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자-197화 (197/251)

00197  민성희  =========================================================================

그때, 태상이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모두 다 안전하게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질서를 지켜주십시오. 여러분들은 저와 계약자들이 지킬 겁니다.]

태상의 단호한 목소리가 경기장을 울리면서 퍼져나갔다.

대게 VIP들은 이런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자리를 피하는 게 상식이었다. 왕이 궁을 버리고 도망을 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태상은 그러질 않았다. 오히려 그가 위험한 경기장 안으로 난입해서 사람들을 자신이 지키겠노라 말하고 있었다.

그는 CMC를 세운 사장이었다.

이 장소에 있는 이들의 목숨보다 가장 귀하게 대우받아야 했을 이였다. 그가 가진 부 때문에 소속 계약자가 된 이들을 앞에 내세우고, 그는 경기장을 떠났어야 하는 게 보통 상식이었다.

오히려 이렇게 앞으로 나서서 아무것도 아닌 이들을 지키겠노라 말하는 것은 상식에서 벗어나는 말이었다.

그는 자신의 말을 지킬 거라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vip석에서 경기장 아래로 한 번에 뛰어 내려갔다.

경기장 까마득한 위에 vip석이 있었기에 일반인들은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지만, 태상은 사뿐하게 땅으로 착지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곁으로 동료들이 하나 둘 vip석에서 태상과 마찬가지로 뛰어내려 모이기 시작했다.

사로나, 아이라, 혜연, 카살라, 반. 그리고 그 외에 갑자기 나타난 적과 싸울 용감한 계약자들이 태상의 뒤를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었다.

몇몇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며 눈을 비볐다.

카메라맨들은 장비를 버리고 도망쳤지만, 카메라는 남아 그 자리를 비추고 있었고, 그 덕분에 그의 얼굴이 고스란히 대형 스크린에 비춰졌다. 그리고 그 스크린 안에는 CMC 사장인 태상이 사라믈을 지키겠다 말하며 경기장에 선 것이다.

“진짜 우릴 지켜주겠다고 나선 거야?”

사람들의 얼굴이 얼떨떨해졌다. 그리고 그들의 이성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다. 그들이 있는 곳은 다른 어디도 아닌, 계약자들이 잔뜩 모인 대회 경기장이었다.

악마가 나타났다 해도 사냥꾼인 계약자들이 사방에 깔려 있는데 무서워 할 이유가 없었다. 그들이 우리를 지켜주겠노라 말하며 저렇게 앞에 나서주지 않는가!

더욱이 나선 자가 CMC 사장이었다.

“질서를, 질서를 지킵시다.”

“그, 그래요. 다 함께 차분히 움직이면 다치지 않고 나갈 수 있을 거에요! 계약자들이 시간을 벌어주겠다는데 뭐가 문제겠어요!”

“맞습니다. 어린이, 노약자들부터! 천천히 침착해서 행동합시다! 무려 CMC 사장이 우릴 지켜주겠다잖아요!”

사람들은 정신을 차리고 주변의 약자들을 돕기 시작했다.

혜연은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고 질서 있게 도망치고 있는 것을 보며 안도의 숨을 쉬었다. 한편, 완전하지는 않지만 안정을 되찾은 관중석과는 달리 경기장에는 심판들의 목에서 나온 피들이 경기장 바닥을 비릿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넌 누구지?”

태상이 여전히 검은 로브를 뒤집어 쓴 채 정체를 감추고 있는 이에게 물었다.

티를 내진 않았지만, 그의 오른쪽 손바닥이 시큰거리는 통증을 보내오고 있었다. 태상은 천계의 심장이 굉장히 불쾌해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 있는 생명체도 아닐 텐데 녀석의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게 아이러니했다.

천계의 심장이 반응하는 존재라....

태상은 저 녀석이 어떤 놈일지 어렴풋이 눈치 챌 수 있을 것 같았다.

태상의 말을 들은 검은 로브는 그가 그렇게 물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스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에서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다고 해서 일부러 구경을 왔는데 말이야. 영 시시하고 따분하기 그지없더군. 그래서 나도 모르게 참지 못하고 도중에 끼어들었지. 이런 재미없는 장난질을 그만두게 하려고 말이야.”

태상 같은 사람들이 보면 따분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짓을 저지른다는 건 말도 안 됐다.

물론 저 녀석이 악마라면 말이 되는 거지만 말이다.

“악마인가?”

“흐흐....제법 예리 하구나 인간.”

그때, 아이라가 능력을 사용했는지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태, 태상 오, 오빠...”

