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자-52화 (52/251)

00052  자선파티  =========================================================================

그러나 태상은 혜연의 말이 타당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녀를 도와줄 순 없었다.

그도 어릴 적부터 쭉 도련님 소리를 듣고, 어머니를 사모님으로 부르는 고용인들 사이에서 자라 왔다. 혜연이 송이를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태상이 힐끗 시계를 보자 점심을 먹을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점심을 먹고, 자신까지 파티에 갈 준비를 모두 마치고 자선파티에 참석하러 가면 딱 맞을 듯 했다. 태상은 이제 슬슬 그녀에게 단순한 부부동반 모임이 아니라 파티라는 것을 송이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 가는 곳, 부부동반 모임이 아니야.”

“그럼 뭔데?”

택배로 왔던 초대장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고급스러운 금색 문양으로 만들어진 초대장을 받아 든 송이가 안에 들어 있는 내용을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자선경매 파티....오셔서 자리를 빛내주시고...뜻깊은 마음....뭐야 이거? 자선경매 파티라면 드라마에서 나오는 부자들이나 가는 그런 곳 아니야?”

부자들이 모여서 경매 물품을 수 천 만원 써서 구입하고, 그 돈으로 자선단체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는다는 뭐 그런 곳이라는 게 짐작이 되는 듯 했다. 그리고 송이의 짐작대로 바로 그곳이 오늘 송이와 태상이 가야하는 곳이었다.

“맞아.”

“여길 네가 아니, 우리가 왜 가?”

“네 손에 들린 초대장 안 보여? 참석해서 자리를 빛내달라고 하잖아.”

“아니, 그러니까....끄응....우리가 여길 가서 도대체 뭘 하는 건데. 그냥 참석하기만 하면 되는 거야? 여기에 가는 게 네 일이랑 관련 있는 거니?”

설마 다른 부자들처럼 수 천 만원을 써서 남을 돕기 위해 참석하자고 하는 건 아닐 테니 그녀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여전히 송이는 돈을 쓰는 법을 몰랐다. 그가 한도가 무한인 카드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는 것은 먹거리나 생활용품이 다였으니 할 말 다 한 것이리라. 그는 좀 더 송이가 변한 생활에 적응해주길 바랐다. 그리고 이번 파티는 그녀가 예전의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현실로 와 닿게 해줄 좋은 기회였다.

“남들이 하는 거 똑같이 할 거야. 일이랑은 전혀 상관없어.”

“상관이 없어? 너 여기가 어디인줄 알고 덥석 가겠다는 거야. 여기 돈 많은 사람들이 가서 수 천 만원씩 펑펑 쓰는 데야!”

물론 송이도 아는 척 하며 말하긴 했지만 자선 파티에 대해서 아는 게 없었다. 다만 드라마에서 본 게 있는지라 그걸 떠올리며 아는 척 했을 뿐이다. 하지만 태상은 직접 자선파티를 주최해본 적 있는 사람이었다.

“나도 알아. 그리고 우리도 가서 수 천 만원 쓰고 올 거야.”

“얘가 진짜...장난 좀 그만 쳐.”

송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만약 옆에 혜연이 없었다면 이런 말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있기에 장난 그만치라는 식의 말로 끝낸 것이다. 태상은 그녀가 혜연을 불편해하는 것을 눈치 챘다. 그리고 사실 태상도 지금 혜연이 사라져 주었으면 하고 있는 사람중 한 명이었다.

“이만 가봐.”

한 치 망설임도 없이 그의 말에 혜연이 대답했다.

“네. 그럼 가보겠습니다. 사모님.”

“아! 그래도 오셨는데 차 한 잔이라도 하시고 가시는 게...!”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럼 이만.”

“네, 네. 안녕히 가세요.”

꾸벅 인사하는 혜연에게 덩달아 꾸벅 인사했다. 혜연이 집을 나가자마자 송이가 도끼눈을 뜨고 태상을 봤다. 단단히 화가 났는지 팔짱을 끼고 말하는 게 심상치가 않았다.

“너 나 좀 봐!”

“아니, 싫어. 그만 볼래. 지금까지 계속 보기만 해서 이젠 좀 내 마음대로 하자.”

꺄아악!

송이가 비명을 질렀다. 왜냐면 태상이 그녀의 몸을 낚아 채 침실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송이는 그가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깨닫고 발버둥 쳤다.

“아니 얘가 장어를 씹어 먹었나!! 어제 저녁에도 했잖아! 지금 나 화난 거 안 보이니? 꺅! 잠깐....흣!”

태상이 그녀의 목을 혀로 길게 핥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목에 자신의 입술을 묻고 깊게 숨을 쉬었다. 그녀의 향기에 취하고자 코를 벌름거리다가 이내 아까 전 충동을 느꼈던 것이 기억나 입을 벌리고 그녀의 목을 앙 하고 물었다.

