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4 클케논의 요새 =========================================================================
놈한테 무력화가 먹히지 않는다. 그리고 태상이 능력을 사용한 것이 실패했음을 눈치 챈 바로세가 저렇게 그를 비웃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왜 그렇게 건방지나 했더니 숨겨 놓은 한 수가 있었던 모양이구나. 무슨 능력인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나한테는 먹히지가 않는 것 같구나. 크하하!”
바로세가 가소롭다는 듯 거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태상은 자신이 최악의 상황에 처해 있다고 생각했다.
무력화가 듣지 않는 상대의 등장으로 일행 모두의 긴장감이 고조됐다.
그들의 앞에 있는 자는 A등급 바로세보다 더 강할지도 모르는 상대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무력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이 놈을 죽이지 못하고 죽을 지도 모르게 되는 것이다.
사로나는 저도 모르게 아이라를 힐끔 바라봤다.
자신은 죽어도, 저 아이만은 살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방법이 있으면 그게 어떤 것이라도 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그런 자비로운 희망이 생겨날 리가 없었다.
태상은 주먹을 꽉 쥐고 분함을 감추지 못하며 바로세와 시선을 마주했다.
“제 봉인을 풀어주십시오.”
“카살라?”
그때, 카살라가 태상에게 다가와 말했다. 뜻밖의 말에 태상이 왜 그러냐고 묻자 카살라는 자신이 그를 감당해내겠다고 말했다.
“도망칠 시간은 끌 수 있을 겁니다.”
“지금 너 혼자서 저놈을 상대하고 있을 테니 우리보고 도망치라는 거야?”
“무력화가 듣지 않는다면 저희 일행만으로 저놈을 상대하는 건 어렵습니다.”
카살라의 말은 사실이었고, 태상도 잘 알고 있는 일이긴 했다. 하지만 카살라를 두고 나머지는 살겠다고 도망을 친다는 건 그의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이다. 잠시 생각하던 태상이 말했다.
“좋아, 알겠어. 지금 할 수 있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는 것 같으니 네가 해줘야겠다. 최대한 시간을 끌어줘.”
태상이 결심을 하고 카살라에게 말했다.
카살라는 많은 것을 묻지 않고, 그의 말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은 설마 정말로 태상이 카살라를 희생시켜 도망을 치려고 하는 것인가 싶어 놀라 그를 바라봤다. 태상이 카살라의 목걸이를 건네받아 봉인을 풀어주고, 다른 일행에게 말했다.
“카살라를 도와줘.”
하지만 태상은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예 선택지로 남겨두지도 않았다. 그는 지금 악마의 심장을 생각하고 있었다.
저놈을 잡는 데에 B등급 악마의 심장으로 충분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 저놈을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무력화가 듣지 않는다면, 놈한테 무력화가 들을 정도로 태상이 강해지면 될 일이었다.
그 말을 들은 일행은 역시라는 생각을 하며 굳은 의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라, 날 좀 도와줘.”
“네!”
무슨 일이든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아이라가 하지 못할 일이 없었다. 그녀가 서둘러 태상과 함께 일행들 뒤로 빠졌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바로세는 태상이 다른 곳으로 가도록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그가 다친 날개를 펄럭이며 움직이려 했다.
"지금 내 앞에서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는 거냐?"
어림없다는 그의 앞을 카살라가 가로막았다. 태상이 시간을 끌어달라고 했으니 카살라는 죽음을 불사하더라도 반드시 그의 말을 지킬 생각이었다. 그가 바로세에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부터 쓰러트리고 지나가야 할 거다.”
“고작 너 따위가 내 앞을 가로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물론 네 녀석도 꽤 흥미로운 녀석이긴 했다. 인간인 주제에 천사의 기운을 품고 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그놈들의 날개까지 달고 있고 말이야. 하지만 저놈보단 못하다. 난 저 녀석을 먹어야겠다!!!”
바로세가 날개를 펄럭였다. 그러자 카살라도 그를 따라 날개를 펄럭이며 말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날 쓰러트리기 전엔 그에게 갈 수 없다.”
“건방진 놈이...!!!!”
바로세가 날개를 활짝 펼쳐 한 번 펄럭였다. 그러자 날개에서부터 나온 바람이 카살라의 몸을 밀어버렸다. 카살라는 자신의 날개를 펄럭이며 저항했으나 바로세의 힘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카살라가 결국 바닥을 뒹굴자, 혜연이 염력을 이용해서 단검을 바로세에게 날렸다.
바로세는 어림없다는 듯 손으로 한 번 휘젓자 그녀의 단검이 부러지며 바닥에 떨어졌다. 그가 같잖다는 듯 혜연을 바라봤다.
