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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자-100화 (100/251)

00100  아이라  =========================================================================

“앗!”

사로나가 순간 균형을 잃고 몸이 쓰러지려 하자 근처에 있던 태상이 그녀의 허리를 부드럽게 잡아 그녀를 구해주었다. 그의 단단한 팔의 감촉이 느껴지자 그녀는 마치 벌레라도 묻은 마냥 그가 부축한 팔에서 떨어졌다.

뒤늦게 사로나가 정신을 차리고 미안하다는 듯 시선을 주었다. 태상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괜찮다는 신호를 보내주었다. 사로나의 그런 태도가 익숙했기에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던 것이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녀의 개인적인 프라이버시를 위해 묻지 않은 태상이다.

“괜찮아? 답지 않게 왜 그래? 조심해.”

“미안, 잠깐 딴 생각을 하느라고...”

사로나는 그렇게 말하곤 땅을 박차고 뛰었다. 그들은 지금 악마와 싸우고 있었다. 그랬기에 태상은 갑자기 사로나가 휘청거리기에 다쳤나 싶어 살폈던 것이다. 태상은 어쩐지 사라진 그녀가 신경 쓰여 그녀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탕!

물론, 그 시선이 오래 가진 못했다. F등급 악마가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대며 태상을 향해 공격을 해왔기 때문이다. 태상은 마나건으로 놈의 입속에 총알을 박아 넣어 죽였다. 야호가 저 멀리서 언제 크기를 키웠는지 악마들을 물어뜯고 있는 게 보였다.

얼마 후.

전투가 끝났고, 미션도 끝났다. 태상은 라마스와 만나고 있었고, 나머지 일행은 길드건물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번에 맡은 전투는 천계에 쥐새끼처럼 몰래 들어와 난장판을 만들어 놓고 도망가는 악마 놈들을 사냥해 달라는 비교적 가벼운 미션이었다. 혜연은 피 묻은 칼을 닦고 있는 사로나에게 다가가 말했다.

“요즘 좀 이상한 거 알아요? 무슨 일 있으신 거면 저한테 말하세요. 제가 도움이 되어드릴게요.”

혜연은 그녀가 오늘 하루만 넋을 놓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해서 그녀에게 그런 말을 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배려에도 사로나는 쉬이 입을 열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간단하게 그렇게 말을 하고 칼만 계속 닦자 혜연이 조금 서운한 표정을 짓다가 한숨을 쉬고 돌아섰다.

사로나는 태상 빼고는 다른 이에게 그다지 깊게 관계를 맺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만난지 꽤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혜연에게 존댓말을 사용하지 않는가. 과거 혜연이 그녀에게 말을 놓자고 해봤으나 거절을 당했었다.

혜연이 나도 모르겠다 하는 생각에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곤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혜연이 사라지자 사로나는 깊게 한숨을 푸욱 쉬었다.

"하아~."

“괜찮으십니까?”

“아! 아아....네.”

아무도 없는 줄 알고 한숨을 쉬었는데, 아직 가지 않은 카살라가 그녀에게 물은 것이다. 사로나가 얼떨결에 대답을 하자 알겠다는 듯 카살라가 입을 다물었다.

서로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기에 둘이 있을 땐 이렇게 계속해서 침묵이 흐른다. 처음에는 조금 불편한 공기가 둘 사이에 맴돌았지만, 이젠 그 침묵이 너무 익숙해 그런 걸 느낄 수 없는 지경까지 왔다.

사로나는 잠시 그렇게 길드 건물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접속을 종료하기로 했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예, 들어가십시오.”

접속을 끊은 사로나는 환한 아침을 맞이했다. 처음에는 밤에 일을 했기에 접속을 아침 시간에 할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굳이 일을 할 필요는 없었다. 해서 원래의 생활 패턴으로 돌아가도 됐다.

그러나 태상이나 혜연의 접속 시간을 맞추기 위해선 그녀가 계속 이 생활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여전히 낮밤이 바뀐 생활을 고수하는 중이었다.

사로나의 얼굴은 인간계에 와서도 펴질 줄을 몰랐다. 왜냐면 그녀를 이렇게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 천계가 아니라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방을 나오자, 부엌에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 모두 그녀의 가장 소중한 이들이라는 것은 절대 변하지 않을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녀가 지금 보고 있는 광경이 정상적인 광경이 아니라는 점 때문이었다.

