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5 박상현 =========================================================================
“진짜 얘가 밖에서 어떻게 하고 다니기에 저런 여우가 붙는 거야?”
송이가 씩씩거리며 화를 내다가 이내 심각하다는 듯 입술을 오물거렸다.
‘아니지, 명진이가 문제가 아니라 저 여우가 문제지. 유부남이라고 얘기를 들었으면 포기를 해야지 집에는 왜 와 왜 오길?’
송이는 한동안 씩씩거리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하지만 일을 하고 있는 태상에게 뭐라고 할 수가 없어 참을 수밖에 없었다. 예전부터 이런 일을 당한 게 한 두 번이 아니었기에 참는 데는 도가 텄다. 그다지 도가 트고 싶지 않은 일이었지만 인물 값 한다고, 잘생긴 얼굴 때문인지 늘 여자가 따랐던 것이다.
그래도 예전보단 지금이 훨씬 나은 상황이었다. 요즘 그와 함께 하는 잠자리에서 그에게 사랑받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번 하고 끝이었던 그와의 잠자리도 이젠 기본으로 두 세 번은 해야 끝이 났다.
당할 때는 힘들지 몰라도 그가 자신을 보며 흥분해준다는 게 여자로서 마음을 뿌듯하게 했다. 해서 요즘은 저렇게 여자가 찝쩍거리는 모습을 봐도 그다지 위기의식이 느껴지지 않았다.
송이는 크게 숨을 들이 쉬었다가 내쉬며 마음을 다스렸다.
그녀가 딱 보기에도 태상은 저 여우에게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저 여우가 대놓고 옷 벗고 달겨 들지 않는 이상 그가 흔들리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됐다.
‘그래, 괜찮을 거야. 그러지 않겠다고 했잖아.’
이혼이니 뭐니 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으니 그의 말을 믿어 볼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렇게 안도하고 있는 순간, 불행이도 정희는 그가 사는 곳을 본 후에 마음이 많이 바뀌고 있었다. 솔직히 나 싫다는 남자, 그것도 유부남한테 매달리고 싶은 마음 없었던 정희였다. 오늘도 얄밉던 송이에게 복수나 해주자는 심산으로 집에 찾아 온 거였다. 그런데, 그가 살고 있는 집이 생각보다 훨씬 엄청나지 않은가.
이 정도 사는 집이라면 유부남이라 해도 욕심이 날 수밖에 없었다.
돈도 많고, 얼굴도 잘 생기고, 심지어 검사이기까지 하다면 유부남이라는 게 흠이 될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 정도 흠은 환영이었다. 그 정도 틈이 있어야 그녀가 파고들 구멍이 생길 테니 말이다.
송이가 생각을 바꾸고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이고 있을 무렵, 정희는 태상에 대한 의지를 다지고 있었다.
그녀는 이 정도 되는 남자를 꼬시는 거라면 옷 벗고 그의 침실까지 쳐들어 갈 마음이 충분히 있었다.
“”
정희가 가져 온 것과 이명진이 갖고 있었던 박상현의 정보를 모두 찾은 태상은 얻은 정보로 생각을 정리했다.
이명진의 자료에서는 온통 박상현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었고, 정희가 가져 온 정보에는 모든 게 박상현의 아버지인 박동환을 범인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정희가 가져 온 정보들은 모두 조작 된 게 틀림없다. 그리고 그 정보들을 조작한 이는 이명진일 테고 말이다.
문제는 가장 알아야 할 중요한 정보를 아직까지 얻지 못했다는 것에 있었다. 모든 자료를 살펴봤지만 박상현을 숨길만한 장소가 적힌 곳이 없었다. 힌트조차 없었기에 막막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때, 갑자기 태상이 하품을 길게 했다. 정신이 몽롱해지는 게 잠이 쏟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을 보니 어느덧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빨리 접속하라 이건가.”
새벽에 자주 놀던 그이기에 고작 이것 했다고 피곤해서 졸음이 오는 건 아닐 것이다. 라마스가 어서 그에게 접속을 하라고 신호를 보내는 게 틀림없었다.
서류를 모두 한 번씩 다 훑어보았고, 더 이상 단서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잠을 자야 할 듯 싶었다. 라마스에게 그곳 상황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물어도 봐야 하기 때문이다.
태상이 침실로 가려는데, 송이가 이제 나오냐며 그에게 쪼르르 달려왔다.
아무래도 계속 그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태상이 잠시 고민하다가 난감한 듯 그녀에게 말했다.
