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자-80화 (80/251)

00080  세연  =========================================================================

어쩐지 입술이 바짝 말라있고, 긴장한 게 눈에 확연히 뛰었다. 태상은 일단 내색하지 않고 맞은편 의자에 앉아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너무 갑자기 연락해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부르신 거죠?”

태상의 돌직구 화법에 세연이 옅게 미소 지었다.

“우선 차부터 시키고 얘기하죠.”

“.........”

세연은 시킨 차가 나올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태상만 빤히 바라봤다. 태상도 딱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고민스러웠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그녀의 소식이 뉴스로, 인터넷으로 널리 퍼졌기에 그가 알고 있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태상은 그런 일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이렇게 돌아다녀도 되는 건지 걱정이 됐다.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덕분에 몸 잘 추스르고 있어요.”

덕분에라...

태상은 그녀의 말이 그저 예의를 차리기 위한 말이라 생각하고 넘겼다.

“경호원은 데리고 다니시는 거죠?”

태상도 한 번 납치를 당한 경험 때문에 성인이 될 때까지 경호원을 달고 다녀야 했었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어요.”

그렇게 대답하는 세연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그녀의 친아들인 태상도 물어보지 않았던 안부를 그가 더 걱정하고, 생각해주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태상은 그녀에게 몸이 괜찮냐는 형식적인 말만 할 뿐 그 이상의 것을 해주지 않았다. 예전의 태상이었다면 먼저 경호원을 고용해서 데려와 그녀를 보호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태상은 그러질 않았다.

“근데, 제게 먼저 연락을 해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공식적으론 자선파티 때 그렇게 헤어지고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그러니 세연은 그에게 저렇게 부드러운 태도를 취할 이유가 없었다.

“저도 제가 먼저 연락하게 될 줄 몰랐네요.”

둘의 관계가 굉장히 복잡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단 둘이서 만나는 건 굉장히 특이하고 이상한 일이긴 했다.

태상이 강회장의 양자로 입적됐으니, 태상은 세연의 남편 남동생이 됐다. 해서 그녀는 태상을 부를 때 자신의 아들로 부를 수가 없었다. 물론 태상은 그녀에게 그런 법적 호칭을 들을 생각이 없었고, 그녀도 그를 그렇게 부를 생각이 없었다.

“오늘 부른 건,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에요.”

“말씀하시죠.”

태상은 뭘 물으려고 하는지 모르겠으나 될 수 있으면 대답을 해줄 생각이었다.

세연은 떨리는지 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왜 저러는 걸까 태상이 고개를 갸웃거리려는 순간, 세연이 드디어 입을 뗐다.

“내가...납치를 당했을 때, 이상한 걸 봤었어요.”

“.......”

태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때 절 구해주는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이 납치범한테 자신을 제 아들이라고 소개 했어요.”

세연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태상은 그녀가 자신의 정체를 눈치 채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 그때, 기절해 있었던 게 아니었다는 걸까?

“......”

태상이 입을 열지 않자, 세연이 계속해서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죠. 그 사람은 제 아들이 아니었으니까요. 근데 저희 아들만 알고 있는 이야기를 자기 얘기처럼 술술 하더라고요. 그건....그건 정말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어요. 그 얘기는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고, 태상이도 그런 얘기를 남에게 할 아이가 아니니까요.”

그녀의 말은 왜 당신이 그 이야기를 알고 있냐는 것을 물어보는 것과 같았다.

태상은 난감해졌다. 사실 그는 세연에게 가장 늦게 상황을 얘기할 생각이었다. 세연이 태상을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알았기에, 가장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갑자기 멀쩡했던 아들이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갔다는 말을 어떻게 쉽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건....”

“아버님께서도 알고 있더군요. 당신이 왜 그런 것들을 알고 있는지 아버님께 여쭤볼 수도 있었지만 가지 않았어요. 당신한테 직접 듣고 싶었어요. 왜 그때 납치범한테 제 아들이라고 소개를 한 거죠?”

세연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그 안에는 태상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와도 들을 수 있다는 각오가 깃들어 있었다. 그래서 강회장을 찾아가지 않고 곧장 태상을 찾아 온 거였을 것이다.

