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자-166화 (166/251)

00166  기자회견, 그리고....  =========================================================================

태상은 계속 눈에 밟히는 자신의 아들을 몇 시간 보지도 못하고 회사에 나가야 해서 요즘 죽을 맛이었다. 해서 송이는 매번 그에게 태우의 사진을 찍어 보내주어야 했다.

그 때문에 지금 태상의 핸드폰에는 온통 태우의 사진으로 꽉 차 있었고 말이다. 그는 때때로 시간이 날 때마다 사진을 보며 히죽히죽 웃음을 짓곤 했다.

“나 내일 회사 안 나가.”

“응?”

그런 그가 폭탄 발언을 했다.

가족들 모두의 시선이 태상에게 향했다. 근 몇 개월 동안 그는 한 번도 집에서 쉰 적이 없었다. 심지어 송이가 아이를 낳았을 때에도 이틀 후에 출근을 해야 했다. 일이 쌓이고 쌓여서 도저히 해결을 할 수 없다는 울먹이는 혜연의 전화 한 통 때문에 말이다.

그런 그가 회사를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니 놀라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정말?”

송이가 조금 뜸을 들이며 물었다. 그와 시간을 보낸 것이 얼마던가. 그녀의 불안을 눈치 챈 태상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안 나오기로 했어. 요새 너무 정신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계속 일했는데 이젠 한계야.”

태상은 놀고먹는 사장이 되는 게 좋았다.

이런 식으로 열정적으로 일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태진처럼 일이 그의 인생의 모든 것이 되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 않아! 라고 말하는 거냐고 물으면 맞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느꼈다. 그가 그런 식으로 살고 있다는 걸 말이다. 태상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내가 뭘 하는 거지?

아무리 자신의 일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이 생겼는데 핸드폰을 걸러서 사진으로밖에 보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되는 일인가?

태상은 혜연에게 딱 잘라 말했다.

‘너도 내일 휴가다. 그리고 나도 내일 휴가야.’

‘네? 그게 무슨 소리세요. 내일 미팅이...!’

‘내가 취소했어.’

‘네?!’

혜연이 놀라 얼굴이 하얗게 질릴 수밖에 없었다. 내일 그가 만날 사람은 그냥 일반인이 아니라 한 나라를 대표하는 대통령의 보좌관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중요한 자리를 뒤로 미루다니...!

하지만 솔직히 태상이 요즘 만나는 사람들 중 대통령 보좌관과 비슷비슷하게 중요한 사람들뿐이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었다. 그가 쉬려면 앞뒤 따지지 않고 취소하는 수밖에.

더욱이 그들은 태상에게 갑이 아니라 ‘을’이었다. 그의 요청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일정을 조정하겠다는 대답을 내어 놓을 수밖에 없었다. CMC 회사 정문을 지키는 경호원들에게 내일 정혜연은 이곳 출입 금지라고도 말해놓았다.

혹시 그 몰래 회사에 올까 싶어 말해 놓은 것이다.

“아무튼 이러저러 해서 내일은 휴가다 이 말씀이지.”

태상의 말을 들은 송이는 잘됐다며 환하게 웃었다. 내일은 집에서 푹 쉬면서 태우를 보며 지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태상이 송이의 손목을 잡고 말했다.

“그러니까 내일 당신도 시간 비워놔.”

“내일 어머님이랑 모임 하나 있는데....”

“취소해. 내일 넌 나랑 데이트해야 돼.”

“에엣? 데이트?”

송이가 당황스러움에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강회장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잘 생각했다. 내일 둘이서 오랜만에 오붓하게 지내다 오거라.”

“슬슬 둘째도 볼 생각 해야지.”

처음 한 말은 강회장이었지만, 그의 뒤로 말한 건 세연이 아니라 태진이었다. 세연이 이 사람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하는 시선으로 태진을 보다가 송이에게 말했다.

“내일 있는 모임은 혼자 가도 되니까, 다녀오렴. 오랜만인데, 그 정도는 당연히 이해 해줄 수 있어. 내가 그렇게 꽉 막힌 시어머니인 줄 알아?”

송이는 어쩐지 몸이 오그라들고 부끄러웠다. 새삼스럽게 갑자기 데이트는 무슨 데이트란 말인가. 하지만 점점 입가에 만들어지는 미소는 어쩔 수가 없었다.

송이가 결국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예쁘게 차려 입은 송이를 데리고 태상이 차를 몰았다.

“어디로 가는 거야?”

태상이 어디로 가는 건지 목적지를 알려주지 않아 송이가 연신 궁금하다며 그에게 물었다. 오랜만의 데이트인지라 그녀도 기대가 되는 모양이었다. 태상은 그녀가 실망할지도 모르는 말을 내뱉었다.

