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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자-112화 (112/251)

00112  여왕 2  =========================================================================

그녀는 문득 든 생각에 마지막 유언을 남기듯 태상에게 말했다.

“들어줄 이유가 없는 거긴 하지만, 그래도 한 가지 부탁을 해도 될까?”

태상은 삶에 전혀 미련이 없어 보였던 그녀가 한 가지 부탁을 남긴다는 말에 단검에 힘을 주려던 것을 멈췄다.

“유언인가?”

오랫동안 살아왔으니 미련이 없을 거라 생각할 수 있지만, 오히려 그렇게 오랫동안 살아왔기에 미련이 더욱 남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여왕에게는 한 가지 이루지 못한 미련이 남아 있었다.

“만약, 사샤라는 악마를 만나거든 꼭 좀 전해줘.”

“사샤?”

여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놈을 만나거든......”

태상에게만 들릴 정도로 여왕이 작게 중얼거렸다. 태상은 그녀의 유언을 들은 후, 더 이상 남은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미련 없이 그녀의 목을 단검으로 깊게 그어냈다. 너무 촉박하게 죽이면 무력화의 시간이 사라져 그녀의 몸에 악마의 힘이 다시 되돌아 올 수 있었다.

그런 불상사를 초례하기 전에, 그녀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내야 했다.

목이 잘려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태상의 몸이 따듯한 사람의 피로 범벅이 됐고, 여왕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태상은 그녀의 몸을 부축해주지 않았다.

태상 일행은 잠시 동안 그녀의 몸이 다시 재생되는지 확인하기 위해 기다렸다. 여왕의 몸은 평범한 계약자의 몸처럼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태상이 그녀의 시체를 여러 번 확인한 후에야 그녀가 진짜 죽었음을 확신했다.

“확실히 죽은 거겠죠?”

“이 정도 기다렸는데도 살아나지 않는 거면 진짜 죽은 거겠지.”

그야말로 씁쓸한 죽음이었다.

태상은 여왕의 시체를 들어 올리려 했다. 천사들에게 그녀의 죽음을 확인시키기 위해선 시체가 필요했다. 그런데 태상이 그녀의 몸에 손을 데자 마치 먼지가 되듯 바스러지며 바람에 휩쓸렸다. 그녀의 몸이 순식간에 허공으로 사라진 것이다. 먼지가 되어 말이다.

진작 이렇게 되었어야 했을 여자였다.

사로나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말했다.

“그런 소원을 빈 여자의 마음이 솔직히 이해가 되네요.”

“아이라 때문에요?”

혜연이 묻자 사로나가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아이라가 아팠을 때 천사와 만났다면 그녀도 여왕과 같은 소원을 빌지 않았을까? 죽고 싶지 않다고, 살게 해달라고 말이다. 여왕의 모습에서 아이라가 투영되어 사로나는 그녀를 보는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

“네가 여왕을 안식하게 해줄 수 있어서 다행이야.”

사로나가 괜스레 태상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자신과 상관없는 여자이기도 했고, 그다지 동정해주고 싶은 여자는 아니었지만, 태상도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고 여왕도 원하던 죽음을 맞이했으니 서로 가장 좋은 결말이 됐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지막에 여왕이 뭐라고 한 거에요?”

혜연은 여왕이 무슨 부탁을 했는지 궁금한지 물었다.

“별 거 아니야. 시원하게 욕 한 번 해달라고 하더라. 기왕 죽여주면 더 좋고.”

“사샤라는 악마가 그녀와 계약했던 악마겠네요. 여왕같은 존재를 만들어 낼 정도면 굉장히 강한 악마일 것 같아요.”

“응. 아마 그렇겠지.”

태상 일행은 얘기를 그만두고, 움직였다. 여왕은 죽었지만 이곳을 쳐들어오는 악마 계약자들은 여전했으니 말이다.

다시 전방으로 가자 천사 계약자들과 악마 계약자들이 여전히 싸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성문이 활짝 열려 있다는 것과 싸우는 곳이 성문 밖에 아니라 안쪽이라는 점이었다.

딱 봐도 천사 계약자들 쪽이 밀리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걸 알리듯 천사들이 하늘에서 공격을 하다가 멈추고 철수를 하고 있었다.

“천사들이 공격을 멈추고 철수하고 있어요!”

혜연이 하늘을 올려다봤다가 그것을 발견하고 태상에게 알렸다. 계약자들은 그것도 모르고 아직도 악마 계약자들을 열심히 상대하고 있었다.

태상은 여왕 덕분에 강해진 마나건을 사용 해 볼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너희들은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어떻게 변했는지 실험 좀 해보고 올 테니까.”

태상의 앞에 야호가 갑자기 튀어나와 등을 보이며 섰다.

“왜?”

