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5화. 에필로그. (2) >
“이상형은 무엇인고?”
“….”
귀족처럼 으스대는 소하의 태도에 김용한을 할 말을 잃었다.
마음 같아서는 저 천둥벌거숭이를 흠씬 두들겨 패주고 싶었지만, 곧 결혼하는 새신랑의 얼굴을 망칠 수는 없는 노릇.
그냥 맞장구쳐주는 게 답이었다.
“나는….”
“뭐라고? 반말?”
“씁…. 저는…. 쿨뷰티미녀가 좋다.”
“그건 뭐냐? 씹덕아.”
“하아….”
분노가 치밀어 올랐는지 목덜미가 뻐근했다. 그래도 기적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기품있고, 침착하면서 어딘가 도도한 분위기를 가진 ‘미녀’다.”
“지랄하네.”
“이 새끼가?”
“큼큼. 미안. 말이 헛나왔어. 그 외에 다른 건 없냐?”
능구렁이처럼 김용한의 살의를 벗어난 소하가 질문했다. 그러자 김용한 또다시 살짝 취한 눈빛으로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놨다.
“음. 뭐, 별거 있겠나? 조금 더 욕심부리자면 돈도 많았으면 좋겠다. 굳이 말하자면 부잣집 딸내미 같은…. 더해서, 나한테만은 다정다감한 모습을 보여주면 금상첨화다.”
“…지랄.”
“뭐라고?”
“아니, 아무 말도 안 했어.”
소하는 애써 시치미를 뗐다.
15년 지기 친구가 이러한 뇌내망상을 품고 살고 있었을 줄이야.
오늘도 다시 한번 사람의 속은 정말 알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하지만 오히려 잘되었다.
무척이나 놀랍게도 김용한의 이상형은 소하가 아는 그 여자와 판박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왜 물어본 거냐?”
“아니, 그냥. 너도 제법 모아둔 돈도 있고 능력도 충분한데 결혼하지 않는 게 궁금해서 그렇지.”
“….”
“까고 말해, 아저씨 쉰내 난다고. 이 몸과는 다르게 말이야.”
“….”
빠드득.
김용한의 이가 갈렸다.
자기도 겨우 얼마 전에 겨우 노총각 신세를 벗어난 인간이 어찌 이리도 잘난 척을 한단 말인가?
이것이야말로 언어도단이었다.
“그래서 오늘 쉰내 나는 아저씨에게 장례식 날짜를 받고 싶다는 거냐?”
김용한이 으르렁거리자 소하는 재빨리 손사래를 쳤다.
“설마. 내가 누구겠냐. 친구 아니겠어?”
“혓바닥 길게 내밀지 않길 바란다. 나도 모르게 뽑아버릴지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전에 말했던 그 여성분을 오늘 소개해주겠다는 이야기다!”
“음…? 지, 지금 뭐라고?”
“아, 이제 도착했나 보네.”
“자, 잠깐만!”
아직 마음의 준비도 하지 못했거늘. 그딴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주차장을 향해 빛살처럼 달려가는 저 악마 녀석이 밉고 또 미웠다.
“기다리라고 이 새끼야!”
서둘러 따라가 붙잡으려던 김용한.
그러나 너무나도 빠른 소하의 발놀림에 그만, 포기하고 옷매무새를 정리하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언젠가 죽여버릴 거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
“요! 오랜만!”
“…여전히 기품이 없군요.”
라우라 맥닐은 소하를 보자마자 눈을 차갑디차갑게 흘겼다.
아마 바퀴벌레를 보아도 이렇게 쳐다보지는 않을 것만 같다.
물론, 소하에게는 작은 타격마저 주지 못했다.
“어허. 평민이 감히 귀족님을 그렇게 흘겨봐서 되겠는가?”
“하아…. 정말 구제 불능이군요. 그 하찮은 기사 작위를 당신에게 주기 위해 제 아버지께서 얼마나 고생하셨는지 아시나요?”
“…응?”
잠시 멍해진 소하는 금방 상황을 유추해냈다.
“돈 좀 부으셨군요?”
“맞아요. 아무리 대단한 업적을 이루었더라고 해도, 당신은 너무 젊었으니까요. 아시잖아요? 윗사람들의 콘크리트처럼 튼튼한 보수 성향은요.”
“….”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기부금 명목으로 엄청난 돈을 뿌리셨죠. 원래는 CBE 하나로 끝날 일을 바꾸신 거예요.”
“그, 그랬군요….”
“참, 그렇게 악착같이 돈을 모으셔서 왜 쓸데없는데 버리시는지 저로서는 정말 알 도리가 없답니다.”
촌철살인이란 말이 이토록 어울리는 상황은 그리 흔치 않을 거다.
“하하…. 그, 그나저나 영감님은 어떠세요? 다시 일선에 복귀하신답니까?”
“아쉽게도, 그러시겠다고 하시네요.”
“호오…. 병은 다 나으셨나 보군요.”
“애초에 병이라는 것도 그저 마음의 병이 치유되면서 생긴 일시적인 무기력증이었을 뿐이에요. 수십 년을 억눌렀던 짐이 사라지면서 긴장이 풀리셨으니까요.”
