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2 요정 =========================================================================
요정들이 파티를 시작했다. 페앙을 구한 데 공헌을 크게 한 사로나와 태상은 반 강제적으로 참석할 수밖에 없었다. 요정들이 저마다 커진 몸에 적응하기 위해 날개를 부지런하게 움직였다.
사로나의 주변에는 여전히 요정들이 재잘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그에 비해 태상의 주변에는 요정들이 다가오지 않았다. 아니, 다가오지 않은 게 아니라 다가가지 못하는 거였다.
이렇게 된 것은 다 태상의 행동 때문이었다. 초반에 파티가 시작되자 요정들이 사로나와 태상에게 연신 고맙다며 선물을 안겨주려 했었다.
“이거 줄까?‘
수줍게 태상에게 다가 온 요정이 태상에게 꽃을 내밀어 봤지만 그가 손을 저으며 됐다고 하자 시무룩한 표정이 되어 날개를 파닥거리고 사라졌다. 그리고 그걸 시작으로 요정들이 줄을 서서 그에게 선물을 주려는 소동이 일어났다.
태상은 아주 공평하게 모두의 선물을 거절했다. 해서 요정들은 멀찍이 떨어져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태상을 훔쳐보고 있었다. 사로나가 꽃 같이 부담되지 않는 선물들을 받은 것에 비해, 태상은 조금의 작은 성의도 모두 거절하는 바람에 요정들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선의를 받았는데, 그것을 갚을 길이 없으니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다.
그동안 사로나의 말수가 적어 무섭다고 생각했었는데, 태상은 그녀보다 훨씬 더 심했다. 파티를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요정들 때문에 결국 사로나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태상이 있는 곳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냥 좀 받아주죠? 대단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저렇게 실망하는데.”
“어차피 받아봤자 애물단지인데 뭐하러요. 쓰레기 모으는 취미 없습니다.”
요정들의 선물을 쓰레기라고 칭하자 사로나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생각 같아선 버럭 화를 내고 싶었지만 솔직히 요정들의 선물은 그리 유용하지가 못했다. 그녀도 그들에게 받은 것을 어떻게 처리할지 막막했기 때문이다.
“쓰...을모 없는 건 맞지만, 그래도 겉으로 좀 상대해주면 요정들이 좀 더 축제를 즐길 수 있잖아요.”
“내가 요정들 비위까지 맞춰줘야 합니까?”
“비위를 맞춰달라는 게 아니라 그냥 상대를 해달라는 거였어요. 요정들을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있잖아요.”
태상은 확실히 요정들이 가까이 오는 걸 싫어했다. 필요한 대화 이외에 그들이 태상에게 접근하는 것을 무척이나 거북스러워했다. 요정들이 바보는 아니기에 은연중 그것을 느끼고 그에게로 다가가지 못한 것이다.
“그건 그쪽도 마찬가지잖아요. 내가 요정들한테 해줄 수 있는 일은 이미 모두 다 했습니다. 그 이상은 해줄 이유도, 마음도 없습니다.”
냉정한 말이었지만 사실 사로나도 그의 마음과 똑같았다. 요정들의 호의를 겉으론 받아주긴 했어도 그들에게 정을 붙이지 않으려 노력했다.
자신의 사정이 특별하지 않았다면 요정들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모두가 떠나버렸던 것처럼 그녀도 이곳을 떠났을 것이다. 아주 오랜만에 만나는 요정들의 조건 없는 환대와 관심이 꽁꽁 얼어버렸던 그녀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았다면 말이다.
“역시 맞네요. 요정들은 페앙이 직접 한 거라고 생각하지만, 당신이 무슨 수를 쓴 거 맞죠?”
죽어가던 페앙이 갑자기 살아났다.
그게 스스로 자가 치유를 해서라는 건 말이 되질 않는다. 분명 누군가가 수를 쓴 게 분명한데, 이곳에서 그런 수를 쓸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자는 태상밖엔 없었다. 하지만 태상은 자신의 행동을 그다지 드러내고 싶지 않은 듯 했다.
그녀의 질문에 두루뭉술하게 글쎄요 하고 대답을 했던 것이다.
“그동안 이곳에서 뭘 했던 건지 모르겠네요. 범인을 눈앞에 두고 계속 못 찾고 있었다니. 투명화 능력을 가진 자라고 생각도 못했어요. 당신 아니었으면 지금도 계속 헛다리만 짚고 있었겠죠.”
그를 고문까지 했음에도 여직 화가 다 풀리지 않은 건지 사로나의 눈빛이 사나웠다.
“좀 더 고통스럽게 죽였어야 했는데...”