태상이 야호의 알 수 없는 행동에 묻자 야호가 크헝! 하고 소리를 냈다. 혜연이 야호를 대신해 그를 대변해주었다.

“타라고 하는 것 같은데요?”

“얠 타라고?”

태상이 타도 될 정도의 크기가 되긴 했지만, 한 번도 타본 적이 없기에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타봤는데, 생각보다 훨씬 안정적이고 편해요. 야호는 빠르게 달릴 수 있으니까 태상님이 타셔서 싸우시면 훨씬 편하실 거에요.”

“그래?”

혜연이 야호를 잘 챙기더니 그런 일까지 해봤을 줄은 몰랐다. 태상이 알겠다며 야호의 등에 올라탔다. 그러자 정말 생각보다 훨씬 편안한 승차감이 느껴졌다.

“가자!”

야호가 태상의 명령을 듣고 악마 계약자들 사이로 뛰어 들어갔다.

태상은 일단 어느 정도 감을 잡기 위해 악마 계약자들이 모여 있는 곳을 향해 마나건을 쏘려 했다. 하지만 태상은 마나건을 쏠 수가 없었다. 방아쇠 부분이 이상하게 변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뭐지?”

방아쇠를 위로 밀자 달칵거리며 무언가가 넘어갔다. 그러자 은빛으로 빛나던 마나건의 색이 순식간에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태상이 다시 한 번 방아쇠를 위로 밀었다.

이번엔 마나건이 검정색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총 4가지 색이 바뀌고 있었다.

은색 붉은색 검정색 금색으로 말이다.

태상은 이 네 가지 색들이 각각 다 다른 기능을 하는 것이라 생각됐다. 이곳에 온 이유가 마나건을 시험해보기 위함이니 오래 생각할 필요 없이 먼저 은색으로 바꿔 전방을 향해 쏘았다.

그가 있는 전방에는 악마와 계약자들이 우글거리고 있는 곳이었다.

태상이 방아쇠를 누르자 갑자기 손목이 뻐근해지며 자신의 몸이 뒤로 밀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마나건을 두 손으로 잡아 버티며 마나건의 총구에서 에너지가 모이고 있는 것을 응시했다. 은빛 줄기들이 동그랗게 모이고, 전방을 향해 거대한 기운이 쏘아졌다.

야호가 깜짝 놀라 땅에 발을 박고 버텼지만, 태상의 몸은 그럴 수가 없어 야호의 등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탄환은 땅을 깊게 파면서 강 길이라도 만들려는 것처럼 강한 파급력으로 적들에게로 날아갔다. 그리고 악마와 계약자들이 모여 있는 곳을 정확히 맞췄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예상 된 절차처럼 탄환과 악마들이 모여 있는 곳이 부딪치자 폭발이 일어났다. 사방에 흙과 돌들이 휘몰아쳐 태상은 잠시 고개를 돌려야 했다.

귀가 먹먹해지고, 바람이 잦아들자 태상이 눈을 떴다.

야호가 태상의 앞을 막아 보호하고 있었다. 그는 괜찮다는 듯 야호의 등을 툭툭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귀가 먹먹해 잠시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며 정신을 찾아야 했다.

“골 때리는 녀석이 됐네.”

누가 보더라도 저 짓을 해놓은 게 태상이라는 것을 알리듯, 그에게로 시작 된 길이 거대하고 둥근 구덩이를 만들어 놓았다. 그 안에는 죽은 시체들이 널려 있었고, 주변으로는 부상자들이 속출했다.

천사 계약자들이나 악마 계약자들 모두 태상을 응시했다. 태상은 그들의 시선을 느끼며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은빛이던 마나건은 마치 기운을 다했다는 듯 흰색으로 변해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엄청난 짓에는 쿨타임이 있는 듯 했다.

은색 하나가 이 정도인데, 다른 것들은 어떨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너무 과한 신고식을 해서 그런지 그에게 쏟아지는 눈동자들을 두고 그런 실험을 할 순 없을 듯 했다.

“아무래도 여기서 계속 실험해보는 건 안 될 것 같지?”

야호가 태상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그의 앞으로 다가와 등을 내밀었다. 이곳을 이만 빠져나가자는 신호였다. 태상이 녀석의 등에 올라타자 야호가 일행이 있는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잠깐!”

그때, 태상이 누군가를 발견하고 야호의 걸음을 멈췄다.

야호는 태상의 말을 따라 얌전하게 달리던 속도를 멈췄고, 태상은 야호의 등에서 내렸다.

“넌 먼저 돌아가 있어.”

크릉.

싫다는 듯 야호가 불만을 드러냈지만 태상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기에 들어주는 이는 없었다. 태상이 굳이 멈춰서 다른 곳으로 향한 것은 반카이가 악마 계약자와 싸우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태상은 흰색으로 변한 마나건을 반카이의 뒤를 노리고 있는 악마 계약자에게 쏘아댔다.

