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2 악마의 탑 =========================================================================
갑작스러운 지진이 또 일어난다는 건 절대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었다.
군인들과 계약자들의 시선이 어긋나기 시작하고,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발 아래가 흔들거리던 것도 잠시, 곧 지진이 멈춤과 동시에 그들은 발견할 수 있었다.
탑 바로 옆에 떡하니 악마가 나타난 것을 말이다.
악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 마냥 등 뒤에 달려있는 검은색 날개가 펄럭였다. 악마는 옆에 사람 한 명을 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태상이 아주 잘 아는 놈이었다.
‘이명진!’
태상이 모자를 더욱 깊게 눌러썼다. 아직 이명진에게 자신의 정체를 들킬 때가 아니다. 그가 좀 더 뒷걸음질 쳐 악마 계약자들 사이로 몸을 숨겼다.
군인들은 갑자기 나타난 악마를 향해 총구를 겨눴다. 하지만 그들은 선뜻 총을 쏘지 못했다. 그동안 악마를 상대하기 위해선 총이 아니라 수류탄 같이 강한 파괴력을 가진 것들만 겨우 통한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군인들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기 시작한 것에 비해 계약자들은 오히려 앞으로 나섰다. 악마가 나타난 이상 이 일은 계약자들이 나서야 하는 일이었다. 군인들도 목숨이 귀하다는 것은 알았기에 그것을 막지 않았다.
이명진은 모여 있는 군인들과 계약자들을 바라보며 킥킥 웃음을 지었다. 이명진은 박수를 짝짝 치며 악마보다 한걸음 더 앞으로 나섰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여러분.”
“...네가 이 일을 계획한 악마의 계약자인가?”
계약자들 중 한 명이 명진에게 물었다. 그러자 명진이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제가 지금 이 모든 일을 계획한 사람이죠.”
명진의 고백에 악마 계약자들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소음이 거세졌다. 그들은 반드시 물어야 했다. 왜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 말이다.
“네놈 때문에 내 가족이 죽었어!!! 악마들이 내 가족을 죽였다고!!”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한 거야!!!”
“이건 배신이야 배신!!”
악마 계약자들 사이에서 거센 반발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명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는 손을 들어 올려 그들의 반발을 일시적으로 잠재우고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 계획을 천사들에게 들키지 않게 진행시키기 위해 최대한 아는 사람이 적어야 했으니까요. 그로인해 받은 피해는 여기 있는 악마들이 모두 보상해줄 겁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보상?! 가족이 죽었는데 어떻게 보상해주겠다는 거야!!”
생각처럼 계약자들의 반발이 수그러들지 않자 명진의 얼굴이 굳어졌다.
“여러분들이 가진 능력이 이곳에선 얼마나 특별한 힘인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젠 까부는 천사 계약자들도 마음껏 짓밟아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이 일어난 덕분에 여러분들은 지금 마계에서 느꼈던 강함을 이곳에서도 느낄 수 있게 됐지 않았습니까. 그 힘으로 앞으로 뭘 할 수 있을지 상상이 되지 않나요?”
.......
순간 명진의 말에 계약자들 사이에서 침묵이 돌았다.
“악마들은 계약자들을 버리지 않습니다. 배신은 더더욱 아니고요. 여러분들께 기회를 준 겁니다! 이 세상을 우리들 손에 넣을 수 있게 말입니다!!”
“그, 그런.....”
"말도 안 돼...이건 그냥 개소리라고!"
“마계에서 아무리 날고 기어도 결국 현실은 어떻죠? 세상이 돈만 많으면 다 인가요? 솔직히 어느 순간부터 이곳 생활이 재미없어 지지 않았나요?”
확실히 마계와 천계에서 전투를 하는 스릴보단 인간계에서 지내는 삶이 지루하다고 생각될 수 있었다. 태상도 어느새 천계에서 싸우기 위해 인간계에서 운동을 하는데 시간을 많이 투자하고 있지 않은가.
천계의 삶과 인간계의 삶에서 당연히 인간계의 삶이 더 중심이 되어야 했는데, 어느새 주객이 전도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런 현상을 다른 계약자들도 모두 겪고 있었다.
현실에서 얻을 수 있는 쾌락은 한정적이다. 갖고 나면 결국 언젠가는 시시해지는 법. 돈이 많아지고, 가질 수 있는 게 많아지면 사람은 오히려 흥미를 잃게 된다. 목표가 없는 삶이 되는 것이다.
해서 그들은 그 목표를 천계 혹은 마계의 일에 두기 시작한다.
그게 주객이 전도 된 상황이라는 것을 스스로 절대 깨닫지 못하고 말이다.
