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자-99화 (99/251)

00099  아이라  =========================================================================

어두운 공간에 서 있던 아이라는 갑자기 조명이 켜지듯 환해지는 주변 때문에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감은 사이로 거센 바람이 불었다. 워낙 강한 바람이었던 지라 아이라는 그것이 잔잔해질 때까지 그대로 계속해서 눈을 감고 기다려야 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그녀는 바람이 잠잠해졌음에도 쉬이 눈을 뜨지 못했다. 두려움이 그녀를 제압했기 때문이다. 그때, 무언가 가볍고 보드라운 무언가가 그녀의 코를 스쳐 지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아이라는 그 느낌 이후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겨우겨우 눈을 슬며시 떠보았다.

“악!”

무슨 일이 일어났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면서, 마음을 다잡아놓고도 진짜 이상한 게 눈 앞에 떡하니 있자 놀란 아이라다. 그녀는 눈을 뜨자마자 엉덩이를 바닥에 크게 찧으며 넘어졌다.

아이라는 눈앞에 있는 당황스러운 물체를 응시했다. 엉덩이가 아픈 걸 느낄 세도 없었다. 그녀는 멍하니 자신을 놀래게 만든 그것을 향해 물었다.

“누, 누구세요?”

아이라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그러나 그녀가 놀라고, 무서워하는 것과는 달리 상대방은 그녀를 향해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아이라는 자신의 눈을 비비며 눈 앞에 떡하니 있는 것이 진짜인지 의심했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코끝을 간질였던 것은 새하얀 깃털이었다. 그녀는 이 깃털이 새의 것이 아님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는 그녀가 놀라는 것을 이해한다는 듯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놀라지 마십시오. 전 당신을 헤치기 위해 온 것이 아닙니다.]

"누구세요..?"

아이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그녀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저희를 본 인간들은 '천사'라고 부르더군요.]

“천...사...?”

아이라의 시야에 그의 등 뒤에 달린 흰색 날개가 보였다. 확실히 저 날개는, 그리고 아이라의 코끝을 간질였던 깃털은 천사의 것이라 해도 무리가 없었다. 저렇게 아름답고 고운 날개를 가진 이가 천사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아이라는 천사라는 말에 조금 경계심을 풀었다. 아무래도 천사라는 단어가 주는 이미지가 있기에 그랬다.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전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 찾아 온 것입니다.]

"네? 도움이요?"

아이라는 도대체 자신이 천사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궁금했다. 지금까지 아이라는 계속해서 병을 앓느라 유일한 가족인 언니에게 도움하나 주지 못했다. 차라리 자신이 없었다면 언니는 지금처럼 혼자서 낑낑대며 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언니는 얼굴도 예쁘고, 생활력도 강했다. 씩씩했고 다정했다.

그런 완벽한 언니가 지금까지 남자친구 하나 만들지 못하고 있는 건 모두 자신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몸이 나아서 예전보단 덜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아이라는 자신이 사로나에게 큰 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쓸모없는 자신이 과연 천사에게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아이라는 호기심에 그에게 물었다.

“제가 도대체 무슨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건가요?”

천사는 그녀의 질문을 굉장히 기꺼워했다.

[저희들은 악마와 오랜 세월 서로를 죽고 죽이는 전쟁을 해왔습니다.]

“전쟁...?”

아이라는 생각지 못한 전쟁이라는 단어에 당황했다. 아이라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천사라는 존재가 있으니 악마라는 존재가 있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흥미를 보이는 것 같자 천사는 안도했다. 그는 그녀에게 옛날이야기를 해주듯 말했다.

[오랜 전쟁은 천사와 악마 둘 모두에게 비극적인 일이었습니다. 저흰 서로를 처참하게 망가트렸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그 전쟁의 결과는 지금까지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어쩜...안타까워라.."

아이라는 천사의 말에 굉장히 안타깝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그렇게 오랫동안 싸웠다면서 왜 결과가 나질 않았을까?

[저희들은 이 전쟁을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아이라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도움? 내 도움이라고?

아이라는 또 다시 천사가 생각지 못한 당황스러운 말을 하자 황급히 말했다.

"정말 제 도움이 필요하신 건가요? 다른 사람을 착각해서 찾아 오신 게 아니고요?”

