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1 자선파티 =========================================================================
“여보세요.”
아침을 깨우는 벨소리에 인상을 찌푸리며 전화를 받은 태상은 통화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하자 밍기적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눈을 비비며 주변을 살피자 송이가 아무 것도 입지 않은 채 흰 이불을 돌돌 말고 그의 옆에 잠들어 있었다.
세상 모르고 잠든 아기같은 모습에 그녀의 뺨을 쓰다듬은 태상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급한 일이라도 있어?”
태상은 송이가 깰까 싶어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나왔다. 주방으로 가 컵에 물을 따르며 잠긴 목을 축였다. 시계를 보니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강회장은 지금 시간까지 잠을 자고 있는 게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혀를 찼다.
[죽으면 푹 잘 걸, 젊은 나이 좀 더 즐겨야지 잠으로 보내는 거냐.]
“할아버지, 지금 7시밖에 안 됐거든??”
태상이 황당해하자 강회장은 앞으로는 한 시간 더 일찍 일어나라며 게을러지는 걸 경계하라고 했다.
[늘 얘기하는 거지만 게으른 게 가장 안 좋은 거다. 항시 몸을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고 했잖니. 그런데 7시인데도 잠을 자고 있으면 안 되지! 앞으로 이 시간에 일어나서 운동을 나가도록 해라.]
예전부터 강회장은 게을러지는 것을 가장 경계하라고 했다. 그게 가장 안 좋은 거라며 말이다. 늘 들어오던 잔소리였기에 태상이 말을 돌렸다.
“그래서 진짜 이 시간에 웬일로 전화 한 건데. 용건이 있어서 그런 거 아냐?”
태상의 말에 강회장이 생각이 났는지 잔소리를 그만두고 용건을 꺼냈다.
[오늘 자선파티가 있다. 네 짝인 그 아이와 함께 참석하거라.]
“자선파티? 거길 내가 왜 가.”
[왜 가긴 이놈아. 세상에 널 입양했다고 발표를 해야 하니까 와야지.]
“벌써 다 준비한 거야?”
정말 일 처리 하나는 끝내주게 빠른 할배였다.
[입양 준비를 시작한 게 오래 전인데 준비하고도 남았지, 이 녀석아.]
강회장의 말에 태상이 난감해져 신음을 흘렸다. 그동안 입양에 대해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아서 갑작스러운 그의 말이 당황스러웠던 것이다. 더욱이 지금 그는 요즘 S등급 미션 때문에 정신이 없는 상황이었지 않은가.
오늘 당장 오라는 말에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됐다.
“아버지랑 어머니는 뭐라고 하시는데? 아무 상관없는 이명진이라는 사람을 입양한다는 데 그냥 알겠다고 하고 말았을 것 같진 않은데.”
당연히 그럴 리가 없을 것이다. 그들은 이명진의 몸을 하고 있는 게 진짜 강태상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도 아닐 테니 말이다.
[얘기 안 했다. 그 녀석은 내 결정에 따르기만 하면 되는 놈이다. 상의니 뭐니 필요 없는 소리지.]
강회장이 분명 자신의 핏줄인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냉정하게 말했다. 그는 유독 태상의 아버지에겐 냉정하고 엄했다. 자신의 마음에 차지 않는 아들이라서 그런 걸까? 아버지는 평생 강회장의 마음에 들고자 노력하며 살았지만 여전히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한테 아예 얘기도 안 했다고? 그 후폭풍을 어떡하려고 그래.”
[내가 누구한테 허락을 받고 행동해야 하는 사람이냐?]
강회장이 심기가 불편해졌는지 목소리가 탁했다. 그의 자존심이 그대로 묻어나오는 목소리인지라 태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여간 자존심 하나는 알아 줘야 한다니까. 사정 모르는 아버지가 얼마나 놀라겠어. 생판 처음 보는 놈한테 회사를 뺏기게 생긴 건데. 그럼 내가 아버지한테 미움 받게 되는 거잖아.”
[......속 좁은 놈이라 그럴 수도 있겠지.]
그건 생각하지 못했는지 강회장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거 보라며 태상이 더욱 목소리를 높이고 말했다.
“그럼 완전 콩가루 집안 되는 지름길이네. 내가 홍길동이야?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못 부르고 형이라고 불러야 된다는 거잖아. 와~ 이건 홍길동보다 더 하다 더해. 생각하면 생각 할수록 진짜 말이 안 된다고.”
