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6화. 에필로그. (3) (완) >
밤색 단발머리를 흔들며 그녀가 도착한 곳은, ‘포츠머스 스타디움’이었다.
정확히는 포츠머스 스타디움 앞에 조성한, 그 옛날 영웅들의 조각상이 전시된 광장이었다.
‘그분들은 나보다 더 힘들었을 거야. 그런데도 해내셨다고!’
푸른색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내며 영웅들의 조각상에 도착한 크리스티나 앨런.
몇 년 동안 방치되어 녹이 잔뜩 슬어버린 동상 앞에 낯선 인물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누구지…?’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으나, 말쑥한 키에 고급정장을 멋지게 차려입은 노신사였다.
옆모습만 보더라도 젊었을 때 여성들의 마음을 쉴 새 없이 흔들었을 것만 같은 아우라가 흘러나왔다.
멋들어진 턱수염은 중후한 맛을 제대로 살리고 있었다.
또한 검은 머리에 조금은 동양적인 모습은 외국인임이 분명해 보였다.
그 노신사는 옛 영웅들의 동상을 아련하고도 다정하게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포츠머스의 서포터이신가? 우와. 반가운데! 한번 말을 걸어볼까?’
크리스티나는 무척이나 신이 났다.
요즘 포츠머스의 인기는 바닥에 떨어져 포츠머스의 시민조차 경기를 잘 보지 않았거늘.
외국에서 여기까지와 영웅들의 동상을 바라보는 이 노신사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분명 이 사람도 그들을 추억하며 힘을 얻고 있으리라는 믿음이 생겼다.
“저기…. 할아버지?”
잔뜩 용기를 낸 크리스티나.
조심스럽고, 예의 바르게 말을 건넸지만, 노신사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뭐지? 귀가 안 좋으신가?’
그렇다기엔 귀가 움찔거리는 모양을 보니 매우 잘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럼, 방법을 바꿔보자.
“저기, 아저씨?”
“….”
“노신사분?”
“….”
“신사분…?”
“….”
“사, 삼촌…?”
나이 차이가 못해도 40 이상이 날 것만 같았지만, 무리수를 던져봤다.
크리스티나는 입밖에 내던졌었음에도 너무 갔나 싶어 후회했지만, 놀랍게도 성공했다.
“올바른 호칭을 고르는데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네요.”
말 같지도 않은 내용임은 둘째치고, 나이답지 않게 정말 청량한 목소리다.
그 목소리에는 아직도 생기가 흘러넘쳐 눈을 감는다면 청년의 목소리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네?”
“그 호칭 유지하라고요. 아가씨.”
“아, 네….”
얼떨떨한 그녀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는 노신사.
그는 하염없이 동상을 바라보다 질문을 던졌다.
“아가씨도 포츠머스를 응원하시나요?”
“그럼요!”
“호오…. 그럼 이 사람들이 누군지 잘 알고 있나요?”
“당연하죠! 시켜만 주신다면 모든 선수의 업적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모조리 읊을 수 있다고요!”
크리스티나 핼런은 콧대를 치켜들며 으스댔다.
하기야, 그녀야말로 극한의 포츠머스 서포터라고 자부하는 인물이 아니던가!
어렸을 때부터 그런 후진 팀을 왜 응원하냐고 놀림당하였음에도 단 한 번도 굽힌 전적이 없다.
이런 중증 서포터에게 영광의 시대에 뛰었던 선수들의 신상 정도는 자신의 몸무게보다 잘 알았다.
“그럼 말해주세요.”
“네?”
멍청하게 되묻고 말았다.
분명 포츠머스의 서포터로 보였는데, 아무래도 아니었나 보다.
“말해주시면 고맙겠어요.”
“조, 좋아요! 잘 들으세요!”
덕분에 크리스티나 앨런의 의욕은 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다.
모처럼 포츠머스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다. 이 사람에게 포츠머스의 매력을 한껏 알려줘 새로운 서포터로 영입하고만 싶었다.
그녀는 포츠머스의 열혈 서포터이자, 홍보직원이었으니까!
