이 얼마나 강한지 잘 알고 있었다. 매번 그의 강함에 혀를 내둘렀다. 그들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태상이 원하는 만큼의 수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물론 혜연도 그들이 태상처럼 강해지는 것을 바라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죽지 않고 돌아올 만큼의 실력이 되길 바라고 있었다.

마계로 간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았기에 자꾸만 걱정이 들어 그들의 실력이 완성되지 않았다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대로 있다간 1년도 부족할 판이었다.

일주일이건, 한 달이건 마계는 여전히 위험할 거다.

어차피 위험한 걸 알면서 시작한 일이었다.

혜연은 그들의 말에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혼자서 악마를 상대하는 태상을 보니 그들은 더욱 자신들이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생각이 들었다. 언제까지 민폐만 끼치고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해야 하는 일이 뭔지 아주 잘 알고 있기에,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마계로 가는 것에 동의를 했던 거였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목숨을 아끼려고 할 이유가 없었다.

그들의 마음은 이미 오래 전, 모든 준비가 끝나 있었다.

어차피 위험한 건 똑같은데, 좀 더 인간계가 안전해지는 쪽으로 움직이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곳에는 그들의 가족들이 있었다. 즉 그들 또한 태상처럼 아니, 태상과 똑같이 인간계가 위험해지는 걸 바라지 않았다.

"좋아. 일주일이다. 지금부터 일주일 후, 마계로 떠나는 거다."

태상이 전투조원들의 말을 무척이나 흡족해 하며 말했다. 태상이 원하는 것은 저들의 실력이 아니라 저런 마음가짐이었다. 목숨을 사리지 않고 악마들에게 대항할 마음가짐. 그것이 갖춰 져야 마계에 가도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태상은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하는 혜연의 말이 잘못 됐다고 생각했다.

이미 그들은 태상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전에 준비가 된 걸지도 모르겠다. 일주일 후, 태상은 그들과 함께 마계로 가서 대악마 카카로치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더불어 사샤와 나머지 대악마까지 모조리 다 해치울 것이고 말이다.

대악마만 죽여도 인간계는 악마들에게서 승리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대악마가 죽어 따를 이들이 없어진 조무래기들은 태상에게 위협이 되지 않았다. 더 이상 의미 없는 죽음이 일어나선 안 된다.

레베카처럼 악마들에게 희생 되는 일도 없어야 하고 말이다. 태상이 원하는 것은 인간계가 과거의 평화를 되찾는 것이었다.

계약자니 악마니 천사니 그딴 거 전부 다 없는, 서로 죽고 죽이지 않아도 되는 평화로운 세계 말이다.

**

며칠 후.

침대에 누워 한참을 일어나지 못하던 레베카는 결국 꿈의 끝을 인정하고, 현실에서 눈을 떴다.

다들 자신을 불쌍하다는 동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그녀를 가장 힘들게 했다. 몸이 바뀌고, 끔찍한 것들을 낳는 존재가 된 것보다 그들의 시선이 더 아프다는 것을, 그녀 혼자만 알았다.

“이미 다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않아도 돼요. 설명을 해줄 필요도 없어요. 듣고 싶지 않으니까.”

레베카가 침대에 누운 채로 반에게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레베카....나는...”

반이 고개를 푹 숙였다.

도대체 그녀를 위해 무얼 해줄 수 있을까? 뭘 해야 그녀를 위한 일이 되는 걸까?

자신이 겪었던 것들이 모두 현실이 아니었음을 알았기에 그녀의 눈은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누군가가 말해 준 게 아니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레베카는 스스로 그것을 모두 깨닫고 있었다.

이 얼마나 잔인한 일이란 말인가!

꿈 속에서의 그녀는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 사실이 그곳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해주었다.

악마는 잔인했다. 그녀를 절망하게 만들었다. 차라리 이대로 죽는 게 더 나은 것이라 생각하게 만들었고 말이다. 악질적이다. 왜 그들을 악마라 붙였는지 알 것도 같았다.

그런 것들이 악마가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악마란 말인가!

반은 그녀의 죽어버린 눈을 바라보며 도대체 무슨 희망적인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만 벙긋거려야 했다.

레베카는 그 모든 것들이 거짓이었다는 것에 절망했고, 눈물조차 나지 않을 만큼 슬퍼했다.

왜 이게 현실이냐고, 왜 날 깨웠냐고 원망하고 싶었다.

지금 당장 차라리 자신을 죽여 달라고도 하고 싶었고 말이다. 하지만 태상에게 그런 자신의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그녀를 붙잡았다.

아직도 레베카는 태상이 자신의 연인이 아니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어서 종종 현실과 꿈을 혼돈 하곤 했다.

“태상 오빠는요?”

생각 같아서는 그를 레베카의 곁에 하루 종일 머물게 하고 싶었지만, 레베카의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바로 마계로 가는 일 말이다. 그들이 마계로 가서 사샤라는 악마와 단판을 지어야 레베카의 일도 해결할 수가 있었다. 그러니 빌어먹을 일이지만, 반은 레베카의 일보다 그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 사실 그 일이 아니라 해도 태상은 레베카의 곁에 반처럼 있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태상이 레베카의 옆에서 해줄 수 있는 것은 부정밖에 없었으니까 말이다.

너와 난 연인이 아니야.

난 널 사랑한 적이 없어.

레베카는 자신이 겪었던 것들이 꿈이라는 것을 인정했지만, 태상만은 놓지를 못했다. 해서 이렇게 자주 반에게 태상이 어디에 있는지, 언제 오는 것인지 묻고 또 물었다.