[착각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라님이 맞습니다. 저희들은 다른 이가 아닌 아이라님의 힘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천사가 자신의 이름을 정확히 얘기하자 아이라가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몸도 약하고, 아무 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저런 어마어마한 부탁을 받고 책임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제가 어떻게 천사분들이 끝내지 못한 전쟁을 끝낼 수 있겠어요. 전 못해요. 모르셔서 그렇지 전 어릴 적부터 계속 병을 앓았어요. 요즘엔 건강해져서 그나마 병원에 입원해 있지는 않지만, 몇 년전에는 계속 병원에서 살았었고요.”

아이라는 자신의 상황을 고백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이렇게 자신을 찾아와준 건 무척이나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녀가 아무리 애를 쓴다 해도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쟁이라니, 그걸 자신이 어떻게 끝낸단 말인가.

몸이 튼튼한 것도 아니었고, 머리가 좋지도 않았다. 자신감이 없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아이라에게 천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라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아니에요. 진짜 전 못한다니까요? 제가 그런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천사는 그녀를 좀 더 설득하기 위해 말했다. 그는 아이라에게 소원을 이야기했다.

우리들을 도와주는 대가로 무엇이든 원하는 소원을 이룰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아이라는 소원은 감히 생각도 해보지 못한 거였다. 그런 걸 받으면 아이라는 부담스러워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소원이라뇨! 그런 것까지 받으면 전 분명 나중에 천사님을 실망시킬 거에요. 전 정말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는 애라고요.”

천사는 이토록 자신감이 없는 인간은 처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겉으로 보는 그녀는 여전히 자애로웠다.

[아이라님은 절대 쓸모없는 분이 아니십니다. 저희들을 위해 해주실 수 있는 일들이 아주 많으실 겁니다. 부디 저의 청을 외면하지 말아주십시오.]

천사의 간곡한 말에 아이라가 끄응...하고 신음을 흘렸다.

“저기...혹시 된다면 언니한테 물어보고 와도 될까요?”

[예?]

천사가 아이라의 말에 당황했다. 지금 이 상황에 그녀의 언니가 왜 나온단 말인가. 천사는 최대한 당황한 티를 내지 않고 말했다.

[이곳은 아이라님이 계시는 인간계가 아닙니다. 지금 아이라님은 영혼 상태로 저와 만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해서 이곳에선 다른 분을 만나실 수 없습니다.]

“에엣!”

아이라는 몰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가 영혼이라고요? 그냥 내 몸인데..."

아이라가 자신의 몸을 더듬어봤지만 달라진 것이 없어보였다.

"그럼 지금 당장 꼭 정해야 한다는 건가요?"

[안타깝게도 전 아이라님을 만나기 위해 많은 힘을 써야 했습니다. 제 청을 허락해주지 않으신다면 두 번의 만남은 불가능할 듯 싶습니다.]

천사의 말에 아이라가 발을 동동 굴렀다.

‘어떡하지? 도와주고 싶긴 한데...내가 도대체 뭘 도와줄 수 있겠어...그리고 언니가 힘든 거 하면 혼내는데....’

그치만 천사잖아!

아이라는 지금 이 순간이 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느새 진지하게 고민을 하고 있었다. 천사는 아이라가 무슨 생각을 저리도 곰곰이 하는지 몰라 괜스레 날개를 펄럭였다.

생각을 정리한 아이라가 천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기...제가 도대체 뭘 할 수 있는지 여쭤 봐도 될까요?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는지 궁금해서요.”

[저희들은 아이라님이 갖고 계신 고유의 능력을 깨울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아이라님은 그 능력을 통해 저희들을 도와 악마와 싸워주시면 됩니다.]

“네에?! 싸워요? 막 서로 때리고 그러는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런 건 할 자신이 없는 아이라였다. 하지만 천사는 매정하게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다는 말을 내뱉었다. 아이라는 더 이상 고민 할 필요도 없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벌레 한 마리도 못 죽이는 아이다. 왜냐면, 죽음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으니까.

평생을 죽음과 사투하며 살았던 그녀는 그런 일은 절대 못했다.

"정말 죄송해요. 최대한 도와드리고 싶었는데, 그런 일은 제가 할 수 없는 일이에요."

천사는 그녀가 계속해서 거절을 하자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저희들을 도와주신다면 아이라님께서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이뤄지도록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갖고 싶은 것이나 원하는 것이 없었습니까? 그걸 말씀해주신다면 제가 그걸 가질 수 있똘고 도와드리겠습니다.]

“제가 갖고 싶은 거요?”