“어! 언니, 일어났어?”

아이라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쪼르르 그녀에게 다가왔다. 사로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아이라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여자를 응시했다.

“...뭐하고 계셨어요?”

“이리 와서 앉으렴. 아이라랑 요리를 만들고 있었단다.”

“언니,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엄마 음식 솜씨는 세상 최고인 것 같아! 정말 맛있거든."

아이라의 얼굴에 혈색이 돌고 있었다. 어느 때보다도 행복하고 즐거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로나는 선뜻 아이라와 어머니의 사이에 끼어들 수가 없었다.

이건 정상이 아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아직 모르겠으나, 원인을 반드시 찾아야 했다. 그리고......그리고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려놓아야 한다.

사로나는 자신의 앞에 있는 ‘엄마’를 진짜 엄마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저게 환상이던, 누군가의 장난이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장 그녀가 손을 쓸 수 없었던 것은 아이라가 이상하게도 마치 예전부터 엄마가 계속 함께였던 것처럼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 가짜 엄마는 앞집에 사는 아줌마와 친구사이를 맺고 있기까지 했다. 그렇게 가짜엄마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녀의 삶에 스며들어 있었다. 하루아침 사이에 말이다. 하지만 원래 사로나는 앞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해서 앞집 아줌마는 사로나를 아주 살갑게 대했지만 사로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모르는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기억나지 않은 추억들을 얘기하는 모습은 참 어처구니없는 광경이었다.

도대체 누굴까? 이런 짓을 저지른 사람은.

누가 그녀의 죽은 엄마를 이런 식으로 보내어 자신을 기만하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찾으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사로나의 눈가에 어렴풋이 살기가 서렸다.

갑자기 죽은 엄마가 살아 돌아 온지 삼일 째다.

누군가가 자신의 가족 주변에 맴도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어 이틀 동안은 천계로 접속도 제대로 못했다. 아직은 섣불리 다른 이들에게 얘기하고 싶지 않았기에, 눈도장만 찍고 미션하러 간다며 나가길 이틀이었다. 하지만 이젠 이 황당한 현상을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카살라는 천사인지라 이곳의 일을, 그리고 자신의 일에 큰 관심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혜연은 너무 심하게 관심을 줄 것 같아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그녀가 손을 내밀었으나 잡지 않은 것이다.

상황이 그렇다보니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은 태상밖에 없었다.

그라면 지금 이 상황에 대해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들었다.

사로나는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잠시 통화버튼을 누를까 말까 고민하던 사로나는 결심을 하고 손가락을 움직였다.

**

태상이 눈을 떴을 때, 핸드폰이 부르르 부르르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태상은 방을 나와 통화 버튼을 눌렀다.

모르는 번호라면 곧장 거절을 했겠지만, 오늘 천계에서 이상한 모습을 자주 보였던 사로나였기에 반드시 받아야 하는 전화라고 생각했다.

태상은 그녀를 위해 불어로 언어를 바꿔 말했다.

[무슨 일이야?]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물론.]

사로나는 태상에게 현재 자신의 상황을 털어놓았다. 태상은 그녀의 황당한 사정을 듣고, 왜 요즘 넋을 놓은 적이 많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요즘 정신이 없었던 거구나.]

[미안해. 개인적인 일로 걱정 끼쳐서.]

[아니, 그런 일이라면 이쪽 일과도 관련이 있는 거니까 개인적인 일이라고 볼 순 없지. 그것 외에 달라진 건 없는 거야?]

[응. 전혀 짐작이 되질 않아. 도대체 왜 나타났는지, 그리고 뭘 원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 그냥 평범해. 그래서 더 소름끼치고.]

평범하다라...

태상은 그 아이러니한 상황에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사로나가 얼마나 고민이 많았을지 여럼풋하게 짐작이 됐다. 죽었던 어머니가 살아 돌아왔다. 마치 죽지 않았던 것처럼. 그런데, 이런 일이 왜 일어났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건 상상만으로도 정말 사람을 환장하게 만드는 일일 것이다.

[아이라는 전혀 모르는 눈치라고?]

