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5 피해자와 가해자. =========================================================================
그렇다면 자신을 이렇게 만든 놈이 바로 눈앞에 있는 저 놈이 범인이라는 뜻이었다. 저들은 계약을 하기 위해 뭐든 소원을 들어주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저들이 생각 못한 것이 있다면 태상이 그 피해자라는 걸 몰랐다는 것에 있었다. 태상은 혹여 놈이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건가 싶어 놈의 행동을 유심히 살폈지만 그런 모습을 내보이지는 않았다.
[그대가 원하는 것이 그것입니까?]
그는 한 시라도 빨리 계약을 원하는 건지 일을 서둘렀다. 태상은 놈이 자신의 몸을 차지해서 그 모든 것을 대신 누리고 있을 거라 생각하기 피가 거꾸로 솟았다. 그놈을 당장 찾아내어 가만히 두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당장 그에게 그렇다고 말을 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소원을 빌게 되면 자신은 놈에게 계속 부림을 당해야 하는 입장 된다.
그는 누군가가 자신을 부리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다. 부림당하는 것보다 부리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의 제안은 전혀 솔깃하지가 못했다.
그걸 빤히 다 알면서도 그는 결국 자신이 소원을 빌 수밖에 없는 처지라는 것에 생각이 닿았다. 계약을 해야 몸을 빼앗은 개자식한테서 몸을 다시 되찾을 수 있었다. 계속 이딴 황당한 몸에서 살 순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러니 결국 놈에게 소원을 빌 수밖에 없는 상황인 거다.
[단 하나의 소원이긴 하지만 절대 얻지 못했던 그 무언가를 얻게 될 겁니다. 절대 손해 보는 일은 아닐 겁니다.]
그는 꽤나 당당했다. 반드시 너는 나와 계약을 할 수 밖에 없을 거란 확신을 갖고 있어 보였다. 하긴, 이런 달콤한 제안을 어떤 미친놈이 거절하겠는가. 물론 자신의 몸이 바뀌지 않고 저 자와 만났다면 그는 생각해볼 것도 없이 놈의 제안을 거절했을 것이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자신에겐 부족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자인 부모님에 사랑을 주는 어머니가 계셔 외롭지 않았다. 여자는 돈 때문인지 뭐 때문인지 그가 사랑만 준다면 너나 할 것 없이 그에게 맹목적으로 달려들었고, 무언가를 배움에 있어서도 절대 남보다 뒤지지 않았다.
한 번도 1등을 놓쳐 본 적 없는 특별한 삶을 산 그였다.
그런 그가 부족한 게 있을 리가 없었다. 부족한 게 있다면 금방 채워졌을 것이고 말이다.
명예도 아버지가 그에게 회사를 물려주시면 얻을 것이고, 만약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생긴다면 첩으로 들여 즐기면서 살면 됐다. 부, 명예, 권력, 사랑. 이 네 가지 중 한 가지도 부족하지 않은 게 바로 태상의 삶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삶을 빼앗긴 태상은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자신만만해 하는 것처럼 태상도 어쩔 수 없이 놈과 계약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놈의 자신만만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화가 날 것 같아 그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강호 그룹의 회장 아들이 하나 있어. 강태상이라고 하는데 그 놈의 몸과 날 바꿔줘. 그게 내 소원이다. 뭐든 다 할 수 있다고 했으니 해 줄 거지?”
[물론입니다.]
그는 태상이 소원을 이야기하자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는 이제 그의 소원이 이뤄질 거라며 눈을 감으라고 말했다. 태상이 얌전히 그의 말을 따라 눈을 감았다.
[나의 이름은 라마스. 앞으로 그는 나의 계약자가 될 것입니다.]
라마스는 태상의 머리 위에 닿지 않을 정도로 손을 가까이 가져다대고 계약을 시작했다. 그의 손끝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와 눈을 감고 있는 태상의 몸을 감쌌다. 번쩍이는 빛이 태상의 몸을 감싸는데, 그때 갑자기 전구가 나가듯 팍! 하고 빛이 사라졌다.
