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0 여왕 =========================================================================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가 않았다.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야 하는 건가? 아니면...왜 진작 말하지 않았냐며 화를 내야 하는 걸까?
송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녀는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송이는 두 손바닥에 자신의 얼굴을 묻고 침묵했다. 태상은 그녀가 허튼 생각하지 않도록 단호하게 말했다.
“이 사실을 알았다 해도 바뀌는 건 없어.”
말도 안 되는 소리. 바뀌는 게 왜 없는가. 지금 그녀가 알게 된 진실은 그들 관계를 아주 많이 바꾸어 놓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왜 그랬어?”
송이가 깨어지지 않을 것 같았던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태상은 그녀가 무엇을 이야기 하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뭘 얘기 하는지 모르겠어.”
“나한테 말이야.”
왜 갑자기 그의 행동이 바뀌었는지 모든 게 이해가 됐다.
명진이 바뀐 게 아니다.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버려 그녀에게 잘 해준 거였다.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그가 자신에게 해주었던, 그리고 했었던 행동들이다. 태상은 진짜 그녀의 남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진짜 남편인 명진 보다 훨씬 그녀를 잘 대해주었다.
그녀가 느꼈던 사랑받는 느낌을 명진이 아니라 그에게서 느꼈다는 게 그녀를 무척 혼란스럽게 했다. 자신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명진의 아내였기에 그녀는 사과를 해야 한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그에게 사과를 하고 싶지 않았다.
명진도 원망스러웠고, 자신을 기만한 태상도 미웠다.
그녀가 명진을 대신해 그에게 사과를 하지 않은 건 무척 잘한 일이었다. 만약 그랬다면 태상은 송이에게 화를 냈을지도 모른다. 그는 송이가 명진을 대신해 그에게 사과를 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여자다. 그러니 이명진 때문에 그에게 사과하는 건 그녀야 해야 할 일이 아니었다.
“난 네 아내가 아니야. 너도 그걸 알고 있었잖아! 그런데 왜 나랑 잤니? 명진이가 네 몸을 빼앗아서 나한테 대신 복수라도 한 거니? 내가 널 사랑하고, 걱정하는 게 재밌었어?”
송이는 자신이 태상에게 놀아났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자신이 그와 함께 침대를 뒹굴고, 웃고, 이야기를 할 때마다 태상은 그녀를 증오하고 있었을 것이다. 끔찍했다. 자신의 진심이 그렇게 짓밟히고 있었다는 게 그녀를 너무나도 슬프게 만들었다.
태상이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고 그녀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내가 말 했잖아. 변하는 건 없다고.”
“변하는 게 왜 없어! 모든 게 다 변할 거야! 넌 이명진이 아니잖아! 날 사랑한 게 아니었고 우리, 우리 아이...내 아이는...!”
송이가 자신의 배 위에 손을 올렸다.
이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하지?
명진의 몸을 하고 있으니 명진의 아이인 걸까 아니면 그 안에는 강태상이라는 낯선 남자가 들어 있으니 강태상의 아이인 걸까.
송이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손의 떨림이 그녀의 온 몸에 전파라도 된 모양이었다. 그녀의 어깨에 올린 손을 통해 그녀의 떨림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떡하지? 이제 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해?
송이는 더 이상 누군가를 원망할 힘도 나질 않았다. 태상이 그녀의 턱을 잡고 자신과 시선을 마주하게 만들었다. 송이의 갈 곳을 잃은 눈동자가 태상을 응시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
“막막하고, 힘이 쭉 빠지고 아무 것도 생각이 나질 않아?”
태상은 그녀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송이의 고개가 미미하지만 분명하게 끄덕여졌다. 그녀의 답에 만족한 태상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럼 그 모든 걸 내게 맡겨. 내가 널 대신에 생각하고, 행동 할 테니까. 내가 시키는 데로 살아.”
“....어떻게?”
송이가 힘없이 물었다. 그가 어떤 말을 해도 솔직히 머릿속에 들어오진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태상은 신기하게도 그런 그녀의 머릿속에 정확히 박히는 말을 내뱉었다.
“내 옆에서 살아. 이명진이니 강태상이니 그런 거 상관 않고, 내 옆이 네 자리야. 알겠어?”