익숙지 않은 일을 하며 정보를 빼내야 하다보니 손속이 과했는데, 결국 놈이 죽어버렸다. 사로나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태상은 그런 사로나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요정들이 괜히 무서운 여자라고 말한 게 아닌 듯싶다.
그가 자신이 페앙을 살렸다 말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이 보양식이라 그렇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했다고 하면 어떻게 했냐고 물어볼 테고, 거기에 대고 내 피를 줬더니 살아났다 말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저 무서운 여자가 자신의 피를 뱀파이어처럼 뽑아 먹을지도 모른다.
태상이 말을 돌리려는 의도 때문인지 괜스레 질문을 했다.
“근데 그쪽은 왜 혼자 다닙니까? 길드 없어요?”
“그쪽은 왜 혼자 다니는 데요?”
태상의 질문에 사로나가 질문으로 대답을 해왔다. 태상은 요정이 가져다준 꿀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 술은 쓰다기보단 단 맛이 강했다.
“내가 먼저 물어봤는데.”
“......”
사로나가 대답을 할지 말지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이내 입을 열었다.
“소속되어 있던 길드에서 나왔어요. 그래서 혼자 다녀요. 그쪽은요?”
“난 아예 길드에 든 적이 없습니다. 여태까지 나 이외에 혼자 다니는 사람을 못봤는데, 그쪽이 처음이네요.”
사로나가 태상의 말에 잠시 자신이 잘못 들었나 고개를 갸웃했다.
“길드에 아예 안 들었다고요?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다는 거에요? 초보때에도요?”
이곳에서 지내본 결과 초보 땐 무조건 거의 길드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그녀도 초보시절엔 길드에 들었었다. 하지만 한 번 길드에 들게 되면 초보시절 받았던 도움 때문에 탈퇴를 할 수가 없어진다. 탈퇴를 하려면 많은 것들을 내어주어야 했다.
그 모든 것을 감수 하고서 그녀는 길드를 탈퇴한 상태였다. 덕분에 그동안 알고 지내던 이들과는 완전히 척을 진 상태였다.
초반에 길드는 초보자인 그녀에게 아주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도움은 착취로 변해갔다. 그동안 받아왔던 것들을 대가로 그녀에게서 자유를 빼앗아간 것이다.
태상이 우려하던 것처럼 말이다. 그녀가 말도 안 된다는 눈빛을 보내자 태상이 어깨를 으쓱했다.
“여기에서 그리 오래 지낸 건 아니지만, 굳이 필요 없는데 길드에 메일 필요 없지 않나 싶어서. 뭐 잘못 됐습니까?”
“아뇨, 잘못은 아니죠. 아니, 오히려 잘하셨네요. 굳이 필요성을 느끼지 않으면 들 필요 없죠. 솔직히 길드에 드는 거 추천 안 해요. 처음에야 좋죠. 해주는 것도 많고 도움도 많이 주니까요. 근데 그거 나중 되면 다 배상해야 해요. 아니, 그 이상으로 노예처럼 결정을 따라야 하죠. 자유권이 없어져요. 믿기진 않지만 아직까지 길드에 안 들었다면 그냥 쭉 그렇게 버텨보세요. 그게 훨씬 좋을 거에요.”
라마스도 그렇고, 다른 이들도 그렇고 모두가 길드에 들라고 할 때 처음으로 그와 마음이 맞는 이가 나타났다. 태상은 문득 궁금증이 들어 충동적으로 그녀에게 물어봤다.
“만약 개인적인 자유를 주는 길드가 있다면 들 겁니까?”
태상의 말에 사로나가 어림없다며 피식 웃었다.
“그런 길드는 없어요. 이미 거대 길드가 다 장악했고, 그들은 절대 지금 같은 체계를 깰 생각이 없을 거에요. 그렇게 계속해서 사람들을 모아 키우고, 써먹는 게 효율이 좋으니까요.”
“굳이 그런 길드를 찾을 필요 없이 만들면 되잖아요. 언제까지 이렇게 혼자 다닐 순 없을 테고, 나도 등급이 올라가면 혼자서 깰 수 있는 등급 한계가 있을 텐데, 그럼 결국 길드에 들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쪽도 길드에서 나오긴 했지만 C등급 미션이나 전전하고 있잖아요.”
지금 이 미션이 특별했기에 오랫동안 시간을 끈 것이지, 그녀가 C등급 미션에 전전할 능력자로 보이진 않았다. 적어도 A~B등급 미션을 할 충분한 능력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혼자라는 약점이 있었다. 그래서 C등급 미션밖에 할 수 없었을 게 분명하다.
태상은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절대 길드에 들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나중을 위해 길드에 들어야 하는 게 불가피하다면 차라리 그의 입맛에 맞는 길드를 만드는 게 이득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설마 저랑 같이 길드를 만들자는 거에요?”