[.....!?]
라마스는 갑작스러운 현상에 한껏 당황했다. 갑자기 이렇게 전구가 나가듯 팍! 빛이 나간다는 건 그의 소원을 들어 줄 수 없을 때 생기는 현상이었다. 라마스는 왜 이것이 불허가 되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언제 바뀌는 거야?”
얼마나 눈을 감고 있었을까?
한 오 분 정도 지난 것 같은데, 영 바뀔 신호가 없자 결국 참지 못한 태상이 눈을 뜨고 라마스에게 물었다. 그러자 라마스는 한껏 당황스러워하며 상황을 설명했다.
[그대의 소원이 불허됐습니다.]
“...뭐라고? 뭐든 들어 주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대의 소원은 분명 들어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불허 되었는지는 저도 잘 알...아!]
모르겠다며 고개를 젓던 라마스가 갑자기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그는 허공을 바라보며 잠시 이상한 행동을 하더니 태상에게 말했다.
[당신이 지목한 대상은 저희들이 건드릴 수 없는 자입니다. 그래서 불허가 된 거로군요. 그자 말고 다른 이가 되길 원하진 않습니까? 다른 이로 바꾸면 당장 그 소원을 들어줄 수 있습니다]
태상은 라마스의 말에 와락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다른 사람이 되길 원하지 않는다. 오직 자신의 몸을 되찾길 바랄 뿐이었다.
“아니, 난 그 몸 아니면 안 돼. 왜 그 몸은 손 댈 수가 없다는 거야? 그 자가 뭐기에?”
[강태상, 그 자는 악마 쪽 소속 사람입니다.]
“......악마..쪽이라고? 그럼 악마 놈들도 너희랑 똑같은 짓을 하고 다니는 거였어?”
[네. 사실 이 일은 악마들이 먼저 시작한 일이었습니다. 저희들은 악마에게 대항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처음엔 이들이 수작을 부려 자신의 몸을 빼앗겼다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건 아닌 듯싶었다. 앞으로 그의 적이 되어야 할 악마 쪽에서 그런 짓을 저지른 거라는 걸 알게 된 태상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사실 내가 바로 그 강태상이다.”
태상은 라마스에게 자신의 상황을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보다시피 난 지금 강태상이었고, 지금 네 앞에 서 있는 이 몸의 주인이 악마와 계약을 하면서 나와 몸을 바꿔달라고 했어.”
[.....]
라마스는 그제야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왜 강태상이 아니면 안 된다 했는지 말이다. 라마스는 그가 처음엔 우리들을 의심했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저를 의심 하셨겠군요.]
“그래, 계약을 지킬 생각도 없었어. 원래대로 몸이 돌아가면 네놈 면상에 주먹 하나 날릴 요량이었거든. 근데 이게 네 소행이 아니라 악마 놈들 소행이다 이거라는 거지. 일단 그렇다면 우린 목표가 같아 진 거야. 난 나한테 이딴 짓을 하게 한 놈들을 용서할 생각이 없어.”
그의 눈빛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원래 몸이 바뀌게 되면, 계약자가 아닌 자는 본래 갖고 있던 기억이 모두 사라지게 된다. 그래야 뒤탈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가 모두 기억을 갖고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미 내정 된 라마스의 계약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계약 내정자는 몸이 아닌 영혼에 표식을 새기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적당한 시기가 되면 내정자에게 이동하여 그와의 계약을 진행하는 것이다.
다만 계약자와 계약내정자는 신분 차이가 있기 때문에 악마의 술수에서 벗어나진 못하고 당한 것이다. 뒤늦게 라마스는 영혼을 쫓아 그와 계약을 위해 찾아 온 것이니 몸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고 말이다.
