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4 박상현 =========================================================================
“여기서 잠시 기다리십시오.”
경찰의 말을 들은 태상이 자리에 앉았다.
그는 지금 정희에게 물어보았던 사건의 범인을 만나러 온 참이었다. 경찰이 그를 자리에 안내한 곳에 얌전히 앉아 있자, 곧 그가 기다리던 박동환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박동환은 자신을 찾아 왔다는 이가 누구인지 몰라 어리둥절해하다가 이내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잠깐 둘이서만 얘기 나눌 수 있겠습니까?”
“예, 알겠습니다.”
이럴 땐 그의 직분이 꽤나 도움이 됐다. 경찰들이 자리를 피해주자 잠시 둘 사이에서 침묵이 돌았다.
“........”
“.......”
태상은 남자를 빤히 바라보며 그의 안색을 살폈다. 박동환은 계속해서 태상과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누구냐고 묻지 않는 것을 보아 놈은 이명진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놈이 분명했다.
문제는 여기서 단순히 사건을 해결한 검사로 이명진을 알고 있느냐, 아니면 좀 더 둘 사이에 복잡한 무언가가 있느냐 였다.
“나 아시죠?”
태상이 침묵을 깨고 박동환에게 물었다. 박동환이 몸을 움찔 떨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주름진 얼굴이 태상의 눈에 거슬렸다. 저렇게 흐리멍텅한 눈빛을 한 자가 누군가를 죽일 정도로 강단이 있어 보이지 않았고, 다른 걸 다 따지지 않는다 하고서라도 계약자가 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만약 능력자라면 이런 식으로 무력하게 이곳에 잡혀 있을 리가 없었다. 태상의 질문에 박동환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모릅니다.”
“내가 괜히 경찰들 나가게 한 거 아닙니다. 여기 우리 둘 밖에 없습니다. 거짓말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겁니다.”
그의 말에 남자의 눈동자가 거칠게 떨렸다. 기어코 남자의 입에서 태상이 의심하던 것이 터져 나왔다.
“또 무슨 일로 오신 건데요...그쪽이 하라는 데로 다 했잖아요. 실수 한 거 없다고요.”
푹 숙인 고개며, 남자의 옅게 떨리는 몸이며 하나 같이 겁에 질려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분명 협박을 당해서 자백을 하고, 증거를 조작한 게 틀림없었다.
태상이 작게 한숨을 쉬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저 남자가 무엇을 약속 받고 살인죄를 뒤집어썼을까?
그가 불쌍하다느니 뭐니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니었다. 만약 이 일이 밝혀지게 되면 오히려 그가 곤란해지게 된다.
이명진이 된 이상 아무리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 해도 다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니 만약 이 남자가 그가 모르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돌발적으로 행동하게 되면 태상이 모두 뒤집어쓰게 되는 것이다.
그건 절대 안 될 말이었다.
“당신, 뭘 약속 받고 이 짓 하는 겁니까?”
“......예?”
박동환이 그의 말뜻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이명..! 아니, 나한테 뭘 받기로 하고 여기에 갇혀 있냐고.”
이명진은 돈이 없는 놈이었다. 그러니 박동환에게 돈을 주어 현혹시키진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걸 대가로 받았다는 건데, 그 일이 완벽하게 처리가 된 상태인지 확인해야 했다. 만약 뒤처리가 완벽하지 않다면 자신에게 문제가 생기니 말이다.
박동환이 침을 꿀꺽 삼켰다.
“왜 이러세요. 정말 다 잘 했단 말입니다. 시키는 데로 다 했어요. 아무 문제없었다고요.”
“문제가 아예 없었다고 확신 합니까?”
박동환이 그렇다며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갑자기 벌떡 일어나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다리를 붙잡았다.
“거, 거, 검사님...살려주십시오!! 정말 다 했습니다. 절대 실수 같은 거 안 했어요! 붙여주신 변호사님이 이대로 가면 문제 없이 형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제 아들놈 좀 살려주십시오!”
‘아들? 아들이랑 관련이 있다는 건가?’
이명진이 그 아들놈의 일을 모두 처리를 하고 나서 몸이 바뀌었으면 상관없는데,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문제가 컸다. 본의 아니게 약속을 지키지 않게 되는 것이니, 남자가 약속대로 행동할 리가 없었다.