“크악!”

놈이 어깨에 마나건이 명중 당하고 쓰러졌다. 반카이가 비명소리에 놀라 뒤를 돌았다가 쓰러진 악마 계약자를 보고 태상을 발견했다.

그가 자신을 구해줬음을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오신 겁니까?”

태상이 마나건으로 악마 계약자들을 견재하며 반카이에게 다가가자 그가 물었다.

미션을 하러 갔으면서 이곳에 올 줄 몰랐던 듯 싶었다.

“다 끝내고 돌아 온 겁니다. 그런데, 슬슬 후퇴해야 할 것 같던데요.”

반카이도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무래도 이번 미션은 실패한 것 같네요."

반카이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겨보고 싶었는데, 실패했으니 마음이 좋지 않은 건 당연했다.

"다들 후퇴하고 있으니 이제 그만하고 가시죠."

반카이는 달려오는 악마를 향해 무기를 휘두르며 말했다.

"읏차! 이제 해야죠. 천사랑 다른 계약자들도 거의 다 후퇴한 듯 해보이니 말입니다."

"다 후퇴할 때까지 망을 보신 겁니까?"

"제가 이곳의 책임자였으니 당연히 모두 무사히 후퇴할 때까지 남아야죠. 그래도 태상씨가 와준 덕분에 저도 쉽게 도망칠 수 있겠네요."

그는 자신과 함께 끝까지 뒤를 남았던 일행에게 목청을 높여 후퇴한다는 것을 알렸다.

“후퇴한다!!!!!!!!! 후퇴한다!!!!!!!”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그 소리를 들은 천사 계약자들이 덩달아 후퇴한다!!!!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들의 목소리가 채 듣지 못한 다른 계약자들에게 들릴 수 있도록 말이다.

악마 계약자들이 후퇴한다는 소리를 듣고 더욱 거세게 공격을 시작했다. 태상과 반카이는 최대한 천사 계약자들이 도망치는 것을 도우며 움직였다.

태상은 총으로 악마 계약자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엄호를 했고, 반카이는 앞을 뚫으며 길을 확보했다.

악마 계약자들은 나머지 천사 계약자까지 악바리처럼 잡아 죽이려 했으나 태상과 반카이가 길을 뚫자 결국 막지 못하고 놓칠 수밖에 없었다.

태상은 천사에게 받은 시계로 방향을 잡아 움직였다. 그리고 역시나 시계가 가리키는 곳에 천사들이 도망쳐 오는 계약자들을 천계로 돌려보내주고 있었다. 반카이가 태상과 함께 엔드에게 다가갔다. 그곳엔 미리 기다리고 있는 야호와 태상 일행이 그들을 반겼다.

"아앗! 오셨어요!"

혜연이 태상을 발견하고 외쳤다. 반카이는 천계로 이동하기 전에 태상에게 손을 내밀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다음에 또 뵙죠."

태상이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반카이는 미리 움직인 길드원들을 살펴야 했기에 오랫동안 그와 대화를 나눌 사정이 못됐다.

반카이가 서둘러 이동마법진으로 이동하자 태상은 자신의 일행을 챙겼다. 야호까지도 다친 곳 없이 멀쩡했다. 이번 미션이 태상으로서는 천계에 와서 처음으로 실패한 미션이다. 하지만 그는 미션에 성공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었기에 불만이 없었다.

그때, 태상에게 엔드가 다가왔다.

그가 태상에게 온 이유는 그에게 여왕을 맡겼기 때문이었다. 태상도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그를 바라봤다.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그럭저럭."

"안타깝지만 이곳은 악마에게 뺏겨야 할 듯 싶습니다. 하지만 후에 반드시 되찾을 겁니다."

엔드가 괜스레 다른 이야기를 하며 말을 끌었다. 태상은 그가 무슨 말을 듣고 싶어 하는지 빤히 알았기에 말했다.

"그걸 얘기하려고 온 건가?"

태상은 엔드가 자신의 능력을 알고 여왕에게 보냈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를 대하는 태도가 그리 좋지 못했다. 자신을 감히 이용하려 한 자이니 좋게 볼래야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 작품 후기 ============================

다음편은 17분에 올라옵니다.

일회용 캐릭터였는데, 여왕에게 애정을 가져주시는 분들이 계시네요.

이런...죽이지 말걸그랬나...그래도 여왕을 위해서 죽여주는 걸로...!!

다음편도 챙겨 읽고 가세요~ 넘어가기 전에 추천 한 번씩 해주신다면 연참에 힘이 됩니다. 2연참 연속으로 하면 첫번째 화에는 코멘이랑 추천수가 낮아서 고민입니다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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