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자-98화 (98/251)

00098  여왕  =========================================================================

강회장이 막무가내로 우기기 시작하자, 아무리 태상이라 해도 당해낼 수가 없었다. 대신 그는 강회장에게 시간을 미뤄달라고 했다. 송이와의 일을 아직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갈 때 가더라도 이 일은 해결하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임송이.”

태상이 송이를 불렀다. 그녀는 그때 이후로 그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아 그를 속상하게 만들었다.

태상은 모든 준비가 끝난 오늘이야 말로 이 일을 해결할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대답은 하면서도 시선은 마주치지 않는 송이의 앞에 걸어가 그녀의 손목을 강하게 붙잡았다.

“....왜 그래?”

“나랑 갈 곳이 있어. 옷 갈아 입고 나와.”

송이는 싫다며 거절하기 위해 고개를 저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와 가고 싶은 곳이 없었다. 하지만 태상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기에 송이는 절로 몸이 움츠려졌다. 그가 도대체 어디를 갈지, 그리고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할지 겁이 났다.

“싫어. 안 갈래.”

가지 않겠다는 송이의 말을 태상이 깔끔히 무시했다.

“따라오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데려 갈 거다. 그러니까 순순히 따라와.”

태상의 살벌한 눈빛에 송이가 속수무책으로 알겠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한다면 진짜 하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송이는 드디어 올 게 왔구나 하는 생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차에 있을 테니 나오라며 먼저 집을 나섰다.

혼자 남겨진 송이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아직 배가 나오지 않은 자신의 배를 한동안 응시했다. 그녀의 얼굴에 짙은 어둠이 내려 앉아 있었다.

한편, 태상은 아파트를 내려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바로 '혜연'이었다.

"준비 다 됐어?"

[네! 이제 오시기만 하면 돼요!]

혜연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하이톤이었다. 이벤트의 주인공도 아닌데, 그녀가 마치 주인공처럼 들떠보였다. 태상은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긴장이 되는 건지 모르겠다 생각하며 알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송이가 내려오자 태상이 그녀를 데리고 이동했다. 그녀는 태상에게 어디로 가는지 목적지를 묻지 않았다.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만약 법원이라던지, 변호사를 만나러 간다고 할까봐 그랬다.

물론 태상도 그녀가 물었다 한들, 알려줄 생각이 없었다.

미리 눈치 채고 시작하는 이벤트가 얼마나 재미없겠는가. 태상은 자신의 생애 첫 이벤트를 망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는 오랫동안 차를 몰지 않았다. 일부러 가까운 곳에 준비시켜두었다. 덕분에 차는 금방 멈춰 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이의 얼굴은 급체라도 한 것 마냥 창백했다. 태상은 차를 주차하고, 보조석 차문을 열어 그녀를 밖으로 나오도록 했다.

“가자.”

태상이 내려 준 곳은 건물 안 주차장이었기에, 이 건물에 무엇이 있는지 송이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녀는 이미 자신이 온 곳이 변호사 사무실일 거라 100% 확신하고 있었다.

그가 변하는 건 없다고 했지만, 그 말을 쉬이 믿을 수가 없었다. 솔직히 지금 송이는 그가 자신을 그런 곳에 데려가도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지금 그녀는 모든 것에 의욕을 잃은 상태였다. 그녀 스스로가 자신의 마음을 확신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송이의 첫사랑이 명진이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마지막까지 계속 될 거라 생각했다. 결혼까지 했으니 그녀는 그 생각을 확신했고,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도중에 자신의 남편이 명진이 아니라 다른 남자로 바뀌어버렸다.

이건 절대 일반적인 일이 아니었으며, 굉장히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지 모르겠으나, 송이는 그 원인까지 따질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아직도 사실 명진이 태상이 아니라 장난을 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곤 하니 말이다.

태상과 명진의 몸이 바뀐 것은 그녀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고, 그녀의 마음은 이상할 정도로 그에게 물 흐르듯 빠져들었다. 그녀는 명진을 사랑한 아니, 그보다 더 깊이 태상을 사랑한 자신 스스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명진에서 태상으로 바뀌었을 때, 그 변화를 정확히 인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랑이 좋아 마냥 행복해했던 자신이다.

그녀는 사랑이 변한다는 걸 믿지 않았다. 사랑하면 끝까지 사랑해야 한다는 게 송이의 단호한 가치관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그 가치관 전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바람에 모든 의욕을 잃은 상태였고 말이다. 그와 헤어져야 하는 게 맞는 건지, 아니면 그와 절대 헤어져선 안 되는 건지 결정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송이는 태상에게 선택을 맡겼다.