“별 거 없어. 영화 보고, 점심 먹고, 길거리 돌아다니고. 그런 거 할 거야.”

하지만 송이가 그의 말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송이는 설마...하는 시선으로 태상에게 물었다.

“너 내 다이어리 봤어?”

“......”

태상이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자신의 다이어리를 봤음을 확신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었다. 그가 원한다면 훨씬 대단한 데이트를 할 수 있는 남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소소한 별 거 아닌 것을 하겠다는 말을 하는 건 송이의 다이어리에 적혀 있던 글자들 때문이었다.

사실 송이는 태상과 그런 소소한 데이트를 해본 적이 없었다.

백화점에 데려가서 무언가를 잔뜩 사주는 것이 그가 아는 데이트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태상은 여자와 데이트라는 것을 제대로 해본 기억이 없었다. 그냥 원하는 것을 사주는 게 데이트의 전부였다.

여자들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그에게 사랑 한다고 재잘거리며 무조건적인 사랑을 말했으니 말이다.

그러니 태상이 송이와 데이트를 한다고 해서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할 수 있었겠는가. 송이는 돈이 필요해서 그와 결혼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아는 데이트는 돈지랄밖에 없었다. 해서 그동안 그는 송이와 하는 데이트는 온통 비싼 거 사주기, 비싼 거 먹기, 비싼 파티 참석하기 등등이 전부였다.

그런데 그가 우연히 송이의 다이어리를 보게 됐다.

그리고 그제야 그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송이는 생각보다 원하는 것들이 평범했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니 그런 것들을 한 번도 그녀와 해 본 적이 없었다. 그게 문제라는 것을 그는 뒤늦게 깨달았다.

“치이....”

송이가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입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가 자신을 생각해주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그와 영화를 보고, 길거리를 걷고, 커피숍에 가서 얘기를 나누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아직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그가 차를 세운 곳은 **백화점 앞이었다. 이곳에 영화관이 있다는 것은 그녀도 잘 알았다.

“무슨 영화 보고 싶어?”

태상이 차에서 내려 그녀의 차문을 열어주면서 말했다.

“요즘에 무슨 영화가 나오는지 몰라서....”

송이가 난감하다는 듯 말했다. 태상이 팔을 내밀자 그녀가 익숙하게 그의 팔에 팔짱을 끼었다.

백화점 안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다시 평화에 물들었다. 그들의 삶에서 가끔 악마가 어디 부분에 나타났다느니 인명피해가 생겼다느니 식의 뉴스가 가끔 눈에 띄긴 하겠지만 그건 그들에게 더 이상 큰일이 아니었다.

악마들은 CMC 회사 계약자들이 훌륭하게 막아주고 있기에 그들에게 오는 피해는 예전처럼 크지 않았다. 사람들은 다시 건물을 짓고, 평소처럼 회사에 출근하며 살아갔다.

악마가 나타나고, 계약자가 생기면서 가장 큰 발전을 이룬 것은 영화였다.

그들은 더 이상 CG로 불가능한 움직임을 찍지 않아도 됐다. 계약자들을 이용해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불가능한 움직임이 가능했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인지라 그런지 엘리베이터 앞에도 사람이 많았다.

"저 사람....강명진 아니야?"

"어머! 맞는 것 같은데? 잘생겼다."

"근데 옆에 누구지?"

처음에는 신경을 쓰지 못했던 송이는 점점 자신의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말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송이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는데, 그에 비해 시선의 주인공인 태상은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그가 송이의 귓가에 얼굴을 가져다대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신경 쓰지 마. 괜찮아."

"...평소에도 이렇게 주목받아?"

그때, 띵! 하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태상은 일단 그녀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 모두가 태상을 향해 시선을 두고 있었다.

"저어...혹시 CMC 사장 강명진씨 아니세요?"

엘리베이터 안에서 점점 더 수군거림이 심해지자 결국 그에게 질문이 터져나왔다. 요즘 그가 얼마나 핫한 사람인지 다들 알았기에 기대감이 잔뜩 섞여 있었다.

"맞습니다."

선글라스라도 가지고 올 걸 그랬다. 이런 식으로 방해받는 건 싫은데...

"어머머!!"

그가 순순히 맞다고 대답하자 호들갑을 떨던 이들이 그에게 사진이나 싸인을 요청하기 시작했다. 태상은 그런 요청에는 한 번도 요구해준 적이 없었던 터라 그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와이프랑 데이트 중이라서요. 죄송합니다."

"강명진씨 결혼 하셨었어요?"

"우린 미혼인줄 알고 있었는데..."