물론 그녀도 자신의 얄팍한 수가 그에게 통할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태상을 따라가지 않게 막을 의도는 훌륭하게 먹혀들어갔다. 그녀가 단검을 던지며 놈의 눈길을 끄는 사이, 태상과 아이라가 이곳에서 도망을 쳤기 때문이다.
카살라는 다행이 크게 다친 곳이 없는지 멀쩡한 모습으로 몸을 일으켰다.
"다시 한 번 말한다. 우릴 뛰어넘지 않는 이상 그에게 갈 수 없다."
그의 단호한 목소리가 바로세의 얼굴을 와락 찌푸리게 만들었다.
한편, 태상은 조금 떨어진 곳으로 아이라와 함께 움직인 후 악마의 심장을 품에서 꺼내들었다. 시간이 얼마 없었기에 멀리 가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태상도 위험한 결심을 한 거지만, 지금 바로세와 싸우고 있는 나머지 일행들도 똑같이 위험한 상황이었다.
아이라는 태상이 도대체 뭘 하려고 하는 걸까 하다가 심장을 꺼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그를 봤다.
“그걸 먹으려고요? 위험하잖아요! 아직 아무 것도 실험해 본 게 없는데...”
이 미션에 오기 전, 태상은 악마의 심장을 좀 더 신중하게 두고 살펴 본 후 먹자고 했었었다. 그런데 지금 상황에서 갑자기 심장을 꺼내드니 걱정이 들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상황에선 이 수밖에 없으니까. B등급 악마의 심장으로 저 녀석을 상대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해봐야지.”
“.......”
그의 말이 모두 맞는 말이었던 지라 아이라는 차마 하지 말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가 강해져야 사로나도 살고, 다른 일행 모두가 살 수 있었다. 태상은 울상을 짓고 있는 아이라에게 인드고의 눈물을 건넸다.
“만약 내가 감당해내지 못하고, 숨이 끊어질 것 같으면 그걸 내게 먹여. 그리고 저번에 너한테 줬던 B등급 악마의 심장 좀 줄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B등급 악마의 심장 한 개로는 부족할 것 같았다. 주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두 개를 한꺼번에 복용하는 건 무척 위험한 행동이었다. 아이라는 정말 이건 아닌 것 같다며 그를 말렸다.
"두 개를 같이 드신다고요? 그건 미친 짓이에요!"
“이 인드고의 눈물은 효과가 좋아서, 숨만 붙어 있으면 사람을 살릴 수 있어. 그러니까 내가 위험해진다 해도 네가 잘만 사용해주면 괜찮을 거야.”
아이라가 태상의 말에 별 생각 없이 받아 들었던 인드고의 눈물을 조심히 쥐었다. 이게 태상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약이라고 하니 절로 긴장이 됐다.
시간이 없었다.
태상은 B등급 악마의 심장 두 개를 모두 차례로 입 속에 넣어 섭취했다. 여왕의 말처럼 보석같이 생긴 심장을 입에 넣으니 솜사탕처럼 사르르 녹아 없어져서 먹는 것에는 큰 무리가 없었다.
"꺅! 오빠!"
태상의 돌발행동에 놀란 아이라가 발을 동동 굴렀다. 태상은 아직까진 괜찮았기에 그녀에게 미소를 보였다. 그러다가 태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악마의 심장을 먹었는데, 아무런 변화를 느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변한 게 없는 것 같...큭!”
그때, 말을 하던 태상은 자신의 배를 붙잡고 몸을 휘청거렸다.
아랫배에서부터 참을 수 없는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태상이 몸을 앞으로 숙이며 심호흡을 했다. 열기는 점점 더해지고 있었다. 아이라는 갑자기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는 태상이 걱정되어 그의 몸을 부축하려고 손을 가져다댔다.
"앗 뜨거!!"
아이라는 너무 놀라 뒷걸음질 쳤다. 그의 몸이 엄청나게 뜨거웠기 때문이었다. 그 열기는 사람이 낼 수 있는 열기가 아니었다. 마치 끓는 물에 손을 넣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그의 피부에 아무런 열기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아이라가 다시 그에게 다가가려 하자 태상이 손을 들어 올려 그녀를 막았다.
분명 엄청나게 아픈 것 같은데, 태상은 비명을 지르질 않았다. 그는 입을 악물고, 고통을 견뎌내고 있었다. 간간히 끙끙거리는 신음만 내뱉을 뿐이었다.
태상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바람에 아이라는 인드고의 눈물을 써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한참을 발만 동동 구르며 있다가 결국 인드고의 눈물의 뚜껑을 열었다.
이대로 있다간 그가 죽어버릴 것 같았다. 아이라의 얼굴에 두려움과 공포가 깃들었다.
**
“큭!”
