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9 천계의 심장 =========================================================================
태상이 없어진지 며칠이 지났다.
시간이 오래 지날수록 정부에서 주는 압박은 점점 심해졌다. 그들이 본래 약속했던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음에도 그들은 어서 탑을 치우라고 혜진에게 연락을 넣었던 것이다.
약속과 다르게 행동을 하는 이유는 바로 탑 때문에 생긴 일 때문이었다. 덕분에 혜연은 너무 갑자기 생긴 태상의 빈자리를 채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가 맡았던 일들과 중요한 프로젝트들이 모두 혜연의 손에서 처리가 되어야 했다.
“사장님 앞으로 우편이 왔어요.”
혜연은 정신없이 일을 하다가 직원이 내미는 우편을 건네받고 한숨을 푹 쉬었다.
“아, 고마워요. 오늘 스케줄 표 주고 나가보세요.”
“네.”
잠을 자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애초부터 잠이 오지도 않았다. 태상이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없는데, 태평하게 잠이 올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로나와 아이라 등등이 그녀의 일을 맡아 도와주려고 하긴 했지만 태상의 빈자리를 채우기엔 여러모로 부족함이 많았다.
그녀들도 각자 하고 있는 맡은 바 일들이 있었기에 더욱 그랬고 말이다.
직원이 나가고, 우편을 뜯어보자 탑에 관한 권한을 내어 놓으라는 공문이 담겨 있었다. 탑이 나타난 후로 악마들이 나타나는 빈도수가 빨라졌다. 때문에, 정부에서는 더 이상 탑을 두고 볼 수 없다며 혜연을 압박하는 것이다.
태상이었다면 정부와 단판을 졌겠으나, 혜연은 그러기엔 권한이 없었다.
정부에서 이렇게 다급하게 자꾸만 탑을 없애라고 종용하는 이유는 잘 안다. 하지만, 태상이 그곳에 간다고 하고 사라졌기에 탑을 없애는 걸 가만히 두고 볼 순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만약 태상이 돌아오지 못하면 어떡하겠는가.
탑이 생겨나고부터 나타나는 빈도수가 늘어 난 악마 문제는, CMC 회사에서 전적으로 모든 보상을 하겠다고 선언을 해놓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금전적인 보상은 가능할지 몰라도 사람 목숨은 그들도 보상을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정부에서 이렇게 CMC회사에 자꾸만 압박을 넣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에겐 명분이 있고, 탑을 유지시키려는 CMC 회사엔 명분이 부족했다.
정부에서만 그러는 게 아니라 시민들까지 도대체 왜 지금까진 탑을 모두 없앴으면서 지금은 없애지 않는 거냐는 의문을 표했다.
혜연은 공문을 구겨서 휴지통에 넣어버렸다.
“으....머리 아파.”
두통은 오래 전부터 앓고 있었지만, 요즘에는 식욕도 없어서 잘 먹지 않다보니 몸이 무척 말라 있었다.
물론 아프다고 혜연이 병가를 낼 수는 없었다. 하루 종일 꽉꽉 차있는 스케줄 표가 혜연을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혜연이 오늘은 또 뭘 해야 하나 싶어 확인하는데, 당분간 TV쪽 스케줄은 받지 않겠다고 결정 해놨는데 떡하니 적혀 있는 게 보였다.
“뭐지? 설마 취소를 안 한 거야?”
혜연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깃들었다.
더욱이 잡혀 있는 건 일반적인 인터뷰가 아니라 TV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MC와 얘기를 주고받고 해야 하는 토크쇼였다. 이런 걸 지금 상황에서 하면 당연히 탑에 관한 얘기가 나올 것이고, 그럼 혜연은 할 수 있는 말이 적었다.
혜연이 서둘러 직원을 불러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
직원은 무척이나 당황하며 죄송하다고 몇 번이나 그녀에게 사과를 해야 했다. 그녀의 실수로 취소했어야 할 것을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혜연은 직원에게 프로그램을 잡은 쪽에 연락을 넣어 취소할 수 있는지 물어보라고 말했다. 하지만 곧 전화를 마친 직원은 울상인 표정으로 들어와 혜연에게 말했다.
“취소는 절대 안 된다고.....이미 모든 준비를 다 해놔서....”
직원의 목소리가 기어갔다. 혜연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그냥 위약금 물어 주는 걸로 끝낼 순 없나요?”
“이미 TV에 이사님이 출연한다고 광고를 해놔서 절대 취소는 안 된대요. 엄청 사정사정 하는 데 어떡할까요?”
