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0 붉은하늘 =========================================================================
악마 계약자들은 자신들이 뭘 망치고 있는지도 모를 것이다.
멍청하게도 말이다.
악마들이 그들을 홀리는 것은 쉬웠을 것이다. 그들은 인간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인간들은 유혹에 너무 약했다. 그리고 이기적이었고 말이다.
그때, 그들이 있는 방문을 노크도 없이 벌컥 들어오는 이가 있었다.
들어 온 사람은 바로 세연이었다.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니?! 간단하게 짐 챙기고 있으라고 했잖...어머, 태상아!”
세연이 지금 태상과 송이에게 짐을 챙기라는 것은, 한국을 떠나 다른 곳으로 몸을 대피하기 위함이었다. 그녀가 뒤늦게 송이의 옆에 있는 태상을 발견하고 놀라 다가왔다.
“어디 갔다가 이제 온 거니?! 이런 위험한 곳에서 도대체 무슨 볼 일이 있다고! 다신 밖으로 나가지 마렴.”
세연이 잔뜩 화를 냈다. 처음에 송이 혼자서 돌아왔을 때, 그녀의 심장이 얼마나 철렁했는지 모른다. 너무 화가 나서 뻔뻔하게 혼자 돌아 온 송이의 뺨을 치고 싶다는 충동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는 참았다. 송이가 임신을 하고 있다는 것도 그녀를 참게 만들었지만, 스스로 그건 교양 없는 짓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태상이 세연에게 말했다.
“우린 아무대도 안 가. 여기 있는 게 훨씬 안전해.”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의 곁에 있어야 안전했다. 그래야 그가 가족들을 지켜 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외국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인터넷에서는 여전히 악마를 찍은 영상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악마와 마주쳤으면 도망칠 생각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은데도 영상들이 많이 올라오고 있는 것이다. 태상은 악마를 죽일 때, 자신을 찍고 있었던 소년이 떠올랐다.
한국 사람이나 외국 사람이나 똑같은 모양이다.
“여기가 안전하다고? 너 뉴스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니??”
그때, 뉴스에서 새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매번 같은 장면만 계속해서 보여주며 같은 말을 반복하던 앵커가 말했다.
[방금 새로운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아무도 막지 못할 것 같아 보였던 괴물을 누군가가 죽이는 영상이 나왔습니다. 우선 영상부터 보시죠.]
화면이 바뀌고, 주변이 마구 흔들리는 동영상이 시작됐다.
그리고 곧 악마가 나타났다. 사방에 비명 소리가 들렸고, 사람들이 혼비백산하며 뛰었다. 핸드폰을 들고 있는 사람도 뛰기 시작했는지 화면이 무척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곧 얼마 후, 화면이 바뀌었다.
악마가 뚜렷하게 보였고, 그 악마를 상대하고 있는 한 여자를 찍기 시작했다.
‘이런.’
태상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송이는 뉴스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태상을 향해 물었다.
“저 사람은.....설마.....?”
태상이 끄응...하며 신음을 내뱉었다.
“맞아. 혜연이도 계약자야.”
그녀의 얼굴이 너무 정확하게 찍혀 있었다. 빼도 박도 못하는 혜연, 그녀인 것이다. 악마가 죽었다. 그리고 동영상도 끝났다.
뉴스에 나왔으니 혜연이 유명해지는 것은 얼마 걸리지도 않을 것이다.
여러모로 곤란한 상황이 아닐 수가 없었다. 세연은 저 영상에 나온 여자를 태상과 송이가 알고 있는 것 같아 보이자 궁금해 했다.
“저 여자를 아는 거니?”
“아 그게....”
송이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한 말 때문에 태상이 곤란해진 건가 싶어서였다. 태상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친구에요.”
그러자 세연의 표정이 환해지며 말했다.
“그럼 당장 이리로 오라고 해야지!”
괴물을 죽이는 사람이 경호를 해준다면 그것보다 든든한 일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세연의 말에 태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전화해봐야겠네.”
그녀의 말처럼 지켜달라고 말하려고 전화를 걸려는 건 당연히 아니었다. 뉴스앵커는 그녀의 놀라운 능력을 계속해서 말하며 믿을 수 없는 영상의 진위를 확인해야 한다는 말을 계속해서 반복했다. 앵커는 흥분했고, 그 영상을 본 많은 사람들도 덩달아 흥분했다.
괴물이 지구를 멸망시킬 것이라 생각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혜연은 영웅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핸드폰으로 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혜연의 전화는 뜻밖에도 꺼져 있었다.
“안 받아?”
송이가 궁금했는지 물었다.
“응. 안 받네. 아무래도 저 동영상 때문인 것 같아.”