“악! 너 지금 나 깨문 거야?”

분위기가 확 깨는지 황당해 하며 송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팠어?”

아픈 건 아니고 많이 당황스러웠을 뿐이었다. 그러나 송이는 태상의 밑에 깔리는 바람에 입고 있던 드레스가 구겨진 것을 목격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어! 아파! 드레스가 아프대! 빨리 일어나!”

안타깝게도 이번엔 송이의 승리였다. 그녀의 드레스 사수에 대한 진념이 생각보다 강했던 것이다. 그리고 아직 끝내지 못한 얘기가 너무 많았다. 결국 태상은 먹이를 놓친 사자처럼 입맛을 다셔야 했다.

속으로는 드레스가 구겨지는 게 싫으면 벗으면 되지 않나 생각하며 투덜거리고 있었다.

태상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져 자리를 잡고 앉은 그녀가 그를 경계하며 말했다.

“나한테 다가 오지 마. 오늘은 안 돼. 그리고 아까 전에 물은 거 아직 대답 안 했어. 어서 대답해.”

단호한 송이의 태도에 흐지부지 넘기려 했던 태상은 결국 모든 걸 얘기해줘야 했다. 어차피 그녀와 상관이 있는 문제이니 말을 하긴 했어야 했다.

“자천파티긴 한데 사실 소개시켜 드릴 분이 계셔서 데려가는 거야.”

“소개 시켜 드릴 분?”

송이가 궁금해 했다. 그가 하는 일과 관련이 된 사람이라면 자신을 소개 시킬 이유가 없으니 더욱 그랬다.

“할아버지야. 음....이제 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는 건가?”

“아버지?”

송이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이명진은 고아다. 그리고 송이도 고아였다. 둘은 고아원에서 만나 함께 자랐고, 결혼까지 한 거였다.

송이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설마설마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찾은 거야? 아버지를?”

둘은 부모님이 뭘 하는 사람인지, 심지어는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다. 살아는 있는 건지, 아니면 죽어서 연락을 못하는 건지조차도 모르는 상황인거다. 그런데 태상이 갑자기 소개시켜 주겠다고 하고, 아버지니 할아버지니 하니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태상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건 아닌데. 음...입양이 될 것 같아. 새삼 이 나이에 웬 입양이냐 싶긴 한데, 내가 선택해서 하는 게 아니라서 말이야.”

“그게 도대체 뭐야..? 하나도 모르겠어.”

송이가 여전히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녀는 어쩐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부잣집에 입양 가는 거야? 너 이 돈도 전부 그 집에서 준 거였어? 그쪽에서 너 결혼했다는 거 뒤늦게 알고 입양 취소하겠다고 하면 어떡해? 이미 돈 잔뜩 써버렸잖아.”

“뭐?”

태상은 도대체 생각이 왜 그리로 튀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송이는 꽤 심각한 모양이었다.

“그럴 일 없어. 그리고 이미 너도 만나 본 적 있는 사람이야. 네 존재에 대해 다 안다고.”

“내가 안다고?”

송이가 눈을 깜빡였다.

“저번에 우리 집에 찾아왔었잖아. 기억 안나?”

“.....”

송이가 곰곰이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곧 그가 말한 게 누구인지 알아차렸는지 표정에 느낌표를 가득 담았다.

“설마 그때 그 할아버지 말하는 거니?”

태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이제 내 아버지가 될 할아버지지.”

송이의 얼굴이 복잡해보였다.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눈치였다.

“갑자기 입양은 왜 하기로 한 거야? 전혀 핏줄이랑은 상관없는 거니?”

실은 그것과 아주 깊은 연관이 있는 거긴 하지만 태상은 시치미를 뗐다.

“그냥 이런저런 인연 때문에 어쩌다보니 이렇게 된 거야. 부담 갖지 말고 가서 안녕하세요 예쁘게 인사만 하면 돼.”

“어떻게 그래! 말이 쉽지!”

송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가 갑자기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주름 진 드레스를 피는가 하면, 살짝 망가진 머리를 다시 고쳤다.

정말 태상이 입양되는 거면 오늘 만나러 가는 사람은 곧 시아버지가 되는 거였다. 절대 허술하게 준비하고 갈 순 없었다. 송이가 갑자기 분주해지자 태상은 허망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송이는 분주한 척 하면서 자신의 복잡한 심경을 태상에게 들키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그가 입양이 된다. 어릴 적 명진과 송이는 그 입양이라는 것 때문에 많은 헤어짐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끝내 둘은 지금까지 함께였다.