그녀가 이렇게 바들바들 떠는 것은 마치 처음 계약자가 되었을 때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이곳에 적응이 된 후로는 무척이나 씩씩해졌던 아이라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 떤다는 것은 저 악마가 적어도 A등급 악마인 시시한 놈은 아닐 거라는 뜻이 됐다.

“악마가...맞긴 한데....너무 강해요. 이렇게 강한 건.......”

아이라의 기억 속에 과거가 떠올랐다. A등급 악마를 좌지우지하던 악마.

그는 자신을 바로세라고 칭했고, 결국 태상의 공격에도 끝까지 살아서 돌아갔던 놈이었다. 시체를 발견하지 못했으니 어딘가에 살아 있을 거란 생각을 하긴 했었다. 그땐 그녀의 능력이 강하질 못해, 존재감을 눈치 채지 못할 경지였지만, 지금은 달랐다.

자신의 앞에 있는 놈이 얼마나 강한 놈인지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아이라의 능력이 그만큼 강해졌다는 것과 같았다. 아이라가 침을 꿀꺽 삼키곤 최대한 자신의 동요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게 마음을 단단히 먹으며 말했다.

“그놈 기억나세요? A등급 악마를 종 부리듯이 했던 악마요.”

아이라가 태상에게 물었다.

태상은 잠시 기억을 떠올리다가 이내 생각이 났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놈에게 무력화가 먹히지 않아 악마의 심장을 섭취했어야 했었다. 그리고 겨우 놈을 없애나 싶었는데, 어디론가 사라졌고 말이다.

“그럼 그놈이 저놈이라는 거야?”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갑자기 그 악마가 괜히 떠오른 건 아닐 것 같아요. 그땐 제가 너무 약해서 어떤 악마인지 잘 몰랐는데, 굉장히 강해요. 이젠 알겠어요.”

태상이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검은 로브가 그들의 대화를 듣고 낄낄거리며 웃었다.

“아아~ 네놈들이 대악마들을 만난 적이 있나 보군. 그런데도 용케 지금까지 살아 있는 거냐? 운이 좋구나. 하지만 그것도 오늘까지일 거다!”

검은 로브를 입은 악마의 몸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몸 크기를 늘린 터라 당연하게도 그의 몸에 걸쳐진 검은색 로브는 찢어질 수밖에 없었다. 악마가 기다랗고 뾰족한 손톱이 달린 손으로 자신의 몸에 붙어 있는 로브의 천조가리를 떼어내고 태상을 바라봤다.

그의 목소리는 몸집이 작았을 때보다 훨씬 위압적이고, 굵직했다. 그의 변신에 주변에 있던 일반인들이 경악에 차 비명을 질렀다. 그들 중에선 악마를 처음 보는 이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악마의 거대한 몸집에 놀라고, 등 뒤에 달린 날개와 위압적인 붉은색 피부, 그리고 눈만 마주쳐도 오줌을 지릴 것 같은 기운이 주변에 있는 일반인의 목을 쥐고 압박을 하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기가 약한 이들은 실제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쓰러지기도 했고 말이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인간들에게 경고를 해주기 위해서다.”

그의 등에 달려 있는 날개가 펄럭였다.

가뜩이나 큰 덩치가 날개까지 펼치자 더욱 위압적이었다.

커다란 경기장을 작은 공터로 만들어버리는 덩치다.

악마가 괜히 도망치는 사람들을 가만히 두고 본 게 아니었다. 도망을 친다 해도 결국엔 자신의 손에 죽을 것임을 알았기에, 그리고 이곳엔 그가 공격할 수많은 인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가 자신이 등장하는 무대로 이곳을 선택한 것도 그 이유가 컸다.

인간들에게 자신의 말을 빠짐없이 모두에게 전할 수 있는, 이목이 집중 된 곳.

앙키파는 그곳을 찾아 움직였고, 하필이면 그게 태상이 대회를 연 이곳이었다. 그리고 이젠 도망치는 이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자신이 몸소 이곳까지 온 목적을 밝힐 차례였다.

카살라도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봉인을 풀고, 새하얀 날개를 꺼냈다. 각자 자신들의 무기를 꺼내 악마를 향해 겨눴고, 태상은 이것이 그가 우려하던 그때가 온 것임을 깨달았다.

하찮은 인간들이어! 악마에게 항복하고 발 치에 엎드려라. 그것이 너희들에게 베풀 수 있는 유일한 자비다!

과연 그게 자비일까?

그들은 인간들이 항복한 것으로 목숨을 쉬이 여길 것이다.