바로세는 안타깝다는 듯 혀로 자신의 입술을 한 번 슥 훑었다. 카살라는 무릎을 꿇고, 피가 나는 왼쪽 팔을 붙잡으며 심호흡을 했다.
“꽤 성가시게 구는 구나.”
금방이라도 저 녀석들을 쓸어버리고 태상을 잡으러 갈 생각이었던 바로세는 카살라의 예상치 못한 반격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분하고 수치스럽지만, 그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기에 곧장 저들을 죽여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카살라 한 명이라면 어떻게 해보겠는데, 자꾸만 옆에서 깔짝대는 다른 계약자 놈들이 무척이나 거슬렸다.
바로세는 지금 자신이 다치지만 않았어도 저놈들은 손 한 번 휘저으면 사지를 찢어버릴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더 이상 봐주지 않겠다!”
지금 그는 기운이 제대로 운용되지가 않았다.
그래서 지금 이 상황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저놈들을 잡으려고 자신의 능력까지 써야 한다는 게 굴욕적이었다. 아마 지금 또 무리하게 능력을 쓰면 회복하는 시간이 더 늘어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더 이상 태상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냥 자신을 귀찮게 구는 저것들을 모조리 자신의 눈앞에서 치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팔을 들어올렸다.
그의 팔은 굉장히 컸다. 팔을 감싸고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철들이 그의 팔을 단단하게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팔은 태상 일행에겐 안타깝게도 단순한 장식용이 아니었다.
손바닥이 하늘로 오게 펼친 바로세는 곧 그곳에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주변에서 놀랍게도 파지직- 파지직- 소리를 내는 전기 구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의 몸 주변에서 빙빙 돌며 위협적으로 소리를 내자 일행은 바로세가 새로운 공격을 시작하려 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들이 더 이상 그의 공격을 버텨낼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바로세가 만들어 낸 전기 구체는 곧장 자비없이 카살라를 향해 쏘아졌다.
콰앙!!
"아아아악!!!"
카살라가 비명을 질렀다. 그의 몸이 바닥에 쓰러지며 온 몸을 버둥댔다. 전기구체가 카살라의 몸과 부딪히자 한 번 폭발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몸 구석구석에 계속해서 데미지를 주고 있었다.
혜연은 여전히 정신을 놓고 있는 레베카에게 달려가 그녀의 몸을 다급하게 흔들었다.
"이봐요!! 정신 좀 차려봐요!!"
하지만 레베카는 그녀가 흔드는 데로 몸을 흔들리며 여전히 넋을 놓은 표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혜연이 답답한 마음에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쳤다. 레베카는 필사적으로 반만 바라보며 자신의 능력을 무의미하게 난사하고 있었다.
반의 상태는 그녀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차라리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그 능력을 카살라에게 써준다면 훨씬 도움이 됐을 것이다.
라마스가 미션을 줘서 오긴 한 거지만, 그래도 반을 살리고자 하는 마음도 분명 있었다. 그런데 도움을 요청해놓고 영 쓸모없는 모습을 보이는 게 너무 답답했다. 만약 지금 상황이 급박하지 않았다면 혜연은 그녀의 뺨을 쌔게 때렸을 지도 모른다.
혜연이 레베카를 향해 답답함을 토로하고 있는 사이, 바로세의 전기구체는 틈을 주지 않고 사로나를 향해 쏘아졌다. 사로나는 구체를 피하기 위해 재빨리 몸을 움직였으나, 전기구체는 어림없다는 듯 사로나를 끝까지 뒤쫓았다.
구체가 휘어지기까지하며 사로나를 끊질기게 쫓아오자 결국 그녀의 몸과 전기구체가 맞닿으려 했다.
위기의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시끄럽게 파지직 소리를 내던 전기구체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고 사라지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사로나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곧 들이닥칠 고통을 대비하고 있다가 놀라 눈을 떴다.
바로세는 갑자기 자신이 만들어낸 전기구체가 힘없이 사라지자 놀라 주변을 살피며 외쳤다.
"누구냐?!"
바로세가 고개를 돌린 곳에 서 있는 이는, 바로 아이라와 태상이 있었다.
아이라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사로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태상은 바로세를 노려보고 있었다. 태상이 아이라를 지나쳐 바로세가 있는 곳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태상님!!!"
혜연이 태상의 등장에 기뻐하며 소리쳤다. 그가 돌아 오자 마음이 든든해지고 안심이 됐다. 그가 돌아온 것만으로도 그녀는 살아날 수 있다는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들었다.
바로세가 그런 태상을 비웃었다.
"도망치지 않았구나. 적어도 목숨이 하나라는 걸 알고 있다면 도망을 치는 게 좋았을 것인데."
태상은 바로세의 말에 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은색으로 빛나는 마나건을 그에게 겨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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