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자-111화 (111/251)

00111  여왕 2  =========================================================================

태상이 그녀의 말에 끼어들어 말했다.

“악마가 약해진 것 같았다고 생각했겠지.”

“......맞아.”

여왕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태상은 의도했던 바인지라 잘 알아봤다며 여왕을 칭찬했다.

“충분히 볼 거 다 봤네. 악마들을 그렇게 만드는 게 내 능력이야.”

“악마를 약하게 만드는 거랑 날 죽일 수 있는 거랑 무슨 상관인지 잘 모르겠는 걸?”

여왕은 여전히 불신 가득한 눈빛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런 불신의 눈빛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였다.

“무력화. 그게 내 능력이야. 네게 걸려 있는 축복인지, 저주인지 모를 것들을 잠시 동안 모두 정지시킬 수 있을 거다. 내가 무력화를 너한테 사용한 후, 네가 그 시간동안 죽는다면 넌 이 세상에서 벗어날 수도 있겠지.”

“......”

여왕이 침묵했다.

직접 자신의 눈으로 그의 능력이 통하는 걸 보기 전까지 여왕은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것을 믿기엔 그녀가 당해왔던 수많은 희망들이 너무 많이 짓밟혀 왔으니까.

“두 눈으로 네 말이 가능하다는 걸 보이기 전까지 난 끝까지 믿지 않을 거야.”

“난 네게 증명할 수 있는 걸 모두 보여줬어. 네가 믿지 않는다면 우린 그냥 널 저기에 있는 이동 마법진으로 데려가면 끝이야. 그러길 바라나?”

태상은 지금 여왕에게 네가 더 이상 이런 태도로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태상에게 자신이 얼마나 유용한 것을 갖고 있는지를 알려주어야 했다. 그래야 그가 그녀를 위해 자신의 능력을 사용할 테니까 말이다.

“.........”

여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멍청한 년, 넌 또 속는 거야. 그러니까 기대하지 말라고.’

스스로 그렇게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하지만 태상의 마지막 말에 여왕은 결국 자신의 다짐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여태까지 그렇게 많이 속아봤다면서. 이번에도 속는 셈 쳐봐도 좋아. 되면 좋은 거고, 아니면 마는 거라고 가볍게 생각해. 왜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거지? 어차피 그쪽은 이미 각오하고 있는 일이잖아.”

정말 어처구니없는 놈이다.

여왕인 자신에게 뻗대는 것도 정도가 있지, 저 녀석은 너무 자신을 얕본다.

가볍게 생각하라고?

어느 누가 감히 저런 말을 자신에게 한단 말인가. 여왕은 끈질기다. 그러니 그녀에게 밉보여야 좋을 게 없다. 그녀는 불사이고, 그녀에게 미움 받은 존재는 그렇지가 못하다.

여왕이 마음을 먹는다면, 아주 끈질기게 그놈 하나를 죽이기 위해 따라다닐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그놈의 미래는 흙빛이라고 생각해도 좋았다. 그런 자신에게 감히 가장 예민한 ‘죽음’에 대해 얘기하면서 그걸 가볍게 생각하라고?

저 남자는 화끈하고, 건방지며 아주....

재밌는 녀석인 것 같았다.

“좋아, 알았어. 이번엔 내가졌다는 걸 시인할게. 네 뜻대로 내가 너한테 줄 수 있는 게 뭔지 알려주지.”

여왕이 한결 가벼워진 표정과 목소리로 말했다. 가볍게 생각하라고 하니, 정말 그렇게 가볍게 생각할 생각이다. 되면 좋고, 아님 말고라....여왕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가 두 손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그녀의 손바닥이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잘 봐. 이제부터 넌 날 도우려고 안달 낼 수밖에 없을 테니까. 하지만 네가 한 말을 지키지 못했을 땐 확실히 각오해야 할 거야."

여왕은 스산한 목소리로 경고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장난스럽게 가볍게 생각하라고? 물론 자신이야 그럴 수 있지만, 이런 제안을 한 그는 그래서는 안 됐다. 필사적으로 자신을 반드시 죽여주어야 한다 생각해야 할 것이다. 여왕은 그가 자신의 말을 지키지 않았을 때, 그를 반드시 죽여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없었던 그녀의 손바닥에 어두운 빛이 서리기 시작했다. 검은 안개는 소용돌이치며 그녀의 손바닥에서 하나의 형체로 뭉쳐졌다.

태상 일행이 흥미로운 눈빛으로 그녀의 손바닥을 바라봤다.

“자, 이게 뭘 거 같니?”

그녀가 자신의 손바닥에 있는 것을 태상 일행에게 자랑하듯 보여주었다. 태상은 그녀의 손바닥에서 생겨난 것을 유심히 바라봤다.

색은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고, 보석처럼 단단해보였으며, 모양은 마치 사람의 심장을 그대로 본떠서 깎은 것 마냥 비슷했다.

“심장?”