“아들과 연락은 해봤습니까?”
“아뇨. 검사님이 몸 피해 있으라고 하고 데려가신 이후로는 연락 온 적 없었습니다. 호, 혹시 상현이랑 전화 통화를 할 수 있나요?”
박동환이 혹시나 하는 희망을 담아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태상은 그의 아들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도 모르기에 당연히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다.
태상은 그의 말을 들으며 상황을 유추해보자 구체적으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박동환의 아들이 살인을 저질렀고, 이명진은 아들의 죄를 아버지가 대신 받도록 도와준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박동환의 아들이 악마 계약자일 확률이 높았다는 뜻인데....
“상현이 좀 잘 부탁드립니다. 그 녀석이 아직 어려서 그런 실수를 저지른 거지, 원래 나쁜 놈은 아닙니다. 정말이에요!”
이명진이 박동환의 아들을 데려갔다고 했으니 아마 박상현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는 그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이도 태상은 진짜 이명진이 아니기에 박상현이 숨어있는 곳이 어딘지 몰랐다. 아무래도 그 장소를 빨리 찾는 게 중요할 듯 했다.
태상은 일단 박동환에게 안심을 주기 위해 그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잘 하고 있습니다. 방금 전처럼 당신이랑 저는 단순한 사이인 겁니다. 당신이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꺼내는 순간 모든 게 물거품이 될 겁니다. 나 자신 이외에는 절대 믿지 마세요. 당신이 진실을 꺼내려는 순간 박상현의 삶은 모두 무너지게 될 겁니다.”
"네, 네! 절대 절대 아무한테도 말 안했습니다. 죽은 마누라한테도 말 안 할 겁니다. 혼잣말로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겠습니다!!”
필사적으로 박동황이 말했다.
적어도 그의 태도를 보건데, 박상현이 문제만 일으키지 않으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태상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박동환에게 얻을 정보는 모두 얻었으니 이곳에 더 이상 미련이 없었다. 서둘러 그의 아들인 박상현이 어디에서 몸을 숨기고 있는지 알아내야 한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지금 상황에선 악마 계약자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박상현이다.
태상이 정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접니다. 지금 당장 박동환씨 아들 박상현에 대한 정보 모조리 다 준비해주세요. 지금부터 한.... 3시간. 3시간 정도 걸릴 것 같네요. 그 안까지 가능 하겠습니까?”
이곳에서 일하는 곳까지 3시간이나 걸리는 건 아니었지만 태상은 굳이 그녀에게 넉넉잡아 시간을 말했다.
[박동환이라면 오늘 아침에 물어보셨던 그 사건 피의자 말씀하시는 건가요?]
“맞습니다.”
[박동환씨 정보라면 많이 있겠는데, 아들 박상현에 대한 건 단순한 인적정보밖에 없을 텐데...]
“정보가 없으면 조사 하세요. 놈이랑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 태어난 곳, 자란 곳, 출신 학교, 가족들 전부 다 말입니다.”
태상이 그렇게 말을 하고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송이에게 전화를 시작했다. 갑자기 그녀에게 전화를 건 것은 물어 볼게 있어서였다. 그리고 그가 굳이 정희에게 3시간이나 시간을 준 이유이기도 했다.
[여보세요?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어리둥절해 하는 송이에게 태상이 이사 올 때 바리바리 챙겼던 것들 중에서 유일하게 버리지 않았던 책과 서류들을 어디에 뒀는지 물었다.
태상이 싹 다 버리라고 할 때, 중요한 서류들까지 다 버리냐며 이상한 눈초리를 하자 대충 창고 같은 방 하나를 만들어 쑤셔 놓으라고 했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아~ 그거, 안 쓰는 방에다가 전부 몰아놨었어. 왜? 필요해?]
“그거 싹 다 꺼내놔 줘. 필요해졌어.”