아이라는 천사의 말에 고민에 빠졌다. 내가 갖고 싶은 거? 내가 원하는 거?

그런 거라면 딱 한 가지 분명한 게 있었다. 바로 사로나, 자신의 언니가 행복해지는 것이다. 더 이상 자신 때문에 불행한 삶을 사는 건 싫었다.

“제가 바라는 건 저희 언니가 행복하게 사는 거에요."

아이라의 소원을 들은 천사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죄송하지만 그런 두루뭉술한 소원은 들어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좀 더 구체적인 소원이 없으십니까?]

“우움....구체적으로요?”

아이라가 고민스러워했다.

“언니가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까요? 전 잘 모르겠어요.”

[저희들은 돈, 명예, 사랑까지 모두 다 이뤄드릴 수 있습니다. 좀 더 다양하게 생각하신다면 좋은 결과를 얻으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아이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리곤 잠시 생각 하다가 아주 조심스럽게 천사에게 물었다.

“혹시....혹시요...”

[예, 어려워하지 마시고, 말씀하십시오.]

“엄마를 되살려 주실 수도 있나요? 정말 모든 다 들어줄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엄마도 살려줄 수 있는 거죠?”

아이라의 눈동자에 눈물이 서렸다. 어느새 그녀는 소원이라는 것에 꽂혀 자신이 그 소원의 대가로 무슨 일들을 해야 하는지 모두 잊고 있었다.

엄마를 되살릴 수만 있다면, 아이라도 사로나도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지금의 아이라는 아프지 않았고, 사로나는 무슨 일을 하는지 자세히 모르겠으나 전보다 훨씬 풍족한 삶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이제 엄마만 있으면....지금 그녀들의 곁에 엄마만 나타난다면, 아이라는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든 것이다.

천사는 그녀의 소원이 매우 안타까웠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아이라님의 소원을 들어드리겠습니다.]

아이라는 너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해달라고 말은 했지만 솔직히 가능 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말 그게 가능한가요??”

[물론입니다.]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천사의 유혹은 강했다. 아예 못한다고 고개를 저어대던 그녀를 이렇게 고민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스스로가 무기를 들고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는 것이 다시 그녀의 머릿속을 채웠다.

아이라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치만 전 누군가를 죽일 자신이 없어요. 절대 못할 거에요. 제 소원을 들어 주셨다가 나중에 후회하실지도 몰라요."

하지 못하는 일을 시켜봤자 좋은 결과가 나오진 않을 것이다. 천사도 그것을 잘 알았다. 하지만 그는 걱정하지 않았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들은 아이라님께서 도와주시고 싶다는 마음만 가져주시는 걸로도 큰 도움이 됩니다.]

천사의 다독이는 말에 아이라의 마음이 계속해서 흔들렸다.

"...정말 그걸로 되는 건가요?"

[아이라님의 소원을 들어드리겠습니다.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

천사는 그녀가 확답을 내려주길 끈질기게 기다렸다.

어차피 이곳에서의 시간은 자유롭다. 그리고 결국 그녀가 소원에 대한 욕망을 뿌리치지 못 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니 이 기다림이 그다지 지루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천사는 아이라의 입에서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들었다.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천사는 자신의 힘을 사용했다. 그의 몸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아이라가 그 빛을 견뎌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리고 잠시후, 천사는 아이라에게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의 소원은 이루어졌습니다.]

아이라는 주먹을 힘주어 꽉 쥐었다.

"...라..나...."

"으음......"

아이라는 몸을 뒤척였다.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흔들며 깨우고 있었다. 아이라는 잠시 그럴 리가 없는데...하고 생각했다. 그녀의 언니는 지금쯤 일을 하러 나갔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벌써 아침인 걸까?

그러고보니 눈을 감고 있는데도 주변이 환했다.

여전히 눈을 뜨기 힘들정도로 몸이 피곤했지만, 깨우는 손길이 어쩐지 따스해 사로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라가 천천히 잠에서 깨어나며 눈을 떴다. 잘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라, 일어나야지?"

"....?"

아이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자신의 눈을 비볐다.

"어서 일어나렴. 이제 아침이야."

아이라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눈을 깜빡깜빡거리며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오랜 기억 속의 여자를 응시했다.

"...엄..마?"

아이라는 그토록 부르고 싶었던 말을 눈물과 함께 토해냈다.

있을 수 없는 기적이, 그녀에게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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