솔직히 강회장이 이미 결심한 입양 자체를 막진 못할 것 같고, 적어도 공식 발표만은 막아 보려 애를 썼다. 강회장도 태상의 말을 마냥 무시할 순 없었는지 다행히 반박의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태상이 그를 좀 더 확실하게 설득하기 위해 당근을 내밀었다.
“입양을 반대하는 건 아냐. 자선파티? 그것도 참가할게. 근데 공식발표는 좀 뒤로 무르자. 아직 때가 아니라고 봐. 그런 건 한 방에 모와서 빵빵 터트려야 제 맛인 거거든. 내가 때를 봐서 할아버지한테 연락 할 테니까 그때까지만 참아줘. 알겠지?”
[알겠다, 이놈아! 내 고집 꺾는 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네 녀석밖에 없을 거다. 대신 오늘 자선파티 꼭 참석 하거라. 그 아이도 데려오고. 이런 기회에 얼굴이라도 봐야지.]
강회장에게 찾아 가겠다 말을 하긴 했지만 그가 직접 집으로 찾아 온 이후부터 지금까지 그를 다시 직접 얼굴 맞대고 본 적이 없는 태상이었다. 강회장의 말에 괜스레 뜨끔해져 태상이 재빨리 알겠다 대답했다.
전화를 끊은 태상은 잠시 머리를 긁적였다.
초대장이 곧 택배로 온다고 했으니 그 전에 그녀에게 지금 이 상황을 납득시켜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송이가 이런 파티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여자라는 점에 있었다.
그녀가 파티 분위기를 맞출 수 있을지 솔직히 장담할 수가 없었다.
“드레스를 입은 송이라....”
태상이 잠시 그녀의 모습을 상상해봤다.
올림머리를 하고, 자연스럽게 몇 가닥 내려져 있는 머리카락.
목 부분이 시원하게 파져 그대로 그녀의 가녀린 목과 쇄골이 그대로 드러나는, 아름다운 순백 드레스를 입은 송이를 말이다.
절로 침이 꿀꺽 삼켜졌다. 그녀의 가녀린 목을 뱀파이어가 된 것 마냥 깨물고 싶은 충동이 들 것 같았다.
“나쁘지 않겠는데?”
태상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는 곧장 침실로 쳐들어가 곤히 잠들어 있는 송이를 깨웠다. 아주 오랜만에 태상이 송이를 깨우는 것이었던 지라 잠을 깨우는 수법이 좀 독특했다.
송이의 가녀린 목을 이로 앙 물면서 그녀를 깨운 것이다. 송이가 갑작스러운 통증에 화들짝 놀라 눈을 뜨자 태상이 그녀의 얼굴 바로 앞에서 씨익 웃었다.
“미리 말 하는데, 오늘 컨셉은 신데렐라다.”
“그게 무슨 소리야 또오...”
자신을 깨문 게 태상이라는 것을 깨달은 송이가 놀란 눈을 다시 스르륵 감았다. 아직 피곤이 모두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태상은 그녀의 몸을 휙 안아 들었다.
“꺅!”
송이가 가녀린 비명을 지르거나 말거나 드레스에 꽂힌 태상은 성큼성큼 욕실로 다가갔다. 계속 송이가 놓으라며 발버둥을 치자 그녀의 엉덩이를 찰싹 아프지 않게 때리곤 엄하게 말했다.
“어허! 오늘 제대로 신데렐라가 되게 풀코스로 움직여야 하니까 빠르게 움직여야 된다고. 파티 시작 시간은 일곱시다.”
지금 시간이 7시라는 걸 빤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재촉하는 태상이었다. 방금 전만해도 일찍 일어나 전화를 건 강회장에게 투덜거렸으면서도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을 것을 떠올리니 절로 몸이 달았기 때문이었다.
한 시라도 빨리 그녀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송이는 영문도 모른 채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닦달하는 태상으로 인해 억지로 몸을 씻을 수밖에 없었다. 요즘들어 이상하게 잠이 많아져서 정신이 몽롱했는데 시원한 물에 몸을 맡기니 그제야 정신이 좀 돌아오는 송이였다.
마르지도 않은 머리를 한 송이를 끌고 차로 이동한 태상은 그녀를 어떤 미용실로 데려갔다.
그녀는 아직 자신이 파티를 가야 하는지 모르고 있었다. 미용실은 방금 열었다는 걸 보여주듯이 직원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태상과 송이가 들어오자 직원이 90도로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송이는 그들의 인사를 부담스러워하며 슬금슬금 안으로 들어갔다.
“여긴 또 갑자기 왜 와?”
“말했잖아. 신데렐라 컨셉이라고.”