이명진이 다락방에 쌓아 뒀던 것들이었으니, 이번 사건과 관련 된 자료가 많이 남아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을 벌였을 때, 아무런 조사도 없이 하지 않았을 테니 박상현의 자료가 그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태상은 대범하게 이런 일을 벌여놓고도 아무런 뒷수습을 하지 않은 이명진을 향해 으드득 이를 갈았다.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과속카메라를 모조리 무시하고 온 덕분인지 생가보다 빠르게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태상은 송이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곤, 곧장 그녀가 꺼내 놓은 자료부터 보기 시작했다.
송이가 점심 먹었냐며 그의 끼니를 걱정했지만 지금 그걸 걱정할 때가 아니었기에 한 귀로 듣고 흘려버렸다.
자료는 무척 방대해서 쉽게 박상현의 자료를 찾아내진 못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그가 하던 일과 관련 된 자료가 많다는 것을 깨닫고 이곳에 박상현에 대한 자료가 분명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언제 흘렀는지도 모르게 시간이 훌쩍 지나 도정희와 약속 했던 3시간을 훌쩍 넘은 시간이 됐다. 정희는 연락을 해놓고 오지 않은 태상 때문에 결국 먼저 그에게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다.
[검사님, 자료 준비해뒀는데, 일이 바쁘신가요?]
“아, 이런. 집에 있는 자료를 찾느라고 시간 가는 줄 몰랐네요.”
[집이신 거에요? 그럼...바쁘신 것 같은데 제가 이 자료 집으로 가져다드릴까요?]
정희의 뜻밖의 제안에 태상이 고민 할 것도 없이 말했다.
“그럼 자료 가져다주시고, 곧장 퇴근하시는 걸로 하시죠.”
태상이 그렇게 말하자 정희의 목소리가 갑자기 밝게 올라갔다.
[네~ 그럼 이따 봬요!! 자료 챙겨서 곧장 그리로 갈게요.]
태상은 그녀가 평소보다 일찍 퇴근한다는 말에 기뻐 그런 것이라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지만 얼마 후 초인종을 누르고 집 안으로 당당하게 들어서려는 정희를 송이가 막아섰다.
“명진이한테 얘기 들었어요. 저한테 자료 주시면 돼요.”
송이가 현관문 앞에서 떡하니 버티고 서서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기대하던 것은 송이가 아니라 태상이 나와 그녀를 반기는 것이었기에 정희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왜 여기에 계시는 거에요?!”
뾰족한 말투로 정희가 묻자 송이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내 집인데 당연히 제가 여기 있는 게 맞죠. 어서 달라니까요?”
“이 자료, 보안문서거든요? 관계자 아닌 사람한텐 절대 맡길 수 없어요. 직접 검사님한테 전달해 드릴 거니까 좀 비켜주시겠어요?”
“우리 명진이가 많이 바빠서 저한테 부탁했어요. 그러니까 그냥 저한테 주면 된다니까요.”
“안 돼요! 이 자료는 제가 직접 검사님한테 드려야 해요!”
현관문에서 송이와 정희가 실랑이를 하기 시작했다. 태상이 뒤늦게 이상함을 느끼고 밖으로 나오자 둘이 심상치 않은 기류를 내뿜으며 대치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어처구니없어하며 말했다.
“지금 둘이 뭐해?”
“검사님!”
“명진아!”
두 여자가 동시에 태상을 향해 촉촉한 눈빛을 보냈다. 태상이 휘적휘적 걸어가 정희의 앞에 멈춰 섰다. 송이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정희의 얼굴이 희망으로 밝아지려는 순간 태상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자료는?”
“아! 여기요.”
그녀가 태상의 손에 USB를 내려놓자 흡족한 듯 태상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수고했어요. 그럼 퇴근하세요.”
그가 더 이상 미련없다는 듯 휙 고개를 돌렸다. 정희는 이게 정말 끝인가 싶어 황당하게 태상을 봤지만 그는 이미 자료를 확인하기 위해 방으로 들어간 후였다.
그녀의 시야에는 득의양양한 송이의 얼굴만 보일 뿐이었다.
“그럼 안.녕.히.가.세.요.”
한 글자 한 글자 이가는 소리가 으드득 효과음처럼 들렸다. 시무룩해져 있는 정희의 몸을 휙 밖으로 밀쳐내고 송이가 쾅! 문을 닫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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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이라 저도 쉬었습니다.
월요일이네요...
월요병....으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