영상을 본 사람들 중 혜연을 아는 사람들이 모두 전화를 했을 것이다. 영상 속 주인공이 혜연이 맞는지 알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다보니 혜연은 어쩔 수 없이 전화를 꺼놓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떻게 저런 여자랑 알고 지낸 거니? 신기한 능력을 쓸 수 있다는 걸 너도 알고 있었어?”
세연이 궁금해 했다. 태상은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그녀에게도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TV에 나온 여자처럼 괴물들을 죽일 수 있어. 특별한 능력도 있고.”
태상의 말에 세연이 잠시 침묵했다.
“....네가 저 괴물들을 죽인다고?”
그때, 앵커가 또 다시 새로운 소식을 전해주었다.
[저희는 놀랍게도 괴물을 죽이는 장면을 똑똑히 두 눈으로 목격했다는 한 시민을 이 자리에 모셨습니다. 나와 주시죠.]
태상은 앵커의 말에 등장한 소년의 얼굴이 낯익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년은 도망치지 않고 자신이 악마를 죽이는 것을 동영상으로 촬영하던 아이였다.
자신이 핸드폰을 산산조각내서 증거는 없으나 어차피 다른 영상에서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이 확인 되었으니 상관없다 생각한 모양이었다.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괴물을 순식간에 해치우는 걸요 그 사람은......]
태상이 더 이상 듣지 않기 위해 리모콘으로 전원을 꺼버렸다.
“아까 볼 일 있다고 했었던 것도 악마를 죽이고 오느라고 그런 거였어.”
세연인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거짓말 치지 마. 네가 어떻게 저런 짓을 해! 네가 어떤 앤데 저런 위험한 일을..!!!”
혜연을 알고 있다고 했을 땐 좋아하던 세연은 태상이 그녀와 같은 일을 한다고 하자 펄쩍 뛰었다. 자식 걱정하는 부모의 마음이니 어쩔 수 없는 차별이었다.
“저놈들 겉보기엔 저렇게 커보여도 사실 별 것들도 아니야. 더욱이 엄마 아들이 저런 놈들한테 당할 정도로 약한 사람 같아 보여?”
태상의 말에 세연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하지만 그가 강한 것과 저런 험한 일을 하는 것을 반대하는 건 엄연히 다른 일이었다.
“네가 저런 험한 일을 하는 걸 나보고 그냥 두고 보라고??”
세연이 울상을 지었다.
“너 태상이가 저런 일 하고 다니는 거 알고 있었니?!”
그녀의 화살이 갑자기 송이에게 튀자 태상이 어허! 하고 말하며 엄하게 말했다.
“지금 왜 화살이 글로 튀지? 이해를 못 하겠네?”
“그치만...!!”
“송이한테도 방금 전에 얘기한 일이야. 그리고 만약 미리 알았다고 해도 엄마한테 말하지 말라고 했을 거야. 이렇게 걱정할 거잖아. 난 엄마가 걱정하는 거 싫거든.”
“..........”
태상의 말에 세연의 입이 앙 다물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송이에게 그가 저런 일을 하는 걸 그냥 두고 볼 거냐는 듯 도움을 요청하는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송이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태상이 세연이 송이를 쳐다보는 시선을 몸으로 가려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저놈들, 처리할 거야. 그러니까 외국 갈 필요 없어. 그리고 외국도 우리랑 사정은 똑같다고. 알고 있잖아?”
사실 외국으로 몸을 피하는 게 더 나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한국은 땅이 좁아 악마가 나타나는 범위에 걸릴 확률이 높을 수 있는 반면에, 외국은 땅이 넓으니 잘만 선택하면 피해를 받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태상은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일을 늘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가족은 자신이 지킬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곳에 남아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이 사태를 만들어 낸 이명진을 죽이는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이 일을 이명진이 한 것이라는 게 밝혀진 이상, 이 집은 절대 안전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외국은 됐고, 여기 근처 아닌 곳으로 지낼만한 곳으로 움직이자. 여긴 아무래도 좀 문제가 될 것 같으니까.”
말을 하지 않았지만 송이는 그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분명 명진이 이곳을 알기 때문에 그러는 것일 거다. 그가 이곳으로 올까봐 말이다. 송이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태상이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세연은 그런 깊은 얘기는 알지 못했기에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정말 네가 해야 하는 거냐며 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 계속해서 물었다.
그러나 태상은 그녀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
복수하자.
드디어 시간이 왔다!
그놈에게 당했던 수모를 갚아 줄 날이다!!!
명진은 하하하!! 하고 크게 웃음을 지었다.
그의 눈 앞에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계약 악마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은 마계가 아니었다. 이곳은 바로 인간계. 그곳에 악마가 있는 것이다.
악마를 이곳에 소환하기 위해 명진은 그동안 많은 고생을 해야 했다.