하여튼, 이윽고 그녀의 엄청난 수다가 시작되었다.
[성소하 감독.
리그컵 우승 3회.
FA 컵 우승 4회.
프리미어 리그 우승 3회.
챔피언스 리그 우승 5회.
유로파 리그 우승 1회.
4부리그에서 1부리그까지 승격.
단 10년 만에 이 모든 것을 이룬 역사상 최고의 감독이다.]
[케빈 도슨. 영광의 시대의 주축이자, 성소하 감독의 은퇴와 함께 은퇴를 선언. 이후 포츠머스의 감독으로 부임해 제2의 전성기를 이끌다가 49세의 나이로 은퇴했다. 이후 대배우 나탈리 도슨과 한국으로 갔다.]
[조쉬 킹. 잉글랜드 최고의 윙포워드로 지금까지 회자 되는 전설적인 선수. 은퇴하기 전까지 발롱도르를 4회 수상했으며 프리미어 리그 5년 연속득점왕에 성공한 신화적인 선수. 은퇴 후 한국으로 거주지 옮겨 남은 삶을 즐기는 중이다.]
[델리 알리. 잉글랜드 최고의 미드필더로서, 발동도르를 1회 수상한 전설적인 선수. 하지만, 성소하의 은퇴 이후 자기 관리 실패로 빠르게 은퇴를 선언. 해설로 활동하다 휴식을 취하는 중이다.]
[에링 홀란드. 조쉬 킹의 뒤를 이은 세계 최고의 공격수. 발롱도르 3회, 노르웨이를 이끌고 월드컵 4강을 일군 역대 최고의 공격수 중 하나. 큰 부상으로 30세의 이른 나이에 은퇴했으나, 배우로 복귀해 전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했다.]
[모하메드 살라. 34세까지 포츠머스에서 뛴 전설적인 선수. 이집트를 월드컵 8강에 올려둔 뒤 은퇴를 선언. 이후 행적은 미상.]
[도봉산. 역대 최고의 한국인 선수로서 훗날 국가대표팀을 이끄는 감독으로 발탁됐다. 원정 최초의 8강을 달성하며 ‘성소하 감독님을 그대로 따라 했다’라고 밝히며 지휘봉을 내려놨다. 이후 조용히 행복한 삶을 사는 중이다.]
[마이클 반즈. 전관 우승을 달성하고서 다음 해에 빠른 은퇴. 바로 본업을 낚시로 바꾸고 세계적인 낚시 너튜버로 성장. 하지만, 10여 년 전, 50대 중반의 나이로 혼자 원양 낚시를 갔다가 행방불명. 낚시꾼들은 그가 바닷속의 용왕이 되었다고 아직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등등. 그녀의 입에서는 쉴 새 없이 그때 그 선수들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냥 백과사전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후후. 정말 다 알고 있네요. 칭찬해줄게요. 잘했어요.”
“…네?”
크리스티나는 눈을 부릅떴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저 노신사의 말에는 이미 다 알고 있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고마워요. 잊지 않아서. 정말이에요.”
“헤헤. 뭐, 뭘요. 기본이죠. 헤헤.”
가지고 논 거 같아 조금 뿔이 났었지만, 진심 어린 감사에 절로 마음이 풀어졌다.
애당초 그녀는 천성이 워낙에 밝아서 이런 일은 금방 잊었다.
“그럼 다른 선수들 이야기도 해도 될까요? 저는요, 정말 이것저것 이야기하고 싶은 게 많은데…. 할 사람이 그동안 너무 없었어요….”
또, 단순했다.
금방 볼을 부풀리며 조금 울적해지는 그녀의 모습은 제법 귀여웠다.
“후후. 물론이죠.”
노신사는 부드러운 미소로 그녀의 제안을 시원시원하게 받아들였다.
“좋아요. 그럼 자리를 옮겨보죠! 이참에 제대로 자리를 잡고 밤새도록 이야기꽃을…. 그런데요.”
“네?”
“생각 보니까, 누구세요…?”
“….”