혜연은 여러 명의 비서를 두고, 자신의 일을 처리하도록 해놨었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 있는 이도 그 비서들 중 한 명이었다. 상황이 무척이나 예민한 지금, TV프로그램 출연은 정말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혜연이 일단 알겠다며 그곳 관계자와 연결을 하라고 했다.
직원은 자신이 얼마나 큰 실수를 했는지 알았기에 잘릴 지도 몰랐다. 그녀의 표정이 무척이나 우울했다.
혜연은 방송 관계자와 대화를 통해 TV 프로그램에서 어떤 질문을 할지에 관한 것을 미리 알 것과, 예민한 질문은 삭제해주는 것으로 얘기를 맞췄다. 그들은 혜연이 프로그램에 나오는 것으로도 큰 의의를 두었기에 알겠다며 그녀의 사정에 맞춰주었다.
솔직히 혜연이 위약금을 물고 나가지 않겠다고 하면 그들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토크쇼 프로그램이 대수롭지 않은 방송 중 하나가 아니라 인기를 제법 끄는 프로그램이었던 지라 일방적으로 펑크를 내기엔 헤연도 부담이 컸다.
“요즘 가장 핫한 연예인? 아니죠, 가장 핫한 계약자, 정혜연 씨를 모셨습니다.”
와아아아아~!!
짝짝짝짝
그리고 몇 시간 후.
혜연은 한 토크쇼가 촬영되는 촬영장 안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어야 했다. 그녀는 피곤이 가득 담긴 얼굴을 숨기고 미소로 가면을 만들어 썼다.
“안녕하세요. 정혜연입니다.”
“정혜연씨를 이곳에서 만날 수 있게 되다니, 영광이네요. 요즘 많이 바쁘시죠?”
“호호, 조금요.”
“다들 굉장히 흥분해 계세요. 저도 오늘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겠습니다. 계약자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계약자가 누구냐고 한다면 모두 정혜연씨를 꼽을 텐데, 이렇게 자리에 모실 수 있게 돼 영광입니다."
"저야 말로 영광이죠."
혜연과 MC 사이에서 잠시동안 입 바른 소리가 이어졌다. 혜연에겐 많은 시간이 없었기에 그 짧은 시간동안 MC는 최대한 그녀에게 많은 걸 뽑아내야 했다.
해서 MC는 더 이상의 인사 치례는 그만두고, 곧 본격적으로 토크를 시작하겠다 말해왔다.
"이제부턴 좀 더 자세히 얘기를 나눠보겠습니다. 저희 토크쇼에서는 게스트가 본인 스스로를 소개해야 한다는 법칙이 있는데요. 시청자 분들께 소개 부탁드려도 될까요?”
혜연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기에 매끄럽게 카메라를 향해 시선을 돌리고 말했다.
“안녕하세요, CMC에서 이사직을 맡고 있는 정혜연이라고 합니다.”
혜연의 소개말은 무척 짧았다. 하지만 MC는 당황하지 않고 그녀에게 질문으로 말을 좀 더 이끌어냈다.
“계약자 하면 정혜연씨고, CMC 하면 정혜연씨를 제일 먼저 떠올리잖아요? 어떻게 CMC 이사직을 맡게 되셨는지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무척 많습니다. 사장님과 개인적인 친분이 깊다고 들었는데, 두 분은 어떻게 연이 닿은 건가요?”
혜연이 나오면 거의 대부분 그녀를 태상과 엮는 질문을 늘 하곤 했다.
그다지 거슬리는 질문은 아니었다. 태상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지금도 확실하게 해명하고 있는 일이었다. 오히려 이런 해명의 기회를 만들고 싶은 건 혜연 쪽이었다. 원래 이런 식의 토크쇼나 인터뷰에서는 가장 식상한 질문부터 나오는 법이었다.
“사장님은 제가 천계에서 계약자로 활동할 때 그분을 만나게 됐어요.”
그동안은 관계에 대한 해명만 했지 그와의 인연이 어떻게 시작이 되었는지에 대한 해명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혜연이 태상을 처음 만난 건, 천계에서였다.
“제가 아주 힘들었을 때, 그분이 제게 손을 내밀어주셨죠. 전 그분께 목숨을 빚졌었어요. 그 기회로 그분의 길드에 들게 됐죠. 덕분에 지금까지 인연이 쭉 이어지고 있고요.”
혜연이 도움을 청하는 것을 누구도 귀담아 듣지 않았을 때, 태상이 유일하게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 그것이 그녀의 구원이었고, 삶의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아~ 그런 인연이 있었군요! 베일에 감춰져 있던 그분의 기자회견은 저희도 봤거든요. 굉장히 잘생기셨던데, 성격도 착한 엄친아셨네요.”