“나 오늘은 좀 일찍 자야 할 것 같은데.”
“벌써 잔다고? 너 저녁밥도 안 먹었잖아. 밥 차려놨는데 먹고 자. 그러다가 몸 상해.”
아, 그 밥 얘긴가?
태상은 그녀가 자신에게 그 무언가를 원하기에 기다리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게 아닌 듯싶다. 태상은 밥을 먹다가 쓰러지듯 잠들 것 같아서 사양했다.
“오늘은 좀 건너뛰자. 일찍 좀 쉬고 싶어.”
“그래도...”
송이가 시무룩해했지만 태상은 곧장 침실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눕기만 해도 잠으로 빠져 들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건 기분 탓이 아니라 실제로도 그대로 일어났다.
태상이 침대에 눕자마자 천계로 접속을 한 것이다.
송이는 씻고라도 자라며 한 소리 하려고 들어왔다가 깊게 잠들어 있는 태상을 보며 정말 피곤하긴 했나보네....하고 중얼거렸다. 실제로는 피곤해서 잠든 게 아니라, 라마스를 만나야 했기 때문이지만 말이다.
“라마스.”
“어서오십시오, 태상님.”
라마스가 날개를 펄럭이며 그를 반겼다. 태상은 무슨 일로 부른 거냐며 그에게 물었다.
“갑자기 잠이 쏟아져서 놀랐어. 일하다가 잠들 뻔 했다고. 무슨 일이야?”
“인간계를 침략하려는 악마들의 수작에 어떻게 대응할지 회의가 열렸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결정이 난 상태이고요.”
그가 한 말은 그동안 태상이 무척 기다려왔던 말인지라 그가 반색했다.
“그래? 어떻게 됐는데?”
“두 번째로 결정이 났습니다. 몇몇 이들을 뽑아 수작을 막는 것으로요. 그렇게 해도 해결이 되지 않는다면, 인간계에서 악마들과 전면전을 하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먼저 법칙을 깼기에 솔직히 저희들 쪽에서는 아무런 부담감이 없습니다. 모든 천벌은 먼저 시작한 그들에게 쏠릴 테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들은 인간계까지 전쟁터로 만들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결정 된 거기도 하고요.”
라마스의 말은 이랬다.
악마과 천사들 사이에서는 절대 깨선 안 되는 법칙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인간계의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본래 서로의 세계에 간섭해선 안 된다는 게 가장 큰 제 1법칙이었는데 악마들은 그 법칙을 깨고, 인간들을 싸움에 끼어들게 한 것이다.
천사들은 어쩔 수 없이 악마들에게 지지 않기 위해 그들을 따라 할 수밖에 없었다. 서로 인간과 계약을 해서 싸움을 하게 되자 밀리던 천사들은 다시 악마와 균형을 맞출 수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악마들이 아예 인간계로 손을 뻗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 이번에도 먼저 규율을 깬 건 악마이기에 그를 막기 위해 똑같이 따라 한다 해도 천사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태상이 라마스의 말을 듣고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의 말은 상관도 없는 나라들끼리의 싸움을 애꿎은 우리나라에서 하겠다는 말이니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현실에서 전쟁을 하게 되면 당연히 살기 좋았던 나라라도 피폐해지고, 엉망이 될 게 분명했다. 더욱이 그들이 사용하는 힘은 특별하지 않은가. 지구는 혼란에 빠질 것이고, 그동안 일궈냈던 모든 게 엉망이 되고 말 것이다.
“계약자들이 그걸 가만히 두고 보고 있을 거라 생각해? 다른 세계 싸움을 왜 우리들 세계에까지 끌어 오는 건데?”
“저희들도 부디 그렇게까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악마들이 인간계에 있는 저희들 계약자를 계속해서 죽인다면, 그걸 막기 위해 계약자들에게 현실에서도 힘을 쓸 수 있도록 해서 스스로 방어하게 할 도리밖에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정말 개싸움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적어도 이곳에선 천상계와 마계가 따로 공간이 정해져 있기에 미션을 하는 공간에서 뿐이 악마 계약자를 만날 수 없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그 공간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으니, 천사 계약자와 악마 계약자는 서로를 죽이기 위해 난리를 칠 게 뻔했다.
태상은 이미 어렴풋이 천사 계약자와 악마 계약자들 사이의 증오와 분노를 본 적이 있다. 그들에겐 서로가 같은 나라 혹은 같은 세계 사람이라는 사실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현실에서는 함께 버스를 타고, 심지어는 대화까지 나눌 수도 있을 만큼 가까운 곳에서 지내는 사람이면서 말이다.
