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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자-31화 (31/251)

00031  요정  =========================================================================

“저기가 가장 은신하게 좋은 곳입니다. 하지만 이미 여러 차례 살펴봐도 놈은 없었습니다.”

그녀의 말대로 그곳은 확실히 은신하기 좋은 곳이 맞았다. 멀리서 보기엔 넝쿨에 가려 공간이 있는 게 보이지가 않았지만 가까이 다가가보니 제법 널찍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사방이 흙으로 되어 있었으나 땅 부분에는 잔 돌멩이가 없어 잠을 자거나 생활하는 데 아주 좋아 보이는 평평하고 아늑한 땅을 만들고 있었다.

만약 태상이 숲속에서 며칠 동안을 지내야 한다면 바로 이런 곳을 골랐을 것이다.

“여기가 가장 은신하기 좋은 곳이다 이 말이죠?”

“예. 하지만 보다시피 아무도 없습니다.”

태상이 넝쿨을 치우고 안으로 들어가 땅에 손을 가져다댔다. 사로나가 그의 행동의 뜻을 몰라 어리둥절한 얼굴로 쳐다봤다. 태상은 땅 이곳저곳에 손바닥을 대보다가 이내 씨익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따듯하다. 놈은 분명 이 근처에 있어.’

태상이 넓찍한 땅굴을 쭈욱 훑었다. 하지만 누군가의 인기척도 느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요정을 처음 만났을 때처럼 아무 것도 없는데도 무언가 있을 것 같은 강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그의 레이더가 찌릿찌릿거리며 그의 온 몸에 신호를 보내오고 있었다.

이곳에 그가 찾고 있는 놈이 반드시,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태상이 티를 내지 않으려 하며 그녀에게 말했다.

“정말 아무도 없군요.”

“네, 없어요. 제가 말 했잖아요. 몇 번이나 확인 했다고요.”

사로나는 자꾸만 같은 대답을 하게 하는 태상이 답답한 모양인지 뾰족하게 말했다. 태상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단검 있습니까? 넝쿨을 좀 자르고 싶은데.”

“....여기요.”

그를 못 마땅하게 여기면서도 품에서 단검을 하나 꺼내 주자 태상이 그 단검을 쥐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 넓게 범위를 지정한 뒤 능력을 사용했다.

처음 사용했을 때엔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두 번째로 사용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사로나가 눈을 크게 뜨고, 어느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없던 공간에서 낯선 남자가 서 있는 게 두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남자는 여유롭게 히죽거리며 태상과 사로나를 구경하고 있었다. 자신의 능력이 풀린 줄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상태였다.

태상이 한 발작 한 발작 놈을 향해 다가갔다.

그놈은 자신과 눈을 정확히 마주하며 다가오는 태상의 행동에 점점 당황으로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뭐지? 저놈은 분명 날 보지 못할 텐데...?’

당황으로 인해 남자의 눈동자가 심하게 떨려왔다. 그리고 마침내 태상이 그의 앞에 섰을 때, 남자는 비로소 자신의 능력이 무용지물 됐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남자가 그럴 리가 없다는 듯 다시 한 번 능력을 사용해봤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태상이 씨익 웃으며 사로나에게 받은 단검을 놈의 목에 겨눴다.

“네가 납치해간 요정들 다 어따 숨겼냐? 좋은 말로 할 때 부는 게 좋을 거다. 아주 성격 무서운 여자가 내 뒤에 서 있거든.”

당연하게도 태상이 말하는 이는 사로나였다.

남자와 똑같이 당황스러워하던 사로나가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무기를 꺼내들고 남자를 향해 겨눴다. 그녀의 날카로운 검까지 더해지자 남자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어, 어, 어떻게? 내, 내가 보여?”

“보이니까 너랑 내가 지금 눈을 마주친 거 아니겠어? 그래서, 네가 납치해간 요정들 다 어디 있냐?”

태상의 눈빛에서 살기가 피어오르고,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험악해졌다.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어! 너희들이 어떻게 나를 봐? 난 분명 능력을 사용 했다고!"

그때, 사로나가 놈의 멱살을 잡아왔다. 그녀는 주로 검을 사용하기에 기본적으로 힘이 아주 쌨다. 그녀가 한 손으로 번쩍 놈을 들어 올리자 남자가 컥컥 숨을 몰아쉬며 고통스러워했다.

“말해!!! 요정들을 어디로 데려갔지??!! 도대체 무슨 수로 갑자기 나타난 거냐!!”

그녀는 태상이 수를 쓴 거라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태상의 무력화 지속 시간이 끝났고 놈이 사로나의 몸을 발로 버둥거리며 차버리고 또 다시 능력을 사용해 투명해졌다. 태상이 어림없다는 듯 허공에 대고 단검을 그었다.

“크아악!”