그가 오지 않는다고 분명 말 했음엥도 불구하고 그녀는 몰랐던 사실인 것처럼 다시 그에게 물어왔다.

반은 그가 레베카의 곁에서 그녀를 다독여 줄 수 있는 거 아니냐고 주장했지만, 그건 그녀에게 현실을 부정시키는 일밖에 되지 않을 거라며 그럴 수 없다고 말했다.

그녀를 살릴 생각이면, 오히려 그가 레베카의 곁에 있는 건 좋지 않았다. 태상은 레베카를 약하게 만드니까 말이다.

그를 보면 또 다시 꿈속을 생각하게 될 것이고, 환상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녀는 태상이 자신의 남자가 아니라는 것을, 그가 그녀의 곁에 있을 이유가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아야 했다.

태상도 자신이 그녀의 곁에 있는 것이 진정으로 레베카를 위한 것이었다면 시간을 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니 그녀의 곁에 가까이 가지 않는 방법을 통해 그녀를 강하게 만들려 한 것이다.

태상은 레베카가 부디 죽음 말고 다른 선택지를 가지길 바랐다.

“오지 않아. 앞으로도 계속 널 보러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

반이 말하자 레베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왜 날 보러오지 않죠?”

다들 날 동정하는데, 가장 내가 동정받길 원하는 그는 왜 오지 않는 걸까?

태상 오빠만 곁에 있어준다면 이 현실도 받아 들일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레베카가 반에게 애원했다.

“태상 오빠가 보고 싶어요.”

“말 했잖아. 오지 않는다고.”

“왜요? 왜 올 수가 없어요? 내가 필요한데, 이렇게 보고 싶다는데 왜요?”

다들 날 동정하잖아. 그러니까 불쌍한 나한테 태상 오빠를 줘!!

“.....”

애원하고 있는 레베카에게 차마 네가 아무리 이런다 해도 태상은 오지 않을 거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은 레베카가 아니라 송이였다. 그러니 결코 그녀의 사랑에 보답을 해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를 만나러 올 수가 없는 것이다.

그녀의 사랑에 보답을 해줄 수 있었다면 태상은 굳이 그녀에게 접근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사랑에 보답을 해줄 수 없었다.

그에겐 가족이 있다.

사랑하는 아내, 사랑하는 아들 말이다.

레베카는 그에게 다른 여자와 낳은 아이가 있다는 것을 몰랐다. 아마도 그걸 알게 되면 그녀는 무너져 버릴 것이다.

“왜 아무 말도 안 하시는 거에요?”

레베카가 다 알고 있으면서도 부러 물었다. 반에겐 잔인한 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레베카 스스로가 너무 힘들어서 그걸 신경 쓸 수가 없었다.

“바빠서 그렇다.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바빠서. 그래서 오지 않는 거야.”

반이 용케 변명거리를 생각해 내고 말했다. 그의 말에 레베카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그랬죠. 악마랑 싸워야 하니까. 날 이렇게 만든 악마를 찾고 있다고 했죠? 날 구하기 위해서.”

“그래, 그런 거다.”

반은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을 보면 누구나 그가 괴로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을 것이다. 레베카는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기에 누구보다도 적나라하게 그의 거짓말을 눈치 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레베카는 그래, 악마 때문에 오지 않는 거야. 내가 보기 싫어서 오지 않는 게 아니야...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반의 그런 태도는 레베카를 위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레베카에게 더 이상의 충격을 주어서는 안 된다 생각했고, 결국 그녀가 원하는 방향으로 다독였다.

그것이 그녀에겐 독이 된다는 것을 모르고 말이다.

그러길 하루 이틀 반복됐다.

반은 참고 참다가 결국 태상을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태상은 정말 말했던 것처럼 레베카를 찾아오지 않았다. 그녀에게 잠깐 얼굴 한 번 보여주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아예 발 길을 끊어버리는 건지 그는 조금 화가 나버리고 말았다.

사정을 전부 다 알면서도 말이다.

“앞으로 레베카를 어떻게 할 생각이지?”

태상은 서류를 들여다보다가 그의 갑작스러운 방문을 받은 상태였다. 반이 갑자기 들어 온 것은 문제가 아니었지만, 그가 가져 온 문제거리는 그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알잖아. 내가 레베카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많지 않다고.”

“난 네가 레베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녀가 살았으면 하는 거냐 아니면 죽었으면 하는 거냐?”

“그걸 말이라고 해? 당연히 레베카가 살았으면 좋겠지. 그냥 사는 게 아니라 예전처럼 밝게 웃으면서 지내길 원해. 그리고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고.”

사샤를 잡아 죽인다고 그녀가 ‘여왕’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확실하지 않았다. 어쩌면 사샤를 죽인다 해도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지도 모른다. 물론 그건 최악의 일이었기에 그렇게 되지 않길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태상은 그렇게 된다 해도 레베카가 살아주길 바랐다. 선대 여왕은 그 끔찍한 여왕의 몸으로도 오랜 세월을 살았다.

죽지 못해서 산 것이긴 했지만, 그녀 나름대로의 사는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그녀를 태상의 손으로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는 것은 최악 그리고 최후의 방법이 될 것이다. 그녀가 자신의 목숨을 완전히 포기해버렸을 때가 아니고서야 그런 결말을 바라지 않는다.

“그녀를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있어. 그러니 이렇게 굳이 찾아와서 화내듯이 말하지 마. 내가 이렇게 행동하는 건 레베카를 위해서야. 그러니 너도 그녀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해."

레베카가 강하다면 그렇게라도 살아주길 바랐다.

============================ 작품 후기 ============================

추천 한 번씩만 해주신다면 제게 큰 도움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