“기왕 이런 특별한 힘을 얻었는데, 왕 노릇 한 번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계약자들은 우월한 존재입니다. 그러니 이제 평민들도 그걸 알아야하는 겁니다! 그들에게 우리의 위대함을 알려주는 겁니다!!”
명진은 앞으로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자들을 '귀족'으로, 그렇지 못한 일반인들을 '평민'으로 지칭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명칭은 계약자들의 탐욕을 훌륭히 건드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왜 신분제도라는 게 있었겠는가.
지금도 민주주의라고 앞에서 떠들어 대도 뒤로는 돈이 있는 자가 왕노릇을 하는 세상이었다.
인간은 결국 탐욕에 약하고, 계약자들 대부분이 탐욕이 많은 편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이 있기에 계속해서 위험한 계약자 생활을 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니 명진의 말은 그들에게 잘 먹혀들어 갈 수 있었다.
물론 이 일로 가족을 잃은 계약자들은 그의 말에 넘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런 피해를 보지 않은 계약자는 달랐다. 그의 말이 혹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제가 악마에게 받은 미션의 보상은 이 세계를 다스리게 해주겠다는 거였습니다. 천사 계약자들의 씨를 말리기만 하면 악마들은 더 이상 인간계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했거든요. 그들이 사라지고 우리들만 남게 된 이 세상에서, 능력을 가진 우리들이 과연 어떤 일들을 하게 될 거라 생각하십니까?”
마계에서 쓰던 능력을 이제 그들도 이곳에서 쓸 수 있게 됐다. 부랴부랴 마계에 접속했을 때, 악마들이 그들에게 무료로 물약을 주었다. 이곳에서도 능력을 쓸 수 있다며 말이다. 그로인해 그들은 인간계에서도 계약자가 될 수 있었다.
“확실히 천사 계약자들은 죽여야지. 마계에서 죽이려면 놈들이 천계로 튀면 잡을 수가 없잖아. 그런데 여긴 도망갈 곳이 없으니까 훨씬 쉽겠지.”
"그러고 보니....그럼 훨씬 편할 지도 모르겠네. 어쩌면 전쟁에서 이길 수도 있는 거 아냐?"
일부 계약자들 사이에서 명진의 말에 동의하는 말이 나오자 한 계약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 저놈 말에 넘어 가는 겁니까?? 이 일 때문에 우리 가족이 죽었다고요!!!”
명진은 자신의 반박하는 계약자가 나타나자 재빨리 말을 이었다.
“전 그 권한을 혼자서 다 가질 생각이 없습니다. 여러분들께 나눠드릴 겁니다. 공헌도가 높은 분들에게 땅덩어리를 하나씩 주어서 다스리게 할 생각입니다.”
“저 자식이..!!!”
“이봐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하잖습니까. 천사 계약자들을 몰아내는 거라는데 이해해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맞아 맞아.”
명진은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뀌자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악마들이 고작 천사 계약자들 없애겠다고 법을 어기고 인간계를 침략했다고 생각하나?”
그때, 묵직한 음성이 계약자들 사이에서 들려왔다.
악마는 명진이 무슨 얘기를 하든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는데, 그 말이 들리자 마자 고개를 돌려 말한 자를 바라봤다.
그로인해 다른 계약자들이 그 말을 한 계약자에게 시선을 움직였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어 얼굴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명진이 그 계약자에게 말했다.
어쩐지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하지만 주변에 들려오는 소음이 많은지라 그 익숙함이 어떤 익숙함인지 깨닫지 못했다.
“당신도 계약잡니까? 왜 그렇게 얼굴을 가리고 있는 거죠?”
명진은 굉장히 불쾌해졌다. 저 자를 쳐다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말이다. 그의 얼굴에서 생긴 주름이 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 얼굴 가리건 말건 그건 내 마음이고. 악마가 진짜 단순히 천사 계약자들 죽이겠다고 여길 침략한 거라는 걸 어떻게 믿는지 내 질문에나 답 하지 그래?”
명진은 뭐 그런 것을 의심하냐며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다.
“여기 제 옆에 있는 악마가 증명해줄 겁니다. 천사 계약자들을 모두 죽이면 마계로 돌아가겠다고 저한테 말씀하셨죠?”
“......”
악마는 명진의 말에 답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손가락으로 그 말을 한 계약자를 가리키고 말했다.
“저놈을 죽이는 자에게 이 세상을 주겠다.”
웅성웅성
“!!!!!!!”
악마의 생각지 못한 말에 명진이 황급히 말했다.
“잠깐만요! 그 보상은 제게 주시기로 하셨잖습니까!!”
악마는 명진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는 명진이 자신의 계약자가 될 자질이 없다고 여겼다. 그의 충동적인 성격은 그의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이제 슬슬 계약자를 바꿀 때가 온 것이다.