태상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여왕이 활짝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맞췄어. 이건 심장이야. 내가 낳은 새끼 악마들의 심장과 내가 그동안의 모아놨던 다른 놈들의 심장들을 이렇게 뭉쳐놨지. 내 새끼 악마들은 심장이 거의 없어. 하급으로 정해져 태어난 아이들이라서 거의 대부분 다 죽어버리거든. 아무리 증오스럽다고 해도 내 아이들인데, 그렇게 태어나서 허무하게 죽어나가는 걸 보는 게 좀 안타깝더라고. 그래서 이렇게 하나 둘 모아두기 시작했지.”

오랜 세월을 통해, 시행착오를 겪고 만들어진 것이었다. 여왕이 자신의 손에 든 것을 마치 아름다운 보석을 보는 것마냥 바라봤다.

악마들의 심장이라.....

태상은 새끼 악마들의 심장을 자신이 왜 탐낼 것이라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천사에게 받쳐서 점수를 받으라고 하는 걸까?

“그래서?”

태상이 악마의 심장이라는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놀라운 표정이나 다른 말이 없자 여왕이 고개를 저었다.

“쯧쯧, 넌 보는 안목을 좀 키워야 할 것 같구나.”

“.....??”

“뭣 모르는 지금의 계약자들은 악마의 심장을 단순히 천사들만 사용 할 수 있는 거라고 알고 있겠지. 하지만 그게 아니거든. 악마의 심장을 취하면 계약자들도 강해질 수 있어. 너흰 그걸 모르고 천사들한테 꼬박꼬박 상납했겠지.”

여왕의 말은 태상 일행에게 큰 충격을 주는 말이었다.

“천사나 악마나 다들 똑같은 놈들이야. 계약자들이 심장을 취하면 몇 배나 강해질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놈들은 일부러 그걸 알려주질 않지. 왜냐면 그들이 자신들만큼 강해지는 걸 바라지 않기 때문이야. 너희들은 언제까지나 일회용으로 써먹을 수 있는 존재로 남아야 하거든.”

그러고 보니 야호도 악마의 심장을 먹고 나서 빠르게 성장했으며, 몸도 훨씬 건강해졌었다. 그때를 떠올리니 여왕의 말이 마냥 허무맹랑한 소리가 아니었다. 태상은 확실히 그녀의 말에 관심이 갔다.

“악마의 심장을 우리들이 어떻게 취할 수 있지?”

“방법이야 여러 가지 있지. 그것까지 친절하게 알려주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이야기를 딴 길로 세게 하지 마.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난 이 악마의 심장으로 네 무기를 아주 강력하게 만들어 줄 거야. 오랜 세월동안 축적되어 하나로 뭉쳐진 이 악마의 심장은 네 무기를 아주 강하게 해 줄 거란다. 넌 네 능력으로 악마를 약하게 만들어서 전투를 하고 있지. 하지만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을 거야. 네가 이걸 취하게 되면 본인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놈들을 잡아낼 수 있게 될 테니까.”

여왕의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이듯 작아졌다.

“넌 그 강한 힘이 갖고 싶겠지?”

이제 어떻게 할 거냐는 듯 여왕이 태상을 바라봤다.

그는 확실히 여왕이 말한 악마의 심장이 탐이 났다. 그동안 태상은 자신의 능력에만 너무 의존하지 않으려고 마나건을 이용해 전투하는 법을 연습해왔다. 그리고 여왕의 말은 그런 자신의 생각에 딱 부합하는 말이었다.

태상이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쏙 드는 조건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겠네.”

여왕이 내밀었던 팔을 내리며 말했다.

“하지만 이걸 얻으려면 그쪽이 먼저 해줘야 할 일이 있다는 걸 알고 있겠지? 내가 보여줬으니 당신이 이제 실천할 때야.”

여왕이 어서 해보라는 듯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단검이나 검 좀 빌려줘.”

사로나가 단검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태상은 여왕에게로 다가가 그녀의 배에 가져다댔다. 여왕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뭐하는 거야? 거길 자른다고 내가 죽을 것 같아?”

좀 더 한 방에 죽일 수 있는 목 같은 곳을 공격하길 원했다. 하지만 태상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며 무력화를 사용한 후 그녀의 배에 칼을 꽂았다.

“윽!”

여왕이 고통섞인 신음을 뱉었다. 그녀를 가장 미치게 만드는 것 중 하나가 불사의 몸을 가졌으나 고통은 그대로 느낀다는 것이었다.

“이런 짓을 해도 난 죽지 않는다고 말했....!?”

여왕이 눈을 깜빡거리며 자신의 배를 내려다봤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손으로 자신의 구멍 난 배를 더듬었다. 그녀가 이렇게 놀란 것은 배에서 끊임없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는 자신의 피 때문이었다.

“상처가 아물지 않아...?”

아물지 않는 상처를 보다가 고개를 들어 태상을 바라봤다. 그 누구도 그녀의 재생력을 막지 못했다. 그런데, 처음으로 그녀는 자신의 피가 몸 에서 빠져나가고 있음을, 그리고 진짜 죽음이 자신을 맞이하러 왔음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었다.