“...네 옆자리? 나보고 계속 너랑 함께 살라는 거야?”
송이는 당연히 태상이 자신을 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내 아이를 낳고, 내 아내가 돼. 바뀌는 건 없어. 내가 이명진이 아니라 강태상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밖엔.”
“.....”
그래도 되는 걸까?
그럼 명진이는 어떡하고?
송이의 머릿속이 갈대처럼 출렁출렁 흔들렸다.
“이명진은 널 버렸어. 너 스스로도 그걸 인정하고 있잖아.”
그가 또 다시 아픈 말을 스스럼없이 내뱉는다. 송이는 그의 말을 듣자 그러고 보니 그렇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명진이 신경 쓰이는 게 아니라 그동안 그가 자신에게 해주었고, 사랑을 받는다 느꼈던 모든 것들이 거짓이라는 것에 힘겨워했던 송이다.
도대체 자신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싶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자 태상이 그녀의 행동을 자신의 말에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알아듣고 미간을 찌푸렸다.
“넌 아직도 그놈을 사랑해?”
사랑?
사랑한다. 아니, 사랑했다. 바뀐 그의 모습을 보며 더욱 더 그를 사랑하게 됐다.
송이는 자신이 명진을 사랑하는 건지, 강태상을 사랑하는 건지 정확히 구분할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 생각했다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니 당연하게도 이런 혼란이 들 수밖에 없었다.
“모르겠어.”
결국 송이가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았다. 태상은 그럴 수 있다며 송이를 다독였다.
“그럴 수 있어. 그동안 넌 나를 이명진으로 알았으니까. 네가 아직도 그놈을 사랑한다고 해도 난 할 말이 없지. 근데, 이제부턴 그렇지 않을 거야. 지금부터 너는 날 사랑해야 해. 그놈은 잊고, 날 똑바로 봐. 네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네 뱃속에 있는 아이의 아빠가 누구인지 똑똑히 알아.”
태상은 그녀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넌 이제부터 날 사랑하는 거야. 강태상이라는 남자를.”
송이는 끝끝내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태상은 그녀가 답을 하지 않은 것이 곧 대답을 한 것이라 생각했다.
송이는 늘 그렇게 자신에게 져주니까 말이다.
태상은 세연이 준비한 식사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 대신 세연에게 차 한 대를 빌려 집으로 향했다.
태상은 송이의 손을 꼭 잡고 집으로 올라갔다. 태상은 송이가 자신의 손을 허락한 건지, 거부한 건지 확실히 알지 못했다. 그녀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그의 손길을 받아들이긴 했으나, 그를 절대 쳐다 보지 않았다. 그저 그가 하는 데로, 끌려가고 있을 뿐이라는 걸 느끼게 만들었다.
태상이 그녀를 화장실 앞까지 데려다주고 말했다.
"씻어. 피곤할 거야."
"......."
송이는 역시나 태상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고 말없이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 당장 그녀에게 모든 것을 이해해달라고 할 순 없다. 그걸 알면서도 태상은 송이의 태도가 못내 서운했다. 송이는 이명진에 대한 미련을 끝내 버리지 못할지도 몰랐다.
그는 송이가 이명진이 자신을 배신했다는 것에 신경조차 쓰지 못했다는 걸 알지 못한다. 그랬기에 그의 얼굴은 그리 밝지가 못했다.
진실을 밝혔기에 개운하긴 했으나 솔직히 화가 났다.
그 화는 이명진에 대한 것인지, 자신에 대한 것인지 혹은 송이에 대한 것인지...화가 나고 있는 그도 알지 못했다. 그냥 화가 났다.
태상은 어쩐지 그녀를 사랑하게 만들 자신이 없어졌다.
'도대체 네가 뭐라고....'
세상엔 여자가 많다.
그중 송이보다 더 예쁜 여자도 많을 것이다. 그는 돈이 많았으며, 그 돈을 원하는 예쁜 여자들은 수두룩했다. 그래서 태상은 그동안 여러 여자를 만나며 즐기며 살았다. 그러니 송이가 자신을 선택하지 않아도 자신은 괜찮아야 하는 게 맞았다.
그런데 괜찮지가 않았다.
정말 괜찮지가 않다.