그가 자신에게 무언가 말을 해주길 바랐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너무 골치 아픈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상이 무언가를 결정해주길 기다리면서 데면데면하게 그를 대했다. 그런데, 태상도 그녀가 하는 것처럼 그녀를 데면데면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헤어지자는 말도, 이대로 함께 계속 살자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송이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변하는 것 없이 예전과 마찬가지로 지내자고 해놓고 태상 스스로가 그녀를 예전처럼 대해주지 않았다.

그러니 송이는 결론이 날 때까지 자신의 태도를 계속 고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송이는 자신의 손목을 잡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태상을 가라앉은 눈동자로 바라봤다.

이 남자가 이명진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안다.

하지만....하지만....

만약 이대로 헤어진다면 뱃속의 아이는 어떻게 한단 말인가.

아빠 없는 아이로 키울 생각을 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그녀는 고아다. 부모가 없는 설움이 얼마나 큰지 아주 잘 알았다. 그래서 자신의 아이까지 그렇게 키우고 싶지 않았다.

송이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 번개는 그녀의 몸 전체를 부르르 떨게 마늗ㄹ었다.

아이를 위해서라도 자신이 이렇게 가만히, 의욕없이 그를 놓칠 순 없단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녀는 이걸 단순히 사랑이니 뭐니 하는 감정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가 이렇게 나올 지도 모른다 생각했으면서, 정작 앞에 닥치니 정신이 번쩍 뜨였다. 송이가 그 자리에서 우뚝 섰다.

그녀가 순순히 따라왔기에 손에 그리 힘을 주지 않았던 태상은 갑자기 걸음을 멈춘 송이 때문에 뒤를 돌아봤다.

“왜 그래?”

“........”

송이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천천히 시선을 올려 태상과 눈을 마주했다. 아주 오랜만에 마주치는 서로의 시선이었다.

“안 돼. 할 수 없어.”

“뭐?”

태상은 그녀가 뭘 할 수 없다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송이는 그의 의아한 빛을 띈 눈동자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이혼 안 한다고.”

“....뭐라고?”

태상은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자신이 뭘 하기 위해 그녀를 끌고 왔는지 알면 절대 저런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나 이혼 못해. 아이를 위해서라도 안 되겠어. 난 아이도 낳을 거고, 널 내 남편으로 계속 살게 할 거야. 네가 이명진이든 강태상이든 몰라! 난 모른다고. 그냥 이렇게라도 살거야. 무슨 짓을 해도 난 이혼 절대 안 해. 못 해!”

송이는 차라리 자신의 배를 째라는 듯 뻔뻔하게 나가기로 결심했다. 태상의 손에 잡혀 있던 자신의 손목을 송이가 빼냈다.

“안 갈 거야.”

송이의 눈동자에 독기가 서렸다.

저 남자가 이명진이든 다른 남자이든 무슨 상관이랴.

자신의 뱃속엔 아이가 있다. 아빠 없는 아이로 키울 바에야 차라리 함께 죽는 게 나았다. 지금 이것보다 훨씬 더 굴욕적이고 힘든 나날을 보내왔던 송이다.

사랑? 그런 걸 생각하기엔 지금 자신의 처지가 좋지 않았다. 거친 삶을 살아오며 길러왔던 센서 같은 것이 그녀의 머리를 쿡쿡 찌르며 경고하고 있었다. 이대로 나약하게 무너지지 말라고, 그녀를 설득한 것이다.

송이는 이렇게 정신을 놓을 만큼 자신은 나약하지 않다고 계속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야 지금 이 순간을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송이를 빤히 바라보는 태상의 눈동자가 무척이나 지긋했다. 송이는 아주 오랜만에 마주친 그의 눈동자가 무척이나 부담스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절대 피하지 않았다. 눈을 피하는 건 자신이 졌다고 시인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풋.”

그때, 태상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그와 반대로 송이의 얼굴은 찌푸려졌다.

지금 이 상황에서 웃어? 지금 이게 웃을 일이야?!

차마 밖으로 내뱉지 못한 말이 입 안을 맴돌았다. 하지만 태상은 지금 상황이 웃길 수밖에 없었다. 지금 보니 괜한 짓을 한 것 같긴 하지만 이왕 준비했으니 그냥 쭉 밀고 나가야겠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래, 알았으니까 이리와.”

태상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뭘 알았는데?”

송이는 그의 손을 잡지 않았다. 대신 그를 바라보며 당돌하게 질문했다. 태상은 그녀의 질문을 귀엽다는 듯 받아주었다.

“이혼 못 한다며. 죽어도 못 한다는 기세던데 맞잖아. 그거 알겠다고.”

“....알겠으면 앞으로 뭘 어떻게 할 건데?”