입양이라는 것 때문에 명진과 늘 헤어져야만 했던 송이는 그가 또 다시 입양을 하게 됐다는 소리에 마냥 좋을 수가 없었다. 이젠 어린아이도 아니고, 법적으로 그의 떳떳한 아내가 되긴했지만 입양을 하게 되면 웬지 그와 헤어져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모든 게 다 행복하고, 완벽한 지금. 왜 그가 굳이 입양을 하려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또 자신을 떼어내려 하는 걸까?

사랑받고 있는 줄 알았던 그녀의 확신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감출 수 없는 불안감이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결국 준비를 하던 송이가 그 자리에서 주저앉으며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 태상은 영문도 알려주지 않고 펑펑 우는 송이 때문에 그녀를 달래느라 진땀을 빼야했다.

“가기 싫으면 가지 않아도 돼. 그냥 쉴까?”

송이가 고개를 저었다.

“싫어. 갈 거야.”

펑펑 울어서 눈이 퉁퉁 부었는데도 송이는 굳이 가겠다고 바득바득 우겼다. 태상은 그녀의 기분에 맞춰주기 위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볼에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주었다.

“일단 그럼 화장부터 다시 하러 가자.”

태상이 다정한 목소리로 부드럽게 속삭이듯 말하자 송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

“아버님이 자선파티에 직접 참석하신다고?”

“그렇습니다, 사모님.”

비서가 전해 준 뜻밖의 말은 그녀를 무척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오랜만에 그와 얘기를 나누고자 (사실은 부탁할 것이 있어서 온 거지만.) 갔다가 강회장이 자선파티에 참석하러 움직였다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다른 의도가 있지 않고서야 쉬이 몸을 움직이지 않는 강회장이기에 세연은 잠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가 왜 자선파티에 갔는지, 그 의도를 짐작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생각을 한다고 강회장의 생각을 꿰뚫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세연은 강회장이 어디 자선파티에 참가했는지 알아 오라며 비서에게 명령했다.

“요즘 따라 태상이랑 시간도 잘 안 보내셔서 걱정 돼 죽겠는데 이상한 곳이나 가시고....”

태상이 갑작스럽게 원인 모를 병으로 그동안의 기억을 잃어 성격이 많이 바뀌어서 그런가 싶어 더욱 속이 상했다. 가뜩이나 아픈 아이 때문에 속상해 죽겠는데, 강회장까지 태상을 멀리하는 느낌이 들자 어떡해야 하나 막막했던 것이다.

강회장이 누구인가. 이 집에서 태상을 가장 많이 아껴주고, 가까이 뒀던 이가 바로 강회장이다. 기억을 잃고 나서부터 그의 총애가 눈에 띄게 식어 가뜩이나 마음고생 심한 세연의 애간장을 더욱 애타게 하고 있었다.

오죽 했으면 그의 앞에서 울기까지 했겠는가.

태상이 다른 사람처럼 낯선 건 강회장만 느끼는 게 아니었다. 태상을 배 아파 낳은 세연도 전부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부모인 자신이 다 품어 줄 밖에.

세연은 무슨 이유로 강회장이 자선파티에 참석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직접 찾아가서 태상에 대한 일을 해결 볼 생각이었다. 성격이 바뀌어서 낯설긴 해도 여전히 당신 손자 태상이 맞다고, 그러니 다시 예전처럼 태상과 함께 시간도 보내고 하라고 말할 생각인 것이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건 핏줄끼리 너무한 처사가 아니냐며 호소해볼 것이다.

비서에게서 자선파티가 어디서 열리는지 들은 세연은 파티에 참석할 준비를 시작했다.

***

파티가 시작됐다.

자선 경매 파티지만 강회장이 직접 출석한다는 소식이 널리 퍼졌기 때문인지 정재계 인사들이 참석한 큰 파티가 되었다.

강회장이 몸을 움직이는 건 확실히 그리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괜히 세연이 이상해 하는 게 아닌 것이다. 덕분에 평소라면 오지 않았을 인사들까지 모두 파티에 참석을 해 강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연도 이미 일찍이 와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얼굴을 아는 이들과 오랜만에 인사도 하면서 말이다. 그들 모두가 그녀의 아들인 태상과 자신의 딸을 소개시키려고 안달이 나 있었다.

태상은 절대 흔들리지 않는 그룹 후계자로 오랜 시간동안 자신의 자리를 튼튼하게 쌓아 올린 아이였다. 때문에 너나 할 것 없이 태상의 짝이 되기 위해 침을 흘리며 기회를 엿봤다.

세연은 콧대를 잔뜩 높이며 그들을 애타게 만들었다.

============================ 작품 후기 ============================

자꾸 재밌다 재밌다 코멘 올려주시는데, 그런다고 내가 연참할 것 같아요?! 흥!

(다음편은 17분에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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