“네놈에게 줄 보상은 내가 정한다. 그걸 바꾸는 것도 내 마음이지.”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이러는 법이...!!”
악마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명진은 악마의 기세가 심상치 않자 저도 모르게 주춤하며 입술을 깨물고 말을 속으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악마는 다시 한 번 계약자들에게 말했다.
“저놈을 죽이는 자에게 주는 보상은 바뀌지 않을 거다. 정 그렇게 그 보상이 갖고 싶다면 네가 죽이면 될 일이 아닌가.”
악마가 자신을 죽이라고 명령을 한 상황에서, 정작 그 대상이 된 계약자는 도망칠 생각도 하지 않고 도리어 그에게 말했다.
“갑자기 왜 날 죽이면 이 세상을 준다고 하는 거지?”
“네놈이 계약한 놈이 누구인지 잘 안다. 네놈에게서 그 자의 향기가 풍기는 구나.”
그 계약자는 그제야 이해가 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역시 악마들 앞에서 숨기는 건 무리였나.”
그가 모자를 벗었다.
그러자 명진은 모자를 벗은 계약자의 얼굴을 보고 놀라 그를 손가락질 하며 이름을 불렀다.
“강태상?!”
태상이 씨익 웃었다.
“꽤나 놀랐나보네? 반갑다 이명진. 오랜만이지? 이렇게 다시 만나기를 그동안 얼마나 바랐는지 알아? 어찌나 꽁지가 빠져라 도망을 다니는지 머리카락 한 올을 찾을 수가 없더라?”
명진은 악마가 자신과의 계약을 어겼다는 걸 항의해야 한다는 것도 잊고 으드득 이를 갈았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천사 계약자 주제에!!! 네놈이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구나!”
명진에 의해 태상이 천사 계약자라는 것이 밝혀지자 악마 계약자들 사이에서 혼란이 일었다. 그가 정말 천사 계약자라는 걸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천사 계약자가 이곳에 오는 것은 자살행위다. 미치지 않고서야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니, 죽고 싶어서 환장한 놈은 너지. 감히 이런 일을 저질러 놓고도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태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고, 그의 목소리도 굳었다. 그가 명진을 향해 분노를 쏟아냈다.
“널 발견한 이상,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숨 쉬고 살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거야. 네놈은 지금 스스로 자신의 고향을 팔아먹은 거다. 자기 나라를,악마놈들한테 갖다 바친 거라고! 그리고 당신들도 머리 달렸으면 똑바로 생각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어. 그리고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악마, 저놈들이 한 짓이야.”
"......"
태상의 말에 계약자들의 얼굴에 혼란이 깃들었다.
"천사랑 악마들 싸움에 왜 상관없는 사람들이 피를 흘려야 하지? 계약자가 됐으니 천사 계약자랑 악마 계약자들은 서로 적이라고? 우리들은 근본적으로 악마도 아니고 천사도 아니고 사람이야. 다 똑같이 눈코입 달려있는 사람."
태상의 말이 아예 효과가 없는 건 아니었는지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맞아. 이번 일은 악마가 잘못한 거야. 아무리 천사 계약자들 죽이려는 의도가 있긴 했어도, 인간계를 침략하는 것까지 이해할 수 없어!"
악마 계약자들도 다 이곳에서는 평범한 사람이다.
애초부터 천사와 악마의 싸움에 휘말려 서로 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니 악마 계약자들 중에서도 제대로 된 생각을 갖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뜻이었다.
태상이 힘을 받아 말했다.
"왜 스스로 악마 새끼들 종이 되려고 하지? 열심히 조상들이 신분제 폐지해놨더니 스스로 악마들 노예가 되겠다고 기어들어 가? 너희들한테 이 세계를 다스리게 할 권리를 주겠다고? 개소리 하지 말라 그래. 그냥 너희들을 자기네들 발 아래에 두고 쓰겠다는 말이잖아. 병신도 아니고, 그렇게 이용당할 거야? 우리들이 사는 집을 망가트린 원수한테?"
"......."
악마 계약자들도 태상의 말 때문에 무척 혼란스러운지 다들 고개를 푹 숙였다.
악마는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느끼자 다시 한 번 말했다.
"저놈을 죽이는 자에게 이 세상을 다스릴 권한을 주겠다고 했다. 내 말은 아직까지도 유효하다."
악마가 분명하게 말을 했으나 누구도 나서는 계약자가 없었다.지금까지 계약자들은 적이 분명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쩐지 자신들의 적이 누구인지 확실하게 구분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적은 누구인 거지?'
계약자들의 머릿속으로 한 가지 물음이 깊게 박혀 들어왔다.
============================ 작품 후기 ============================
닝겐들이어 일어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