참으로 맹랑하고, 단순하며, 무척이나 활발한 아가씨였다.
마치 노신사의 기억 속에서 아직도 생생한 어떤 제자의 여성화 느낌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그의 부인의 젊었을 적 모습도 얼핏 보였다.
“참, 빨리도 물어보네요.”
“헤헤. 죄송해요. 이참에 제대로 인사하고 일을 진행할까요? 아직 전 사, 삼촌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요.”
“그러는 게 좋겠네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노신사는 드디어 몸을 틀어 크리스티나와 정면으로 마주 섰다.
“헉.”
노신사의 얼굴을 본 크리스티나는 신음성을 참지 못했다.
생각보다 훨씬 젊어 보여서만은 아니다.
눈, 눈이 문제였다.
분명 세월의 흔적이 제법 가득한 얼굴이었건만. 눈만은 아직도 20대의 그것처럼 파릇파릇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어?! 서, 설마…! 어어?! 꺅!”
그리고 그녀는 비명을 내질렀다.
눈앞에 있는 노신사의 정체가 무엇인지 드디어 알아채고야 말았다.
“반가워요.”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노신사의 모습에, 크리스티나 앨런은 결국 기절하고야 말았다.
***
4부리그로 강등당하며 포츠머스에는 비상등이 켜졌다.
이대로 구단이 해체될지도 모른다는 신빙성이 상당히 높은 소문마저 돌아다녔다.
이미 포츠머스 스타디움의 명명권을 매각하기 위해 동분서주로 움직이고 있는 판이었다.
즉, 40년 가까이 이어진 구단의 근본을 팔아치우려는 패륜적인 일이었다.
갈 데까지 가버린 막장구단.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은 버러지 같은 구단이었지만, 신은 자비로웠다.
때마침 구원의 동아줄이 내려왔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생명의 밧줄이 내려왔다는 이야기다.
“속보야! 우리 구단을 인수한 사람이 있데!”
“뭐?! 진짜야?!”
구단의 인수 소식은 때아닌 희소식이었다. 이와 동시에 모든 직원과 선수들에게는 의문의 꽃이 피어났다.
“도대체 누가?”
돈을 잡아먹기만 하는 블랙 기업을 어느 정신병자가 인수한단 말인가?
정말 알 수가 없는 일이었기에 온갖 소문이 나돌았다.
“중동의 왕가라는 소문이 있다는데.”
“형제들을 모두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 그 사람?”
“아니야. 가상현실게임으로 세계 최고의 부를 쌓아 올린 회사, 아르카디아의 사장이 인수했데.”
“내가 듣기로는 그게 아닌데. 수십 년 전 잠깐 엄청난 열풍을 몰았던 비트코인으로 떼돈을 번 사람이라던데?”
“아, 그 뭐야, 수십조를 코인으로 벌었다는? 그 후 그 수십조를 수백조로 불렸다는 전설을 쓴?”
“그거 인터넷 유언비어 아니었어?”
온갖 유언비어가 클럽하우스를 가득 메웠다.
하지만 그 누구도 정확하게 일이 진행되는 방향을 잡지는 못했다.
엄청난 강도의 엠바고였다.
구단 상층부는 아예 인수에 관한 이야기조차 꺼내지 않았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더더욱 희망이 커졌다.
‘이 정도의 강력한 엠바고를 유지할 정도로 영향력이 강한 사람이다!’
엄청난 거물임은 틀림없었기에, 다 죽어가던 구단에 미약하게나마 생기가 돌았다.
그리고 드디어 그날이 찾아왔다.
구단인수가 정식으로 완료되고 새로이 구단주에 자리에 올라선 그 수수께끼의 인물이 클럽하우스에 오는 날이었다.
-부오옹.
누추한 클럽하우스에 어울리지 않는 최고급 세단이 웅장한 검은색 자태를 뽐냈다.
-덜컥.
뒷좌석의 문이 열렸다.
검은 정장을 멋지게 차려입 목에는 포츠머스의 푸른색 목도리를 두른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뚜벅. 뚜벅.