태상은 대충 둘러대서 그녀를 이해시키고 돌려보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다 말씀드리죠.”

세연이 태상의 말에 입술을 꾹 다물었다. 두 주먹을 꽉 쥔 게 여간 각오를 단단히 한 게 아닌 듯 했다.

태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청심환은 먹고 왔어?”

“먹고 왔...네?”

세연이 갑자기 반말을 하는 태상 때문에 표정을 찌푸렸다.

눈앞의 남자가 자신의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걸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긴 하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여전히 세연은 이명진의 몸을 한 태상이 낯설었다. 더욱이 아직 그녀는 그가 자신의 아들임을 확답 받지 못한 상황이지 않은가.

“먹고 왔다고 하니까 말해줄게. 나 엄마 아들 맞아. 이 몸이랑 내 몸이 바뀌어버렸어.”

“......”

세연은 그동안 짐작해왔던 것들을 확신으로 만들어주는 태상의 말에 침을 꿀꺽 삼켰다.

“그, 그걸 내가 믿게 할 수 있는 증거가 있나요?”

“증거라고 치면 할 얘긴 많은데, 굳이 그걸 다 설명해야 내가 누구인지 알 거야? 아니잖아. 이미 눈치 채고 온 거잖아.”

그건 맞았다.

아들의 기억을 갖고 있고, 태상의 성격 또한 고스란히 갖고 있는 이명진이라는 남자가 자신의 아들일지도 아니, 아들이라는 것을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 그래서 이미 그녀는 태상을 대할 때 가면을 쓰고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자신이 미친 거라고 생각했다.

눈앞에 있는 아들이 자신의 아들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눈코입, 모두 자신을 닮은 내 아들 강태상이 맞았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날 리가 없다고, 자신이 납치를 당해 잘못 들은 거라 여기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태상에게 진심으로 웃었다가, 가면을 썼다가 하는 등 계속해서 하루에도 몇 번이고 생각을 바꾸었었다.

“...정말 당신이 제 아들이라는 건가요? 이명진이 아니라 강태상이라고요?”

“솔직히 엄마한테 제일 늦게 얘기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아버지보다 엄마가 더 먼저 알게 됐네.”

만약 아버지한테 자신의 존재가 알려지게 되면 난리가 날 것이다.

갑자기 튀어나온 놈이 회사를 갖겠다고 강회장 옆에 딱 붙어 다니니 환장하지 않고 베기겠는가. 그래서 그에게 먼저 자신의 정체를 알리게 될 거라 생각했던 거였다. 그런데, 의외로 세연이 먼저 눈치를 챈 것이다.

납치라는 뜻하지 않은 일 때문에 말이다.

“그런 게 어딨어요! 그런 일이었으면 나한테 제일 먼저 말했어야죠!”

세연이 화를 냈다.

“날 가장 사랑했으니까, 믿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솔직히 믿기 힘든 얘기기도 하고, 믿고 싶어 하지 않을 것 같기도 했고.”

“.......”

태상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무슨 수를 써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자세히 말해줄 순 없지만, 이명진 그놈이 나랑 자기 몸을 바꿨어. 할아버지한테 들으니 기억을 잃었다고 거짓말을 해서 생활하고 있다고 하던데, 난 똑똑히 다 기억해. 가족들과의 추억들 전부 다."

얘기를 하다 보니 예전 일이 생각났다.

그때, 그는 자신이 또 납치를 당한 걸지도 모른다는 오해를 하고 있었었다. 그런데 거울을 보니 자신의 몸이 아니었다.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그 황당함은 아직도 그의 머릿속에 고스란히 기억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 앞에서 말하고 있는 당신의 몸 주인이 지금 내 아들 몸에 들어와 있다는 거네요?”

세연의 질문에 태상이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

세연이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가 점점 그녀의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태상은 그녀의 얼굴이 붉어지는 게 화가 솟고 있다는 징조임을 잘 알고 있었다. 태상이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소리 지르지 마. 여기 사람들 많아.”

“지금 내가 소리를 지르지 않게 생겼...!”

세연은 말을 하다가 끝을 맺지 못했다. 전혀 다른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는 이에게 익숙함을 느끼는 건 참 미묘한 기분이었다. 태상은 그녀가 화가 났을 때, 이렇게 손을 잡아주며 화를 내지 말라고 말하곤 했었다.