빌어먹게도.
**
소문이 퍼졌다.
신생 길드 하나가 불카누스와 동등한 조건으로 동맹을 맺었다는 다소 황당한 소문이었다. 모두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불카누스 길드가 미치지 않는 이상 그럴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소문에 더해 여러 가지 소문들이 더해졌다.
신생길드 길마가 나이트레드와 청룡무사 반카이 그리고 불카누스의 길마인 베이라와 아주 친하다는 것이다.
그 말까지 들은 사람들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아~ 불카누스가 새로 부길드를 만들었구나. 그러니까 그런 동맹을 맺은 거겠지. 하고 말이다. 소문은 그렇게 진실과 거짓 속을 아슬아슬하게 타며 계약자들 사이에서 퍼지고 있었다.
그렇게 신생길드 T.P와 불카누스의 황당한 동맹 소식은 잘못 된 소문으로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불카누스의 길드에서 대대적으로 계약자들을 모집하기 시작하자 다시 그 소문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불카누스에게 떨어진 미션은 마계를 습격하는 것이었다.
해서 최대한 많은 계약자들이 필요했다. 불카누스 길드원 중 B등급 이상의 계약자들은 모두 참여하기로 했고, 그것에 그치지 않고 다른 길드의 B등급 이상 계약자들까지 모집했다.
대형 길드에서 미션을 공유해주는 일은 아주 아주 드문 케이스다.
이번 미션은 단순히 악마 한 두 명을 잡는 게 아니라 마계에 있을 악마와 악마 계약자들을 죽여야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보호 속에 있을 '여왕'.
그녀를 죽이는 게 최종 목적이었다. 이 미션은 앞에서 계약자들이 최대한 많이 시선을 끌어줘야 가능한 미션이었기에 불카누스 길드가 이례적으로 많은 이들에게 미션을 공유 한 것이다.
계약자들이 그런 사정도 모르고, 미션에 불나방처럼 끼어들기 시작했다. 실력자들이란 실력자들은 모두 다 참가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물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모집해야 하고, 공유를 하겠다 발표하긴 했어도, 모든 B등급 이상의 계약자가 다 참가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불카누스는 분명하게 공유 받을 수 있는 자들의 조건을 ‘동맹 길드에 한하여.’라고 적어두었기 때문이다. 불카누스의 미션을 공유받기 위해 많은 계약자들이 술렁였다. 최대한 연줄을 이용해 이리저리 알아보거나, 혹은 뇌물같은 것을 주어 공유를 받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사실 흔치 않은 일이지만 이렇게 길드에서 미션을 공유하는 일이 있긴 하다.
이렇게 대대적으로 계약자들을 구할 땐, 형식적으로 모두 동맹 길드에 한한다는 조건을 내건다. 그렇다고 진짜 동맹길드 소속 계약자들만 오느냐 하면 당연히 아니었으니. 결국 그 조건은 형식적인 보여주기 식일 뿐이었다.
동맹 길드라 해도 연줄이 닿지 않으면 미션을 공유 받지 못할 수도 있었다. 미션 공유를 받느냐 못 받느냐는 동맹길드 사이라 해도 개인의 차이가 컸다.
대형 길드는 대형 길드끼리 피치 못할 사건이 일어나 척을 지지 않는 이상 대부분 동맹관계를 유지하기 때문에 정말 동맹길드에 한해서만 가능했다면 길드끼리 서로 눈살을 찌푸리는 광경이 일어났을 것이다.
해서 베이라는 각자 알아서 능력이 닿는 데까지 알아서 공유하도록 풀어 놓았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찾도록 만든 것이다.
그런 치열한 경쟁에서, 아무런 힘겨움 없이 직접 베이라가 찾아가 미션 공유를 받은 신생길드 T.P가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불카누스 길드마스터 베이라는 미션을 받고나서 T.P길드 길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녀가 그렇게 했다는 소문은 점점 더 커지며 부풀려졌고, T.P 길드가 사실은 불카누스의 정예부대 길드라는 헛소문까지 돌기 시작했다.
정작 당사자들은 미션을 공유 받은 것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데 말이다.
“그러니까 마계를 습격해서 뭘 어떻게 한다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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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편은 언제? 17분에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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