엉망이 될 현실 모습이 떠오르자 문제를 서둘러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려운 일이라는 건 알지만 이미 현실에서도 능력을 사용하실 수 있는 태상님께서 이번 일을 맡아 해결해주셨으면 합니다.”
라마스의 말에 태상이 당연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지금은 나 밖에 모르는 일이잖아. 나 아니면 누가 하겠어.”
“그럼 제가 드리는 미션을 수락해주십시오.”
태상이 목에 걸고 있는 목걸이를 꺼내 미션을 수락했다.
라마스가 미션이 받아지자 좀 더 자세하게 얘기를 시작했다.
“방금 받으신 미션의 난이도는 S입니다. 인간계에서 천사 계약자들을 죽이는 악마의 계획을 저지해주십시오.”
“S라....”
난이도 S은 처음 듣고, 처음 받아 보는 등급이었다. 아직 C등급 미션을 하는 태상에겐 버거울지도 모르는 난이도였다. 하지만 태상은 반드시 해결하고 말리라 굳게 다짐하고 있었다. 그가 이 미션을 성공시키지 못하면 후폭풍이 어마어마할 테니 말이다.
“미션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인원은 20명입니다.”
S등급임에도 불구하고 20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건 굉장히 불리한 조건이었지만 태상에겐 저 20명을 다 채울 수나 있을지 걱정이 되는 숫자였다. 길드에 들었다면 순식간에 채워졌겠지만 태상은 그럴만한 상황이 되질 않았다.
미션을 공유할 사람이라고 하니 가장 먼저 생각이 난 사람은 바로 사로나였다.
아직 길드를 만들지는 못했지만 이미 그의 길드원이나 다름없는 여자였다. 태상은 사로나에게 연락을 넣기 위해 목걸이를 다시 한 번 손에 쥐었다. 미션을 받거나 라마스에게 연락을 할 수 있는 기능이 있고, 또 다른 기능으로는 다른 계약자와 연락할 수도 있었다.
각자 목걸이에는 고유번호가 있었고, 그것이 핸드폰 번호와 같은 기능을 하는 것이다.
“이봐, 사로나.”
하지만 그녀가 접속하지 않아 있으면 태상으로서는 그녀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기도 했다.
[누구..? 아!]
사로나는 갑자기 목걸이가 반짝거리자 뭐지? 싶어 꺼내봤다가 들리는 태상의 목소리에 어리둥절해했다. 하지만 곧 누구의 연락인지 번호를 보고 알 수 있었다. 그녀에게 굉장히 황당한 제안을 했던 사람, 바로 태상이었다.
“다행이 있었네.”
[...무슨 일이야?]
“내가 미션을 받은 게 있거든. 그거 같이 하면 좋을 것 같아서. 지금 바쁜가?”
[오늘은 따로 다른 미션을 받은 게 있어. 지금 바로 하는 거면 못해.]
“상관없어. 오늘 안에 끝나는 미션 아니니까. 일단 만나자. 자세하게 얘기해줄 테니까.”
[알았어.]
태상이 처음으로 미션을 받았던 그곳에서 사로나와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태상이 라마스에게 부탁을 하자 공간을 이동시켜주었다.
사로나가 도도한 걸음걸이로 그에게 오자 태상이 손을 들어 올려 그녀를 반겼다. 몇몇 계약자들이 그녀의 모습을 힐끗거리며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외모가 그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이다. 사로나가 태상이 앉은 곳 맞은편에 앉자 입맛을 다시며 아쉬워하다가 갈 길을 갔다.
“무슨 미션인데 부른 거야?”
“아주 많이 복잡한 미션.”
태상이 목걸이를 꺼내자 사로나도 자신의 목걸이를 꺼냈다. 계약자끼리 미션을 공유하려면 목걸이가 필요했다. 처음 미션을 할 때엔 목걸이가 없었기에 이런 절차를 밟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미션을 완수했다는 도장이 찍힌 종이가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목걸이가 있기에 굳이 종이가 필요 없었다. 둘의 목걸이를 겹치자 잠시 목걸이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미션 등급은 S야.”
“...뭐?”
사로나가 태상의 말에 당황해 되물었다.
사로나는 지금까지 S등급 미션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S등급 미션은 희귀했다. 그런데 태상이 저렇게 태연한 얼굴로 방금 전에 자신이 받은 미션이 S등급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어처구니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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