지금 상황에선 태상은 라마스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게 맞는 걸지도 모른다. 그가 태상을 계약 내정자로 선택했기에 기억까지 소멸되는 것을 피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가뜩이나 증오스러운 악마 놈들에게 자신의 계약자가 당했다는 말을 듣자 라마스도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몸을 되찾게 해드릴 순 없지만 복수는 해드릴 수 있습니다. 아니, 당신은 이런 일을 다른 이에게 맡기는 걸 즐기지 않을 듯싶군요. 그렇다면 당신의 모든 걸 빼앗은 그자를 함께 없애지 않으시겠습니까? 스스로, 직접 힘을 길러 말입니다.]
이번에 한 라마스의 말은 태상의 귀를 솔깃하게 만들었다. 몸을 바꾸지 못한다면 자신의 몸을 차지한 그놈이라도 죽여야 분이 풀릴 것 같았다. 자신의 것을 빼앗고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줄 알았다면 큰 오산이었다.
본래 당한 게 있으면 직접 갚아줘야 분이 풀리는 태상이다. 그의 제안이 솔깃하다 못해 거의 넘어갈 지경이었다.
“내게 얼마나 큰 힘을 줄 수 있지? 소원에 강해지게 해달라고 하면 안 되나?"
태상이 그놈을 향한 증오를 담아 이를 으드득 갈면서 물었다.
[죄송하지만 그 부분은 저희들이 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강해지는 것은 본인 스스로의 노력이 필요한 일입니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있었다면 진작에 여러분들을 강해지게 만들어 악마들과의 싸움을 끝냈겠죠. 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리자면, 노력하면 강해지실 수 있을 겁니다. 원하고 갈망하는 만큼 말이죠.]
그 유혹적인 말에 태상은 결국 넘어가고 말았다. 하지만 무엇이든 다 들어주겠다고 했으면서 안 되는 것이 참 많은 그에게 투덜거리긴 했다.
"뭐든 다 된다면서 안 되는 게 은근히 많구나 너네?"
불만은 있으나 이미 결정한 것을 두고 시간을 끄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좋다. 소원을 정했어. 나와 피를 이룬, 내 가족들 전부 다 악마니 천사니 그런 것들에게 나처럼 피해를 받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줘. 아까 얘기했었지? 이명진 그 놈이 악마 계약자라서 내 소원을 들어줄 수가 없다고. 우리 가족 모두가 그 소원 때문에 피해보지 않게 해줬으면 좋겠어. 물론 당연히 강태상 내 진짜 몸의 핏줄 말이야. 내 가족이 나와 똑같은 일을 겪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피가 거꾸로 솟을 것 같거든.”
그것 빼곤 더 이상 그에겐 원하는 게 없었다.
아니, 원하는 게 없는 게 익숙했기에 지금도 그럴 거라 생각하고 그런 소원을 빈거였다. 그는 몸이 바뀌긴 했지만 돈이 없는 삶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는 게 많았다.
때문에 그는 가족을 위해 소원을 사용했다.
서로 회사 일 때문에 얼굴 붉히는 일이 가끔 있긴 하지만 그래도 가족이다. 라마스는 당연하게도 소원으로 강한 힘을 달라 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것을 다른 이들을 위해 말하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당신의 소원은 이뤄질 것입니다.]
라마스의 자애로운 미소와 함께, 또 다시 태상의 몸에 빛이 서렸다. 그 빛은 저번처럼 꺼지는 게 아니라 태상의 몸 안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태상은 라마스와 계약이 체결되었다는 것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그와 태상의 몸이 보이지 않는 튼튼한 끈에 묶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태상이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더듬었다.
“뭔가 기분이 묘한데?”
무언가가 바뀐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이상한 기분이었다.
라마스는 새롭게 생긴 자신의 힘을 완전히 각성하기 위해서는 거쳐야 할 게 있다고 말해왔다.
“일명 초보자 퀘스트 같은 건가?”