“누굴 키우니 마니 그딴 거 신경 끄고, 마음 맞는 정예들로 길드를 꾸리면 좋을 것 같지 않습니까?”
“그게 가능할 리 없어요. 길드에 들지 않은 사람이 있을 리 없어요. 다들 길드에 들어가야 이곳에서 안전하게 지낼 수 있다고 믿으니까요. 안전감과 소속감을 버리고 나온 사람들이 나 말고 더 있다고 생각해요? 아니, 있다고 해도 그런 사람을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어요.”
사로나도 사실 말 할 수 없는 그 일이 아니었다면 길드를 버리고 나올 결심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곳에 지내면서 쌓은 인연들을 모두 다 버리고 온다는 건 엄청난 결심히 필요했다.
오랜 시간동안 이미 딱딱하게 굳어져 내려오고 있는 게 바로 길드였다. 초보는 반드시 길드에 들어 성장을 해야 하고, 초보자 시절에 도움을 받았던 자들은 후에 그것을 능력으로 갚아야 한다.
“나도 솔직히 그럴 거라 생각해서 길드 만드는 거 생각 못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만났잖아요. 우리 둘 다 길드가 없고, 지금의 길드 시스템은 마음이 들지 않죠. 두 명이 같은 마음인데 더 많은 사람들이 같은 마음을 갖고 있을 가능성 있지 않습니까?”
“.......”
아예 생각 할 것도 없다는 듯 말을 하긴 했지만 사로나의 마음이 아예 흔들리지 않은 건 아닌 듯 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옅게 떨리고 있었다. 태상이 그걸 보면서 말했다.
“싫으면 말고.”
“누, 누가 싫대요? 그냥 말이 안 된다는 거죠! 설마 지금 당장 결정하라는 건 아니죠? 지금 나한테 장난 하는 거 아니에요?”
사로나가 혼란스러워하거나 말거나 태상이 다시 꿀 술을 홀짝였다.
평소 단 것을 그리 즐기지 않는데, 한 입 먹어보니 나름 괜찮았다. 처음 맛은 달디 달지만 끝 맛이 씁쓸해 그의 입맛에 의외로 맞았던 것이다.
“미래를 생각해봤을 때, 그리 시간 걸리는 선택지는 아니라고 보는데.”
사로나가 재촉하지 말라며 신중하게 결정하겠다고 하자 태상이 어림없다는 듯 그녀에게 말했다.
“내 눈 똑바로 봐요.”
태상은 그녀와 시선을 마주보기 위해 몸을 돌리고, 덩달아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자신에게로 당겼다. 그의 힘에 의해 몸이 돌아가 시선이 마주치자 갑작스러운 제안에 놀란 그녀의 눈동자가 마음을 그대로 내보이고 있는 게 보였다.
“지금부터 쓸데없는 생각 다 버리는 겁니다. 당신 머릿속 생각들 전부 다 나한테 집중하세요.”
“......”
“평생 여기서 C등급 미션이나 깨면서 혼자 떠돌아다닐 겁니까? 사람이 그 자리에서 제자리걸음만 하고 살면 그게 사는 건가? 한 번 사는 인생 재밌게 살아야죠. 안 그래요?”
씨익 웃으며 말하는 태상의 얼굴엔 숨길 수 없는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그의 모습에서 자신감을 넘은 그 무언가를 똑똑히 목격했다.
“자, 이제 선택하는 겁니다. 나랑 할래요, 말래요.”
“.....”
조금 더 시간을 달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그의 눈동자에 잡아먹힌 듯 그 소리를 입 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이건 선택이 아니라 강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끝내 그 모든 말을 목구멍 속으로 삼키고 태상이 원하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밖에 없었다.
“....할게요.”
“좋네. 그 선택,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태상이 만족한 듯 그녀의 어깨를 놓아주었다. 사로나는 귀신에 홀렸다가 깨어난 것 마냥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
“말도 안 돼. 나 방금 하겠다고 한 거야?”
이렇게 신중하지 않게 선택한 건 그녀의 인생에서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멋모르고 사람들을 따라 길드에 들었던 것이고, 두 번째는 바로 지금이었다. 태상은 박수를 짝! 치곤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 해보자.”
“......”
사로나가 억울한 표정을 담아 태상을 바라봤지만, 이미 한 선택을 되돌릴 순 없었다. 태상은 이럴 때 쓸 적절한 말을 알고 있었다.
“난 내 사람한텐 존댓말 안 써. 꼬우면 너도 반말하고.”
꼭 한 번 써먹어보고 싶었던 말이었다. 태상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이로써 아직 이름조차 정해지지 않은 태상의 길드가 첫 번째 길드원을 맞이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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