“이쪽으로 앉아 주십시오. 고객님”
미용사가 자리를 가리키자 어서 가보라며 태상이 손짓했다. 송이가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아 태상이 미용사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머리를 해줘야 하는지 말해주었다. 그가 상상했던 그대로 파티에 갈 거니 올림머리를 해달라고 했다.
송이는 파티라는 말에 놀라 말했다.
“파티?! 우리 파티가? 무슨 파티?”
그녀는 그제야 그가 신데렐라니 뭐니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도대체 무슨 파티를 가느냐다.
“부부동반 모임이 있었으면 나한테 진작 얘기를 하지! 자다가 끌려와서 깜짝 놀랐잖아.”
단순한 부부동반 모임 같은 게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송이는 그렇게 결론을 지은 모양이었다. 태상은 일부러 그녀의 오해를 풀지 않고 웃기만 했다.
전문가의 솜씨는 확실히 다르긴 한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완성 된 송이의 모습을 본 태상은 저도 모르게 짝짝 박수를 쳤다. 송이가 쑥스러운지 얼굴을 붉히며 그의 가슴을 아프지 않게 쳤다.
“이제 집에 가자.”
송이가 머리와 화장을 하는 사이 강회장이 보낸 택배가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더불어 혜연까지 말이다.
송이는 낯선 여자가 이른 아침에 자신의 집 앞에 서 있자 당황스러워했다. 혜연은 태상이 도착하자 그에게 인사를 했다.
“오셨습니까.”
“내가 말 한 건?”
그의 말에 혜연이 들고 있는 거다란 상자를 살짝 들어올리며 말했다.
“여기 준비해왔습니다.”
“오케이! 들어가자.”
송이가 누구냐는 시선을 계속 보내는 데도 태상은 송이에게 드레스를 입혀 볼 생각에 정신이 없었다. 혜연은 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송이에게 90도로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사모님. 정혜연이라고 합니다. 정비서라고 불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네, 네. 전 임송이라고 해요.”
“예,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송이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렸다. 태상이 부디 저 여자가 도대체 누구인지 어서 말해주었으면 좋겠는 듯 했다. 하지만 태상은 혜연이 가져 온 드레스에 한 눈이 팔려 그녀의 바람을 알지 못했다.
“이거 입어봐.”
그가 송이에게 건넨 옷은 고혹적인 미를 내뿜고 있는 흰색 미니드레스였다.
송이는 드레스를 힐끗 쳐다보기만 하고 받아들지 않은 채 물었다.
“도대체 저분은 누구신거니?”
“소개 했잖아. 비서야, 비서.”
“네가 비서가 왜 필요해!”
그를 아직도 검사로 알고 있는지라 송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음....그게 어쩌다보니 필요가 있어서 랄까? 아무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어서 이것 좀 입어 보라고."
아침부터 급하게 드레스를 구하느라 진땀을 빼야 했던 혜연이다. 혜연은 예의바르게 그녀에게 도와드릴까요? 하고 물었으나 그런 귀한 대접에 익숙하지 않았던 송이가 질겁을 하며 괜찮다고 사양했다.
물론 그 덕분에 방 안으로 들어가 한참을 드레스와 씨름을 벌여야 했지만 말이다.
“죄송합니다. 아침이고, 급하게 구하다보니 퀄리티가 좀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괜찮아. 어차피 가야 하는 곳이 자선파티장이라 수수하게 입는 게 좋아.”
자리에 맞춰 옷을 갖춰 입어야 하는 지라 혜연이 가져 온 드레스는 그리 튀지도 않고 딱 적당했다. 태상이 잘했다며 혜연을 칭찬하자 그녀의 두 볼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그녀에겐 작지만 제 몫을 한 첫 임무였던 것이다.
맡은 바 임무를 잘했다며 태상이 칭찬을 해주니 절로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때, 문을 열고 드레스로 옷을 갈아입은 송이가 방을 박차고 나왔다. 태상과 혜연의 시선이 절로 그녀에게 쏠리고 곧 태상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 올랐다.
송이의 모습이 딱 그가 상상했던 그 모습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혜연은 짝짝짝 박수를 치며 송이의 아름다움을 칭송했다.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사모님.”
“사, 사모님이라고 하지 말고 그냥 송이씨라고 불러주세요. 사모님은 제가 듣기가 좀 어색해서....”
“제가 어떻게 사모님을 씨로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꾸 들으시다보면 익숙해지실 겁니다. 사모님.”
“우우....”
송이가 혜연의 말에 도와달라는 듯 태상의 옷깃을 잡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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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 수정했어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새 눈이 침침한가봐요....크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