태상의 말에 그들의 시선이 송이에게로 향했다. 하필이면 영화관이 꼭대기 층에 있어서 올라가는 데 시간이 제법 걸렸다.

자꾸만 중간에 문이 열리고 사람이 내렸다가 들어왔다가 했기에 더욱 시간이 오래 걸렸고 말이다. 여전히 대답을 바라는 듯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탓에 그가 다시 말했다.

"네. 결혼한지 좀 됐죠. 오랜만에 둘만이서 나온 데이트라 방해를 받고 싶지 않습니다. 양해해주셨으면 합니다."

"네에...그럴게요."

아쉽기는 하지만 그들은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태상은 그들이 송이를 너무 뚫어져라 쳐다보는 탓에 몸을 돌려 그녀의 얼굴을 자신의 가슴에 폭 안았다. 그러자 주변에서 조금 더 소란이 일었다.

드디어 태상과 송이가 내릴 꼭대기 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가 송이를 데리고 나가자 남아 있던 이들이 친구들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솔직히 강명진이랑 정혜연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인줄 알았는데 아닌가봐."

"알게 뭐야. 뒤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닐지."

"하긴, 그렇긴 하네. 저렇게 잘난 남자가 왜 한 여자만 보겠어."

불행이도 그들의 말은 송이의 귀에 모두 들렸다. 태상의 손에 힘이 꽈악 들어갔다. 그녀들이 일반인이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그들의 혀를 잘라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송이가 곁에 있었고, 그들은 일반인들이었다.

이런 말에 일일히 반응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송이가 곁에 있어서 그런지 신경이 쓰였다. 송이가 그런 태상의 상태를 알았는지 그의 손을 잡아왔다. 태상이 그녀에게 시선을 옮기자 송이가 배시시 웃었다.

"내가 아닌 거 알면 됐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 말에 답지 않게 왜 과민반응이야. 영화 고르자. 뭐 볼 지 기대된다. 팝콘도 먹어야지!"

"....."

그녀의 말을 들은 태상은 그제야 얼굴에 피식 미소를 지었다. 송이가 그의 손을 끌었다. 태상은 마지못해 터벅터벅 그녀가 이끄는 데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도대체가 오늘 무슨 날이기라도 한 것인지, 태상의 인내심은 계속해서 시험당해야 했다. 그를 화나게 했던 여자 둘이 하필이면 태상과 송이가 고른 영화를 보았고, 심지어 그들과는 불과 옆으로 두 칸 떨어진 자리였다는 것이 그의 인내심을 시험하게 만들었다.

영화가 시작되기도 전에 둘이서 속닥속닥 얘기를 나눴는데, 그들의 이야기 거리는 모두 태상과 송이 그리고 혜연에 관한 것들이었다.

두 칸 떨어졌다는 이유로 그들은 태상이 자신의 말을 듣지 못할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태상은 귀가 좋은 탓에 그들의 말을 모두 고스란히 들어야 했다. 사정을 모르는 송이는 점점 표정이 좋지 않아지는 태상 때문에 걱정스레 그를 바라봐야 했다.

"왜 그래? 몸이 안 좋아?"

"아니, 그냥 내 아들 태우가 무척 보고싶네."

그가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아직 영화가 시작되기 전이니 상관은 없었지만 송이는 그가 단순히 그것 때문에 이상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도 우리 태우 보고싶다. 떨어진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보고 싶지?"

"당신이야 집에서 하루종일 보잖아. 난 오죽하겠어? 그냥 데리고 나올 걸 그랬나봐."

"그러기엔 아직 너무 어려. 돌도 안 지났는데."

송이가 못 말린다는 듯 웃었다.

태상이 송이와 태연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을 무렵, 그들에게서 두 칸 떨어진 곳에선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열심히 대화를 나누던 여자 둘은 어쩐지 팔에 소름이 돋고 으스스함을 느껴야 했다.

"어쩐지 좀 춥지 않니?"

"그러게. 왜 이렇게 춥지?"

"너 안색이 창백해."

"너도 그런데?"

여자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입술도 파랗고, 안색도 창백했다. 속이 울렁거리고 자꾸만 다리가 후들거리기도 했다. 왜 이러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일반인인 그녀들이 태상이 쏟아내는 살기에 버텨내는 건 버거운 일이었다.

"아....왜 이렇게 어지럽지..."

"여기에 도저히 못 있겠어. 우리 잠깐 나갈래?"

여자들이 결국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태상은 그녀들이 문 앞에 나가는 순간 살기를 풀었다. 아마 곧 들어올 테지만, 또 다시 같은 현상을 겪고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녀들은 영화를 보지도 못한 채 들락날락 거리다가 사람들의 눈총을 받고 퇴장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인과응보였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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