꽁꽁 숨어 나올 생각을 안 하는 천사 계약자들을 찾아내야 했고, 마계에서는 악마놈이 시키는 미션을 열심히 해야 했다. 그리고 고생을 한 결과, 악마의 등장으로 전 세계가 바들바들 떨고 있다.
자신의 발 아래에서 살려 달라고, 자신의 처분만 기다리는 것들이다.
악마가 자신에게 말했다. 자신들은 천사 계약자만 모두 없애면 더 이상 인간계에 흥미가 없다고 말이다. 그러니 명진에게 인간계를 주겠다고 했다. 명진은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는 미션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더 이상 누구도 자신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곧 이 세계는 자신의 것이 된다.
모두가 자신을 우러러 볼 것이며, 왕이 되어 이 세계를 다스리는 거다.
고작 재벌 아들이 되어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명진은 자신의 소원이 엄청나게 멍청한 소원이었다고 생각했다.
그가 원하는 건 이런 것들이어야 했다. 고작 몸을 바꿔 인생도 바꿔보겠다는 생각은 너무 어린애 장난 같은 거였다. 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애초부터 그런 소원을 빌었어야 했다. 뭐, 지금이라도 그럴 수 있어서 다행인 일이지만.
그리고 그 전에, 그에겐 한 가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저번에 제가 부탁드렸던 일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명진의 물음에 악마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그들은 현재 밤 조차도 삼켜버린 붉은 하늘 아래, 높게 솟은 건물의 옥상에 있었다. 악마는 인간계를 무료한 시선으로 훑고 있었다.
천사들이 자신의 계약자들에게 능력을 쓸 수 있도록 수를 쓸 것이라는 건 당연히 이미 예상을 한 일이었다. 고작 그것으로는 자신들을 막을 수 없었다.
"기억하고 있다."
"내일은 반드시 제 부탁을 들어주셔야 합니다."
명진이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악마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은 좀 더 많은 악마들을 소환할 수 있을 거다. 하급 악마들에 불과하지만 이곳을 부수는 데에는 충분할 테지."
"그 소환하는 곳을 제가 말한 그곳으로만 바꿔주시면 됩니다."
그가 말한 곳은 바로 강태상이 살던 집이었고, 강호그룹 계열사가 있는 건물들이었고, 강회장의 집이었다.
"그리하겠다.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악마가 허락을 하자 명진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그놈들은 자신에게 치욕을 준 대가를 받게 될 것이다. 물론 놈들이 이미 집에서 도망을 쳐서 죽이지 못할 수도 있다. 강태상 그놈이 가만히 있다가 그의 생각대로 당하진 않을 테니까. 하지만 놈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재산이라고 여기고 있었기에, 그들의 재산을 파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복수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강태상은 언젠가 반드시 자신의 앞에 나타나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놈에게 힌트를 주기 위해 일부터 동영상을 만들었을 때, 악마의 옆에 서 있기까지 했다. 자신을 찾아오라는 신호였다.
놈은 아마 자신을 한 번 이긴 적 있다는 것 하나로 자신만만해서 찾아 올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그때의 자신이 아니었다.
그는 강해졌다.
이번에야 말로 그놈을 힘으로 이겨 밟아 죽일 것이다. 명진이 주먹을 꽉 쥐고 으드득 이를 갈았다. 그러다가 돌연 킥킥킥 웃음을 터트렸다. 내일이 되면 놈이 절망하며 일그러트릴 얼굴이 절로 상상이 됐기 때문이다
명진의 눈동자는 살기와 복수심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에비해 악마는 명진의 얼굴을 흥미 없어 하며 바라봤다. 아니, 오히려 조금 차가운 듯도 보였다. 그가 명진을 그렇게 바라보는 까닭은 한 가지였다.
명진은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훌륭히 성공했다. 중간에 잡음이 많았고,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일단 성공하긴 했다. 그것으로 족하다. 결국 악마들은 인간계에 소환됐고, 계획한 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명진은 문지기였다. 인간계로 악마를 소환시키는 문지기. 그 문지기의 역할이 이제 끝났다.
악마는 명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저놈이 아직 자신에게 쓸모 있는 놈인가? 앞으로 더 써먹을 수 있는 것이 있는가?
악마는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이 오랫동안 이어지진 않았다.
너무 쉽게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그는 더 이상 악마에게 필요하지 않았다.
쓸모 없는 것이다. 굳이 더 이상 데리고 갈 필요가 없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냐고? 뭘 그런 걸 생각까지 하는가. 모든 일은 자연스럽게 진행 될 것이다. 악마는 그렇게 생각하고 고개를 돌렸다. 더 이상 그의 머릿속엔 이명진이라는 자가 남아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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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같은 2편 준비해왔습니다. 휴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