허공에서 길쭉한 상처가 나타나면서 그 안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타격을 입으면 능력이 풀리는지 놈의 몸이 다시 나타나 바닥을 뒹굴었다. 사로나는 놈이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니라 원래부터 이곳에 있었던 것임을 깨달았다.

“네 놈 능력이 투명화구나!!”

그래서 그동안 그를 찾지 못했던 것이다. 사로나는 이를 의심해보지 못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놈이 또 다시 도망치지 못하도록 더욱 힘주어 꽉 잡았다. 그녀는 우선 놈이 힘을 쓰지 못하도록 그의 아킬레스건을 잘라버렸다.

“아아악!!”

놈은 전투 능력은 거의 없는 놈인 듯 했다. 제대로 된 공격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사로나에게 완전히 제압 당해 바닥을 뒹굴었다. 아마 그곳을 잘렸으니 앞으로 제대로 서서 걷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아니, 이제 곧 죽을 테니 걸을 기회조차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찾은 거죠? 분명 당신이 무슨 수를 쓴 것 같은데.”

사로나가 애써 흥분을 가라안지고태상에게 물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모른다는 얼굴을 하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어찌됐든 범인을 찾았으니 이제 사라진 요정들이 어떻게 된 건지, 그리고 이곳에서 숨어서 무슨 짓을 꾸미고 있었는지 알아내야 할 시간이네요.”

“....말해주기 싫다는 거군요. 알겠습니다. 굳이 실례되게 자세히 묻지 않겠습니다. 대신 이놈을 상대하는 건 제게 맡겨주세요. 제가 알아내겠습니다.”

그녀는 한치 망설임 없이 그렇게 말했다. 으드득 이를 가는 것이 여간 분노가 쌓인 게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금 태상이 한 말은 사람을 고문을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여자가 하기엔 다소 격한 감이 많은 일이었다. 그걸 알 텐데도 사로나는 한 치 망설임이 없어보였다.

하긴, 사람 아킬레스건을 망설이지 않고 잘라버리는 여잔데, 고문이라고 못할까.

태상은 생각보다 유용한 듯 보이는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나야 그럼 좋고.”

굳이 나서서 한다는데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나서서 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전투를 좋아하는 거지, 남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며 즐기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물론 이 일이 그걸 보면서 즐거워하려고 하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사로나는 놈을 요정들에게 데려가지 않았다. 요정들은 무척 순수한 존재라서 고문이니 뭐니 하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 그녀는 악마 계약자를 데리고 으슥한 곳을 찾아 움직였다.

그곳에서 놈에게 모든 것을 자백 받고, 납치 된 요정들을 찾으러 갈 생각이었다.

태상은 그녀에게 악마 계약자를 맡기고 먼저 요정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놈에게서 자백을 받는 데에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는 모르겠으나 그리 오래진 않을 것이다. 악마 계약자는 고통에 익숙하지 않은 놈이었다.

그런 놈들은 쉽게 모든 것을 불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사로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짙은 피비린내를 풍기며 요정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냄새를 잘 맡는 요정들 때문인지 몸에 옅은 물냄새를 풍기며 돌아왔는데, 솔직히 무용지물이었다.

그도 맡을 정도의 비릿한 향기가 온 몸에 풍겼기 때문이다. 아마 악마 계약자의 피로 온 몸을 씻고 온 건가 의심이 들 정도의 피비릿내였다.

“다행히 요정들을 악마에게 넘겨지지 않고 무사했습니다. 요정들은 다른 곳에 가둬두고 페앙을 죽이려고 수를 썼더군요.”

“아직 넘어가지 않았다니 다행이네요. 그런데, 페앙을 죽이려고 했다고요? 나무가 약해진 게 요정 때문이 아니었다니, 그럼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겁니까?”

“독이요. 은밀하게 페앙의 뿌리에 접근해서 독을 썼답니다.”

“독?! 독이라면 해독제가 필요 한 거 아닌가? 그놈이 해독제를 갖고 있었습니까?”

“......”

태상이 놀라 묻자 사로나의 얼굴이 어두웠다. 그리고 역시나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안타깝게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인체에는 무관해서 굳이 갖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고 하더군요. 오직 식물만을 죽이는 독이라고 합니다.”

“그럼 페앙을 어떻게 살리죠?”

해독제가 없고, 이미 독을 사용했다면 방법이 없는 거였다. 페앙이 스스로 자가 치유를 하지 않는 한 말이다. 사로나도 뾰족한 수가 없는지 침묵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페앙이 죽으면 요정들도 다 죽을 텐데.”

태상이 복잡한 듯 머리를 거칠게 털어냈다.