가볍게 생각하라고, 그냥 밑져야 본전 이라는 식으로 가볍게 그녀를 설득했었다. 하지만 이건 절대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었다.

여왕은 눈동자를 잘게 떨었다. 그녀는 단검을 잡고 있는 태상의 손을 잡고 자신을 향해 당기려 했다.

“어, 어서....지금 어서 날...!!”

하지만 태상은 자신의 손을 여왕의 손아귀에서 매정하게 빼냈다. 여왕은 도대체 왜 그러냐는 듯 애가 타 그를 바라봤다.

“아니, 거래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 효과가 이어지는 건 3분이야. 까딱 잘못했다간 넌 이 기회마저 박탈당해버릴 테니 생각 잘 하는 게 좋을 거야. 이제 막 1분이 지나고 있을 걸?”

“너!!!”

여왕이 분노했다. 하지만 분노했다고 태상에게 해를 끼칠 순 없었다. 그의 말대로 그녀는 태상의 힘이 필요했다. 그는 정말 자신을 죽여 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내 질문에 대답해라. 악마의 심장을 우리가 사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태상의 질문에 여왕이 이를 으드득 갈면서도 입을 열었다. 그의 말대로 지금은 밀당 할 시간조차도 주어지지 못했으니까.

“....악마의 심장은 보이는 것처럼 딱딱하지 않아. 그냥 입으로 섭취하면 사르르 녹아 없어지지. 그게 네 힘으로 되돌아 올 거야.”

여왕이 순순히 대답했으나 태상은 그녀를 쉬이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부작용은?”

예전에 라마스는 야호가 악마의 심장을 먹었을 때, 위험성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 적이 있었다. 그러니 그 부작용이 자신들에게도 해당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여왕은 그것까지 생각할 줄 몰랐다는 듯 칫! 하고 어쩐지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너무 강한 기운을 먹으면 네 몸이 터져서 죽을 수도 있어. 그래서 이 심장을 섭취하라고 하지 않고 네 무기를 강화시켜주겠다고 한 거야. 이걸 먹으면 넌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죽을 테니까.”

“그럼 악마의 심장을 어떻게 섭취하면 되지?”

“힘이 적은 것부터 차근차근 먹으면서 힘을 축적시켜야지. 그럼 저절로 몸의 내구성이 강해질 거야. 그럼 나중엔 강한 악마의 심장을 먹어도 충분히 견뎌낼 거고.”

처음부터 부작용에 관한 것도 설명해주었다면 시간을 아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왕은 그것까지 친절하게 얘기해줄 생각이 없었었다. 태상이 예리하게 부작용 부분을 얘기해 어쩔 수 없이 말한 거였다.

부작용에 관한 걸 말하지 않은 것은 태상을 골탕 먹이려는 속셈이 들어 있었다. 운이 좋아 살아도 그로인해 고통을 받았을 테니 지금 이런 취급을 당한 것에 대한 복수는 되겠다 싶었고, 잘못 먹어서 죽으면 그건 그것대로 쌤통이었다.

“자, 그럼 이제 네가 말한 대로 마나건을 업그레이드 시켜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잖아?”

여왕이 분하다는 듯 입술을 깨물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네 무기를 줘.”

"네가 이 무기로 자살하면?"

"....좋아 그럼 그냥 네가 들고 있어."

여왕은 짜증이 났는지 얼굴을 한껏 찌푸리고 있었다.

태상이 마나건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자 여왕은 손에 들려 있던 은빛 악마의 심장을 마나건 위로 겹치듯 올렸다. 그러자 은빛 심장에 환한 빛이 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나건과 은빛 심장이 하나로 합쳐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저런 게 가능할까요?”

혜연이 놀란 표정으로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며 중얼거리자 사로나가 말했다.

“천계와 마계를 오랜 세월 살며 떠돌았을 테니, 저런 방법도 알고 있는 거겠죠.”

빛이 사라지자, 여왕의 손에 있던 악마의 심장이 사라지고 변한 모습의 마나건만 남게 되었다. 은빛 색으로 변한 반짝이는 마나건에서 강력한 힘을 느낀 태상은 여왕이 약속을 모두 지켰음을 확신했다. 여왕은 이제 되지 않았냐며 재촉의 말을 뱉었다.

“이 정도면 약속을 다 지켰잖아. 어서 날 죽여줘. 어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단 말이야!!”

그녀에게 3분은 너무나도 촉박했다.

여왕이 발을 동동 구르자 태상이 그녀가 바라는 대로 목에 단검을 가져다 댔다. 여왕의 얼굴에 짙은 쾌감이 서렸다.

드디어....드디어......

죽음이 그녀를 찾아왔다.

그녀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빼앗긴 죽음이었다. 그녀를 괴롭히던 악마의 힘이 그녀의 몸에서 모두 빠져나간 지금이 그 기회였다.

이런 기적을 만나게 되리라 그동안 얼마나 상상하고 꿈 꿔왔던가.

더 이상 끔찍한 악마들을 낳지 않아도 됐으며, 이 지긋지긋한 삶을 끝낼 수 있었다. 여왕은 절실히 휴식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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