송이는 여전히 자신에게로 내밀어진 손을 아주 불손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마치 저 손이 자신에게 사기를 치려고 내밀어진 것이라 생각하는 듯 했다. 태상은 저렇게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송이가 무척 귀엽게 느껴졌다.

저 모든 게 자신과 헤어지기 싫어 저러는 것 아닌가.

그동안 그녀와 데면하게 지냈던 것이 후회가 되는 태상이었다.

좀 더 먼저 손을 뻗었더라면 지금 이렇게 지내지 않았을 지도 몰랐다. 굳이 이벤트니 뭐니 그런 걸 준비할 필요도 없었던 것 같고 말이다.

어떤 여자를 이렇게 깊게 생각해 본 건 처음이었던지라 태상도 무척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둘 모두가 한 마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풀지 못했던 거였다.

태상은 더 이상 이런 오해를 지속하기 싫었다. 그는 뻗은 자신의 손을 잡지 않는 송이를 억지로 끌어당겼다. 송이가 가지 않으려 발버둥쳤으나 소용없었다. 그녀가 태상을 당해낼 수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열어.”

문 앞에 도달하자 태상은 그녀에게 문을 열도록 시켰다.

송이가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이 문을 열면 그와 반드시 헤어져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태상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려 잡고 말했다.

“변하는 게 없다고 했던 거, 사실 거짓말이었어.”

“.......”

송이가 주먹을 꼬옥 쥐었다.

“앞으로 변할 거야.”

아주 많이.

너와 내가 진짜 결혼을 하게 될 테니까.

태상은 뒷말을 숨겼다. 그리고 용기내지 못하는 그녀를 위해 자신이 문을 열어주었다. 송이가 눈을 질끈 감고 앞을 보기 두려워했다. 태상은 그녀의 귓가에 입을 가까이 가져다대고 속삭였다.

“눈을 떠봐, 송이야.”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 때문이었을까?

태상이 어떤 설명도 하지 않았는데도 송이는 천천히 눈을 떴다. 이 눈을 뜨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거역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앞에 펼쳐진 광경은 놀라웠다.

아름다운 촛불들이, 그녀를 반겨주고 있었으니 말이다.

송이는 너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밝혀진 초들이 그녀에게 길을 안내 하듯 길을 만들며 이어져 있었다. 송이는 입을 살짝 벌린 채로 멍한 표정을 짓고 초가 안내해주는 길을 걸었다.

태상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녀의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주변은 알록달록한 풍선이 천장을 수놓고 있었고, 현수막엔 임신을 축하한다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초가 이어준 길 끝에 선 송이는 끝내 펑펑 눈물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현수막에는 [사랑한다. 임송이.]라는 굉장히 오글거리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저건 그가 준비하라고 시킨 게 아니었다. 분명 혜연의 독단적인 짓일 것이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아름다운 순백의 웨딩드레스가 마네킹에 입혀진 채로 그녀를 반기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의 몸도 손보다 나을 것이 없었고 말이다.

뒤늦게 느긋하게 도착한 태상이 그녀의 어깨를 잡아 자신에게로 돌렸다. 눈물이 가득 담긴 눈동자가 태상을 응시했다. 태상은 챙겨 둔 꽃을 그녀에게 안기며 말했다.

“이제 우리 아이가 태어날 거고, 넌 엄마가 되고 난 아빠가 될 거야. 많은 게 변할 테지. 그러니까 우리 함께 그 변화를 잘 이겨내면서 살아보자.”

송이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하는데 목소리가 나오지가 않았다. 그녀는 혹여 그가 거절의 의미로 생각할까봐 서럽게 눈물을 흘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태상은 그녀를 꼭 끌어안아주었다.

“배가 불기 전에 결혼식을 올려야 저 드레스가 맞겠지?”

태상의 말에 송이는 눈물을 뚝 그쳤다.

“..흑...훌쩍...결혼식이라니?”

“당연한 거 아냐? 원래 남자랑 여자랑 같이 살려면 결혼식 올리는 거야. 모르는 건 아니지?”

“....너랑나랑 결혼식을 하겠다고?”

“어.”

결혼식.......

송이는 웨딩드레스를 봤으면서도 자신이 저 드레스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태상이 이렇게 일깨워줘서야 깨달았다. 그만큼 정신이 없었다.

“최대한 빠른 시일내로 준비해달라고 했으니까, 날짜 잡히면 얘기해줄게.”

송이는 아직 결혼식을 올린다는 것을 다 받아들이지도 못한 상황인데도 밀어 붙이는 태상이었다. 그는 송이가 자신에게 먼저 이혼을 하지 않겠다고 말해준 것이 무척이나 흡족했다.

태상은 자신의 여자로 송이를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