우우우우우우웅- 우우우우우웅-

그때였다. 갑자기 페앙의 몸 전체가 떨리며 거대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태상와 사로나가 무슨 일인가 싶어 놀라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페앙의 몸은 계속해서 떨고 있었다. 주변에 요정들이 안절부절 못하며 눈물을 흘렸다. 바람에 굴러가는 낙엽만 봐도 꺄르르꺄르르 웃던 요정들이 저렇게 서럽게 우는 것을 보니 태상의 마음도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페앙!”

사로나가 놀라 요정들에게로 가버리자 홀로 남은 태상이 나무 기둥 껍질을 손으로 쓸어봤다. 물기 하나 없이 팍팍하고, 군데군데 썩어 끈적끈적한 이물질이 흐르고 있었다. 단순히 만졌을 뿐인데, 후두둑 나무껍질이 벗겨져 나갔다. 분명 새파란 잎들이어야 했을 나뭇잎들도 바짝 말라 이곳저곳에 수북히 떨어져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더 빠르게 일이 진행되어가고 있었다. 이럴 때 인드고의 눈물이 있었다면 페앙을 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태상은 괜스레 아쉬움이 남았다.

인드고의 기운은 지금도 태상의 몸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고 있었다. 태상이 몇 번 연습 끝에 무력화 능력의 범위를 늘릴 수 있었던 것도 인드고의 눈물을 섭취했기에 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인드고의 눈물은 그만큼 엄청난 기운을 품고 있었다.

죽어가는, 아니 거의 죽었던 태상을 살리고 더 많은 힘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남아 그의 몸을 맴돌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의 몸 안에 있는 인드고의 기운을 조금만 페앙에게 주어도 살아 날 수 있을 것 같은데....하는 생각이 들었다.

“......”

태상은 잠시 고민하다가 사로나에게서 잠시 빌렸다가 아직 돌려주지 못한 단검을 꺼내들었다. 그는 생각을 굳힌 듯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손바닥을 단검으로 그어 피를 냈다.

투두둑-

진한 붉은 피가 갈라진 손바닥을 타고 내려가 바닥에 뚝뚝 굵직한 방울로 떨어졌다. 태상이 아릿한 통증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의 몸을 맴돌고 있는 인드고의 눈물 기운이 그의 손바닥 상처를 빠른 속도로 아물게 하기 시작했다. 피가 몇 방울 더 떨어진 것을 끝으로 방금 전 그가 자신의 손바닥을 단검으로 그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게 상처조차 남지 않고 모두 아물어버렸다.

태상은 직접 눈으로 보고도 믿겨지지 않는 광경에 헛웃음을 지었다.

“뭐야, 어마어마하잖아.”

혹시나 자신의 몸속에 남아 있는 인드고의 눈물 기운이 피를 통해 전달되진 않을까 싶어 손바닥에 상처를 냈던 태상이었다. 하지만 그는 순식간에 치료가 되어버린 자신의 손바닥을 보느라 바닥에 떨어진 피가 어떤 기적 같은 효과를 내고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파르르- 파르르-

그리고 그때. 사방에서 줄기가 뻗어 나오며 하늘을 향해 솟아났다.

태상이 놀라 고개를 하늘로 올리자 줄기는 저 먼 우주에 닿을 듯 계속해서 뻗어 가다가 이내 멈춰 섰다. 그리고 어디선가 우두둑 우두둑 하는 뼈 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태상은 갑자기 위로 솟은 줄기의 색깔이 죽어가던 노랗고 퍼석퍼석한 녀석이 아니라 탱글탱글함을 지닌 튼튼한 줄기임을 보고 설마 하며 바닥을 내려다봤다.

어디선가 감격에 가득한 요정의 목소리가 태상의 귓가에 콕 하고 와 박혔다.

“페앙이 살아나고 있어!!!”

“페앙! 기운 내! 할 수 있어!!”

“페앙!”

연신 요정들이 페앙의 이름을 외쳤다. 그녀에게 기운을 내라며 응원을 해주고 있는 것이다. 태상은 페앙의 몸집이 예전보다 더 거대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째 살려내는 건 둘째 치고 엄청나게 키워버린 것 같은데...”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페앙의 몸집이 전의 2배로 더 커졌던 것이다. 이젠 웬만한 악마라도 쉬이 그녀를 넘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강해지면서 요정들도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너 몸이 커졌어!”

“너도 몸이 자라나고 있잖아! 우리 둘 다 커졌...아니, 우리 모두 다 커지고 있어!”

요정들의 키가 쑥쑥 자라났다. 페앙이 강해졌기에 그 기운이 요정에게도 미친 것이다. 4~5살 정도 되어 보이던 요정들의 몸이 10살~12살 짜리 몸으로 변하고 있었다.

‘도대체 나 뭘 먹은 거야?’

태상은 마치 자신이 보양식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어찌됐든 페앙이 살았기 때문에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았지만 말이다.

============================ 작품 후기 ============================

선작수가 안 늘어나네요. 슬퍼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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