엄친아. 엄마 친구 아들. 일명 집안 좋고 성격이 밝은데다 공부도 잘하고 인물도 훤한 모든 면에서 뛰어난 젊은이를 의미했고, 태상을 생각했을 때 거의 맞는 말이었다. 혜연이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저희 사장님은 엄친아가 맞죠. 얼굴도 잘생기고, 성격도 좋으시고 부자시니까.”
혜연의 뜻밖의 깔끔한 인정에 MC가 기회를 노려 돌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사전에 얘기를 분명히 하지 않기로 약속을 한 불쾌한 질문에 속했다. 혜연은 분명히 해명을 한 태상과의 관계를 노골적으로 질문 받는 것은 거절하겠다고 PD에게 말을 해놓은 상황이었다.
“두 분 사이가 유별나다고 하던데 그런 이유 때문인가요?”
혜연은 잘 걸렸다는 듯이 슬쩍 PD를 쳐다봤다. PD는 똥 씹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뢰를 밞은 거였다. 혜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뇨, 저와 그분에 대한 소문이 해명을 해도 왜 계속 나오는지 잘 모르겠는데, 사모님은 사장님만큼 제게 소중한 분이시거든요. 자꾸 없는 소문을 만드니 곤란하네요. 사모님께서 말리지 않았으면 솔직히 유언비어를 퍼트리는 네티즌들을 고소했을 거에요.”
그렇게 말을 한 뒤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도 시집은 가야하잖아요? 사장님께서 얼마나 사모님을 사랑하시는지 알면 아무도 그런 소리 못 할 텐데 말이에요.”
혜연의 어쩐지 스산한 눈웃음과 PD의 다급한 손짓에 MC가 눈치를 채고 다른 내용으로 매끄럽게 화제를 바꿨다. 그 후로는 혜연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질문은 없었다.
사실 PD는 탑에 관한 얘기를 좀 더 하고 싶었다. 하지만 MC가 실수를 한 덕분에 그런 질문을 할 수가 없었다. 혜연이 표정을 부러 싸늘하게 만들면서 휴식시간에 PD를 째려봤기 때문이다.
PD가 잠시 녹화를 끊고 MC에게 돌발 질문은 절대 하지 말라고 당부, 또 당부를 해야 했다.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니 녹화를 그만 두겠다고 하고 나가면 PD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으니 억울한 마음을 토로할 곳도 사라지게 된다.
그는 혜연에게 질문을 한 부분을 편집해드릴까요? 하고 물었다. 하지만 혜연은 기왕 대답한 거 내보내라며 너그럽게 MC의 실수를 봐주는 척 했다. 하지만 한 번만 더 이런 무례한 질문을 한다면 녹화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못을 박았다.
그렇게 몇 시간 동안의 아슬아슬한 토크쇼 프로그램을 끝내고, 혜연은 생각지 못한 연락을 받게 돼 급히 차를 돌려야 했다. 그녀가 차를 몰고 가는 곳은 바로 탑이었다.
탑 주변은 철저하게 계약자들이 지키고 있었기에 누구의 출입도 허락하지 않았다.
물론 그들은 혜연이 도착하자 길을 터주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혜연을 더불어 송이에게까지 말이다.
“사모님!!”
혜연이 황급히 달려와 송이의 앞을 간신히 막았다.
“아...”
송이는 혜연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난감한 신음을 흘렸다. 그녀가 오기 전에 살피고 가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들켰던 모양이다.
“미안해요.”
송이가 그녀와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한 사과였다. 혜연은 그녀의 사과를 받은 것을 무척이나 당황스러워하며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사모님이 다치시면 나중에 제가 어떻게 태상님을 보겠어요.”
혜연이 송이에게 제발 그만 발길을 돌려 달라고 설득했다. 하지만 기왕 이렇게 가까이 왔는데, 허무하게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이번에는 혜연이 송이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을 것이다.
“혜연씨가 옆에서 절 지켜주면 되잖아요. 네?”
결국 혜연은 그럼 조금의 이상한 징조라도 생긴다면 당장 도망칠 것을 약속 받고 그녀가 탑 가까이로 가는 것을 허락했다.
“도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탑은 매끄러운 표면을 유지한 채 우뚝 서 있었다. 송이가 탑의 겉 표면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태상아....”
그가 일부러 소식을 전하지 않는 건 아닐 것이다.
아마 소식을 전할 만한 상황이 되질 못하는 게 분명했다. 혹여 그가 크게 다치진 않았을까, 그녀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이 힘든 일을 겪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송이를 한숨짓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런 송이의 마음 고생을 외면한 채, 탑은 송이에게 어떠한 답도 들려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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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편은 17분에 올라옵니다.
넘어가시기 전에 추천 한 번씩 해주시면 감사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