[응. 마치 예전부터 계속 어머니가 계셨던 것처럼 행동해. 그 덕분인지, 예전보다 훨씬 활발하긴 하지만....]

사로나가 말을 흐렸다. 태상은 그녀가 무얼 걱정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아이라가 이 일로 상처를 받을까 걱정이 되는 것일 거다.

[내가 한 번 보고 싶은데, 초대 해주겠어?]

[여길 온다고?]

사로나는 잠시 당황했다.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긴 했지만 그가 그렇게까지 해줄 것이라 생각 못한 것이다. 더욱이 그는 지금 결혼식 때문에 무척이나 바쁘지 않은가. 임신을 한 아내 때문에 결혼식을 최대한 빨리 치르기로 해서 바쁘다고 말했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는 사로나였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러지 말고, 내가 한국으로 갈게. 어차피 네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했으니까.]

만약 저 가짜 엄마를 만든 이가 있다면, 그녀가 움직이면 그 녀석도 따라 올 것이다. 전혀 생각지 못한 상황을 만들면 당황해서 무언가 다른 움직임을 보일지도 모르고 말이다.

[내가 움직이면 이 일을 계획한 놈도 움직일 거야. 그러니 네가 오는 것보다 내가 움직이는 게 나을 것 같아. 아이라도 널 많이 보고 싶어 하고.]

[그럼 편하게 올 수 있게 저번처럼 전용기를 보내줄게.]

태상은 그녀의 말을 거절하지 않았다.

바쁘다는 건 솔직히 진짜였다. 더욱이 임신을 한 그녀를 두고, 언제 해결 될지 모르는 일을 하러 프랑스로 가는 것이 꺼려지기도 했다.

그녀가 자신을 위해 배려해 주는 것임을 알았던 태상은 그 배려를 거절하지 않았다.

태상의 추진력은 빨랐다.

그리고 강회장에게 전용기를 빌려달라 부탁하기 위해 전화를 하는 대신, 그를 직접 찾아가기로 했다.

금방이라도 이명진이 있는 곳을 알려 줄 거라 생각했던 강회장은 지금까지 그를 찾아내지 못했다.  아예 멍청한 놈은 아닌지, 카드를 쓰거나 핸드폰을 켜는 등 위치추적이 가능한 짓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태상이 천사 계약자라는 것을 알았다면 송이를 습격해서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명진이 태상에게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가 자신의 능력을 너무 과신했다는 점이었다.

그것만 아니었다면 이명진도 그리 멍청한 놈은 아닌 듯 했다. 철저히 숨어야 할 때, 숨는 방법을 알고 있으니 말이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태상은 놈을 찾으려면 다른 방법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놈은 마계에서 미션을 하면서 점수로 돈을 충당할 수 있다. 그러니 카드를 쓰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다면 그런 것들로 위치를 알아낼 순 없을 것이다.

“오랜만이야 할아버지.”

태상이 강회장의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소파에 털썩 앉았다. 강회장이 끌끌 웃으며 자신을 수행하는 비서에게 나가보라 손짓했다.

“어쩐 일로 이렇게 찾아 온 게냐. 내 전화도 요즘 피했으면서.”

강회장이 태상에게 들어와 살라고 하는 바람에 그의 전화를 받지 않았었다. 강회장의 강요가 귀찮았기 때문이다.

“어련히 알아서 할까. 그리고 들어가려면 집으로 들어가야지, 왜 여기로 오래?”

“왜 뻔히 알면서 다시 한 번 말하게 하는 거냐.”

강회장의 말에 태상이 능글맞게 웃었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받아왔던 게 후계자 수업들이야. 그런데 본격적인 후계자 수업을 받으라고 하니까 어이가 없는 거지. 나한테 도대체 뭘 얼마나 가르칠 셈이야? 아직도 가르칠 게 남았어?”

태상은 지금 당장 회사를 경영해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더욱이 실제로도 그는 몸이 바뀌기 전까지 회사에 다니며 일을 하기도 했고 말이다.

“그런 것들이랑 같은 수업이 아니다 이놈아.”

"그럼 도대체 할아버지가 하겠다는 수업이 뭔데?"

============================ 작품 후기 ============================

선작 3천이 넘어갔습니다.

감사합니다.

약속대로 22일 오후쯤 한 편 더 들고 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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