세연은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괜스레 얼굴을 숙였다.

점점 그와 대화를 하고 있을수록 그에게서 느껴지는 익숙함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세연의 갈팡질팡하는 마음을 이해하는지 태상이 화재를 바꾸기 위해 말했다.

“오늘 제대로 기분 좋은 날이네. 엄마 만난 날에 기쁜 소식도 전해줄 수 있어서.”

“기쁜 소식..?”

아직 그에게 반말을 하는 게 어색했던 세연이 말끝을 흐렸다.

“응. 나 아빠 됐거든. 나도 방금 전에 알았어. 지금 막 임신했다는 말 들어서 솔직히 실감은 안 나.”

“으응?!”

세연의 얼굴이 멍청해졌다. 그게 꼭 태상이 송이에게 임신 소식을 들었을 때 지었던 표정과 비슷했던지라 만약 그의 멍청한 얼굴을 본적 있는 사람이 봤다면 놀라워했을지도 모른다.

태상은 늘 임신과 결혼에 대해 자유롭게 생각하던 아이였다.

누군가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하고 오면 어떡할 거냐는 그녀의 질문에 결혼하면 되지 뭐가 문제냐며 웃음을 보이기도 하던 녀석이었다. 그래서 세연이 그가 만나는 여자들에게 신경을 쓰곤 했던 거였다.

관계를 할 때, 피임을 전혀 하지 않았기에 사후 피임이라도 꼭 하고 보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는 법. 그를 거쳐간 여자를 전부 다 케어 할 순 없었을 테니 일이 터지기 전에 최대한 빨리 결혼시키려고 준비를 하려고 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기억을 잃어 뒤로 미뤄진 거였고 말이다.

그가 본가로 들어와 자신과 함께 살고 있으니 여자 문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됐었다. 기억을 잃은 후로 그는 딱히 외박을 하지도 않았고, 그녀의 말이면 고분고분 모두 잘 따라주기까지 했다.

근데 알고 보니 알맹이가 쏙 빠져 다른 몸으로 사고를 치고 있었다니!

세연은 당황스러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그녀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 오른 상태로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야!!! 엄마가 그러니까 피임 좀 잘 하고 다니라고 몇 번을 말했어!!!”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이 어딘지 생각도 않고 소리를 지른 탓에 카페 안에 있는 손님들이 전부 세연과 태상에게로 시선이 꽂혔다. 더욱이 그들의 대화에 피임이니 뭐니 하는 게 나와 더욱 시선이 쏠리고 있었다.

손님들의 수군거림이 들리지도 않은지 둘은 당당하게 계속해서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여기저기 안 싸지르고 다녔어! 한 여자한테 싸질렀어!”

태상도 덩달아 목소리를 높였다. 세연은 한 여자한테만 했다는 말에 더욱 불안해졌다. 안 그러던 애가 그러면 원래 더 무서운 법이다.

“한 여자? 네가 여자를 오랫동안 만나는 애가 아닌데 그게 무슨 소리야?"

태상이 그 말은 자신도 인정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그렇긴 했는데, 이젠 안 그래."

"안 그런다고? 설마 진짜 좋아하는 여자라도 생긴 거니? 어떤 집안 여잔데.”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더더욱 불안해졌다. 임신을 했다 해도 아직 낙태를 시키는 방법 한 가지가 남아 있었기에 세연은 희망을 담았다. 말도 안 되는 계집이면 강제로라도 낙태를 시킬 생각이었다.

하지만 태상은 그녀의 생각을 알았는지 다짜고짜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말속에는 단호한 소유욕이 깃들어 있어 세연이 차마 뭐라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내 집안 여자.”

"내집안? 그게 무슨...."

“같이 살아. 결혼했어. 그러니까 임신도 한 거고.”

“.......!!”

세연의 하늘이 노래졌다.

============================ 작품 후기 ============================

연참하실 생각 없냐기에 아...하루에 2연참...내가 너무 나태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해서 오늘은 3연참!

물론 농담입니다. 3연참 때문에 기진맥진 이네요.

기승전 추천추천 감사합니다.

그리고 후원쿠폰 정말 감사합니다. 힘내서 글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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