게임을 할 때에도 처음에 시작을 하게 되면 조작방법을 알려주는 법이다. 라마스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자니 그가 그걸 말하는 것임을 알았다. 태상은 선뜻 고개를 끄덕이며 하겠다고 나섰다.
“긴 말 할 것 없이 당장 하자고.”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때가 왔을 때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라마스는 고개를 저으며 서두르는 태상을 말렸다. 그는 그 때가 언제인지를 물으려 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시야가 180도 또 다시 돌면서 다락방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동시에 계단 아래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명진아! 다락방에 있어?”
“......”
다락방을 가득 채우고 있던 이상한 문양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져 있었다. 태상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방금 전 일들이 또렷했음에도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손목에 나 있는 문신을 보며 그것이 꿈이 아님을 알았다. 그의 손목에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문양이 문신처럼 새겨져 있었다.
태상은 계단을 내려가 송이가 있는 주방으로 갔다.
식탁에는 언제 차렸는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죽과 소박한 반찬들이 차려져 있었다. 음식 냄새가 콧속으로 들어가자 그제야 배꼽시계가 울리는지 꼬르륵 소리를 냈다.
태상이 자리에 앉아 앞치마를 한 송이가 그의 옆에 물컵을 놓아주고, 맞은편에 앉았다.
“급하게 끓이느라 시간이 좀 걸렸어. 먹어 봐. 너 삼 일 동안 아무 것도 안 먹어서 꼭 죽 먹으래. 취향 아니더라도 꼭꼭 씹어서 먹어야 해. 알았지?”
“......”
태상은 묘한 표정으로 식탁을 바라봤다.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 죽은 원래 자신이 아니라 명진이 받았어야 할 죽이었다. 그런데 그걸 자신이 받고 있으니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죽 싫은데."
태상이 괜스레 퉁명스럽게 말했다.
지금이라도 이 여자에게 자신은 이명진이 아니라고 말할까 하는 고민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이명진에 대해 알아야 했다. 그가 어떤 인물인지 알아야 이 생활에 적응할 수 있고, 복수도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 결국 저 여자를 지금 당장 버릴 순 없었다.
숟가락을 들어서 죽을 떠먹었다. 훌륭하게 맛있거나 하는 반전은 없었다. 그냥 평범한 죽이었다. 하지만 송이의 마음이 담긴 죽이라는 것을 알기에 비틀어진 웃음이 나왔다. 이 몸의 주인은 결혼까지 한 저 여자를 버리고 다른 몸을 택했다. 그러니 저 여자는 남편에게 버림받은 게 된다.
그런데도 그 사실을 모른다.
넌 버림받았노라고 말할 수도 없다.
태상은 송이가 불쌍했다. 태도를 보니 여자는 남자를 꽤나 위해주고 있었다.
병원에서 이곳까지 오면서 계속해서 그의 얼굴이 좋아 보이지 않자 약국에서 멀미약까지 한걸음에 달려가 사 온 여자였다.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해줄 리가 만무하다.
버림받은 여자.
그녀는 못 생긴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예쁜 편에 속했다.
털털한 옷차림새와 달리 얼굴은 꽤나 청순한 스타일이었다. 아마 차려 입는다면 남자들이 침을 흘리며 달려들 스타일이었다. 얼굴은 청순하고 몸매는 섹시하니 딱 한 단어로 그녀를 표현한다면 얼굴은 베이비 페이스에 몸에는 볼륨감 넘치는 베이글녀라고 칭할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읽지 않으셔도 되는 후기입니다.----
소원에 관하여....
태상이는 후에 나오지만 가족을 굉장히 소중하게 여깁니다.
아버지와는 사이가 좋지 않지만 할아버지나 어머니와의 관계는 무척 좋습니다.
해서 가족이 자신처럼 이런 거지(?)같은 일이 당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으로
소원을 빌었습니다. 지금 이 소원이 나름 떡밥으로 남겨둔거인지라 이상한 소원을 빌었다는 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수정하지 못한 점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