항복을 한다는 건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일이 너무 빠르다.

태상은 이 일이 언제 알려지는 것이 좋을지 타이밍을 오랫동안 생각해왔다. 적어도 그것은 지금 이 순간이 아니었다. 대회가 끝나고 나서, 다른 이들에게 알렸다면 좋았을 것이다. 태상이 원하는 타이밍은 바로 그 때였다.

지금 이렇게 섣불리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만약 앙키파가 나서지 않았다면 태상이 원하는 시간 때에 인간들에게 악마가 경고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앙키파가 나서는 바람에 모든 것이 꼬인 것이다.

‘저놈 입을 막아야 한다.’

경고를 위해 왔다는, 그리고 주변에 숨기지 않고 살기를 내뿜어 사람들을 공포에 휘몰아 넣는 저놈을 막아야 했다. 악마들이 인간계를 정복하려 한다는 말이 퍼지면 분명 태상은 사람들을 통제하기 힘들어 질 것이다.

태상은 마나건을 검은색으로 바꾸고 놈의 목을 향해 쏘았다.

그의 검은색 마나건은 대상의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마나로 만들어진 검은색 사슬이 튀어나온다.

앙키파는 감히 자신에게 공격을 하는 괘씸한 계약자 녀석을 본보기로 죽여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저 무지한 것들의 앞에 힘을 보여주면, 귀찮게 저항하지 않을 거란 계산속이었다.

“감히! 기어오르지 마라, 인간주제에!”

그는 자신을 향해 오는 같잖은 공격을 손을 휘저어 막아내려 했다.

그의 두꺼운 피부를 뚫고 생채기를 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도리어 태상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만들어주는 데 한몫을 했다. 상대방을 묶는 것이지, 공격을 할 생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원래 계획했던 목은 아니었지만, 그의 손목을 휘휘 감는 것을 훌륭하게 성공 할 수 있었다.

“이까짓!”

앙키파는 코웃음을 치며 자신의 손목을 휘감은 것을 뜯어내려 했다. 하지만 태상이 그것을 가만히 두고 보진 않았다. 마나로 만들어진 검은 마나 사슬은 힘에 의해 뜯어지지도 않기도 했고 말이다.

카살라가 하늘 위로 올라갔다.

태상은 땅을 박차고 뛰어 앙키파를 향해 마나건을 쏘았다.

탕! 탕탕!

쾅! 콰앙! 쾅!

붉은색으로 바뀐 마나건은 앙키파의 가죽을 뚫지 못하고 겉에서 2차 폭발을 하며 터졌다. 앙키파는 묵직하게 닿는 통증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겉으로는 가소롭다는 듯 씨익 웃었다.

“고작 이게 전부냐?! 가소롭구나!!”

카살라 또한 하늘 위에서 앙키파를 향해 계속해서 공격을 시도해봤으나 공격이 먹히질 않았다.

태상은 과거에 상대해봤던 악마보다 그가 훨씬 강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실 그때 당시 대악마는 몸에 깊은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해서 태상에게 당해 도망쳐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말이다.

태상은 그의 가죽이 굉장히 두껍다는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것이 다였다.

“인간들아! 나 앙키파의 무릎에 고개를 조아려라!! 그것이 너희 같은 버러지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하하하!!”

앙키파의 날개가 또 다시 활짝 펼쳐졌다. 그리고 그 날개가 펄럭이자 주변에 바람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 바람이 경기장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었다. 이대로 가만히 두면 사람들까지 저 바람에 휩쓸릴 수 있을 정도였다.

모인 바람은 태상과 계약자들을 향해 날카롭게 날아왔다. 태상 일행은 가볍게 몸을 피했지만, 다른 계약자들은 앙키파의 공격에 몸 이곳저곳이 난도질당한 듯 피가 터졌다.

끄으윽!!

아아아악!!

사방에서 괴로워하는 계약자들의 비명소리가 울렸다.

앙키파의 위협적인 바람 공격과 더불어, 하늘 위에서 그를 성가시게 공격하는 카살라를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는 덩치가 거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몸놀림이 굉장히 빨랐다. 카살라는 그가 자신을 잡으려고 손을 휘젓는 것을 보고 잽싸게 날개를 움직여 피했다.

그때, 태상에 카살라에게 말했다.

“카살라, 내려와!”

그가 태상의 명령에 고개를 끄덕이고 재빨리 아래로 내려갔다.

태상의 마나건이 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는 아직 앙키파에게 무력화를 사용하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다음편은 17분에 올라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