모델이라도 해도 믿을 만큼 멋진 자태를 자랑하는 새로운 구단주는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마치 굉장히 익숙한 장소에 다시 찾아온 것처럼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당당한 걸음이었다.
포츠머스의 모든 이들의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았다.
하지만 쉽사리 정체를 유추하긴 힘들었다.
그런데도 어디선가 본 것만 같은 굉장한 익숙함이 그들을 아리송하게 만들었다.
-뚜벅, 뚜벅.
새로운 구단주는 엄청난 시선의 세례에도 불구하고, 이를 즐기듯 여유롭게 훈련장으로 향했다.
모든 이가 왜 훈련장으로 걸음을 옮기는지 의문을 품었지만, 그는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오직 딱 한 마디만 던졌을 뿐이다.
“내 밑으로 전부 집합.”
반박의 말을 사전에 막아버리는 엄청난 위압감이었다.
당연하게도 포츠머스의 클럽하우스에는 일대 소란이 일었다.
말단 직원부터 이사진들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훈련장으로 모여들었다.
“흐음.”
새로운 구단주는 모든 직원이 모이자, 그새 구해온 단상 위에 올라서서 멋들어진 검회색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리고선, 짧고 강렬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난 성소하다.”
왕의 귀환이었다.
좌중은 엄청난 위압감에 비명조차 내지르지도 못했다.
그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전율을 느꼈을 뿐이었다.
“내 소개는 이걸로 충분하리라 본다.”
충분하다 못해 넘쳐흘렀다.
“내가 돌아온 이유는 간단하다.”
별거 있겠는가.
“망하는 게 근본인 이 빌어먹을 구단을 다시금 부활시키기 위해서다.”
수십 년 전처럼 미래를 보는 사기적인 능력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소하에게는 다른 강력한 무기가 있었다.
“무한에 가까운 돈의 힘을 보여주겠다. 다들 템포 따라오도록.”
자신감 있게 선언하는 소하!
그의 눈빛은, 수십 년 전 그 어느 날.
갑작스럽게 과거로 돌아와 설렘과 흥분, 자신감으로 가득 차서 클럽하우스로 향하던, 그 여름날과 똑같았다.
그리고, 또 다른 신화의 시작이었다.
<완결>
< 306화. 에필로그. (3) (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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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기. >
음. 저에게도 완결 후에 작가의 말을 쓰는 날이 찾아왔네요.
정말 길고 긴 1년 1개월이었네요.
300화를 넘는 장편이 될 줄이야.
1년 전의 저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답니다.
하여튼, 이로써 소하의 이야기는 끝이 났습니다.
조금은 부족할지 몰라도 제 나름대로는 훌륭한 마무리였다고 생각합니다.
쓰고 싶은 내용은 아직도 많이 남아있습니다.
선수들끼리 파벌싸움이라던지.
게임회사에 가서 얼굴 스캔을 하는 소소한 이야기라던지.
하지만, 과감히 생략하기로 했습니다.
이미 너무 길어졌거든요.
그리고 보시면서 느끼셨겠지만, 전 전술적인 측면보다 선수 관리의 측면에서 감독을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결국 축구는 사람이 하는 거니까요.
게다가 십 년을 넘게 봐온 축구팬들도 어지러워하는 전술 설명을 소설에 줄줄이 써놓을 배짱 따윈 없었습니다.
아무튼, 첫 유료 작품을 이렇게 장편으로 쓰면서, 작가로서 성장을 했다고 믿습니다.
조금은 힘이 늘어난 게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아니면···. 뭐, 말고요···.
이래저래, 모두, 지금까지 제 작품을 읽어주신 독자님들 덕분입니다.
여기에, 부모님의 응원, 지인들의 조언, 잘 맞지 않는 것 같지만, 제법 호흡이 맞는 담당님의 덕도 있겠지요.
여러모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럼 이제, 잠시, 정말 잠시 쉬고 다음 작품으로 빠르게 돌아오겠습니다.
그럼 독자 제현의 건승을 바라며.
다음 작품에서 찾아뵙겠습니다.
< 후기.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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