“잘됐군요.”
소하는 모처럼 진심으로 리처드 맥닐의 쾌차를 환영했다.
아직 포츠머스가 가야 할 길은 남아있었기에, 구단매각 같은 사고에 휘말리면 곤란했다.
“흥. 너무 좋아하시는군요. 그럴 만도 하겠죠. 전 어떻게든 구단을 매각하려고 했으니까요. 아마 역대 최고의 투자라고 길이길이 남았을 대단한 성과였을 거예요. 아쉽네요.”
라우라 맥닐은 진심으로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사실, 지금이야말로 구단을 매각하기엔 최고의 시기다.
30억짜리 구단이 1조에 육박하는 거대 기업으로 발돋움한 지금이 최고점이었다.
이대로 더 시간이 흐른다면 규모가 커진 만큼 운영비도 더 많이 빠질 테고, 지금 같은 순이익을 거두긴 힘들었다.
“하, 하하. 그, 그렇군요.”
“그나저나, 경기장 명칭 건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셨나요?”
“네, 그건 정했어요.”
소하가 제시받은 경기장 명칭은, 그야말로 감독들의 꿈이었다.
[성소하 스타디움.]
감독의 이름을 딴 경기장이라니.
그 어떤 감독도 해내지 못했던 위대한 업적이다.
6만석 규모의 최신식 구장의 이름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예전의 소하라면 두말할 것도 없이 바로 승낙하고 말았을 일이다.
하지만 모두가 성장했듯, 소하도 그들처럼 성장했다.
“포츠머스 스타디움.”
이 모든 것들은, 혼자가 아닌 모두가 이루어 낸 것이었으니까.
“흥. 제법이네요.”
소하의 뜻에 라우라 맥닐도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남자라고 투덜거리면서.
“그럼 전 이제 가볼게요.”
“버, 벌써요? 차, 차라도 한잔….”
소하가 당황했지만, 라우라 맥닐은 코웃음조차 치지 않았다.
“웃기지도 않는군요. 그런 주변머리가 있었다면,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접객실로 데려가 차를 대접했겠죠? 인제 와서 예의 차리기에는 너무 시간이 많이 흘러버렸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아니, 그래도, 엄연히 상도덕이란 게 있는 법인데….”
땀을 뻘뻘 흘리면서 붙잡는 소하.
그 곰 같은 친구 놈은 도대체 뭐 하느라 아직도 오지 않는지. 정말 열불이 터진다.
“놓으세요! 지금 어딜 만지세요?!”
“아니, 그게 아니라….”
고요하던 클럽하우스의 주차장에서 일대 소란이 일어났다.
“여, 여러분들 이 파렴치한 작자를 좀 떼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기어코 사태를 지켜보던 경호원들이 나섰다. 둘의 사이, 그러니까 악우임을 알고 관망했지만, 고용주의 명령이 떨어진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안 돼…!”
그렇게 소하가 무력으로 진압당하려는 순간. 드디어 그 곰 같은 친구가 등장했다.
“무슨 일인가?”
친구의 위기에 애써 가다듬은 옷매무새가 헝클어졌지만, 그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동시에 그가 등장하자마자 경호원들의 압박이 사라졌다.
엄청난 김용한의 근육 때문이 아니다.
그들 또한 엇비슷한 체구를 자랑하는 정예들이었으니까.
그렇다면 하나다.
고용주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
물끄러미, 마치 시선을 강탈당한 듯 김용한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라우라 맥닐.
“….”
이러한 시선을 느낀 김용한도 라우라 맥닐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 시선의 사이에 있던 소하라는 존재가 인식에서 사라졌다.
“….”
“…어맛.”
언제나 존재감을 뽐냈지만, 지금은 사라진 소하가 귀를 후벼팠다.
‘지금 이상한 교성을 들은 거 같은데?’
요즘 기가 허해졌나 싶은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착각이 아니었다.
일단 김용한의 눈동자부터가 문제였다.
‘…눈알이 하트모양이 됐네?’
누가 봐도 한눈에 반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이건 약과였다.
얼굴에 분홍빛 홍조를 띤 라우라 맥닐은,
“안녕하신지요. 저는 라우라 맥닐이라고 합니다. 멋진 신사분의 성함을 알고 싶사온데, 허락해 주시겠사옵니까?”
수줍은 소녀처럼, 혹은 고상한 귀족 집안의 영애처럼, 아리땁고 기품있으며 부드러운 음색이었다.
“….”
소하는 그저 귀를 세차게 파고, 또 팔 수밖에 없었다.
***
시간은 흐르고 또 흘러갔다.
18-19시즌의 영광, 그 이후 4년.
멈출 줄 모르던 포츠머스의 정복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리그컵 우승 1회, 추가.
FA 컵 우승 2회, 추가.
프리미어 리그 우승 2회, 추가.
챔피언스 리그 우승 4회, 추가.
엄청난 승리의 행진이었다.
이것은 또 다른 신화였다.
4년간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4번 추가했다는 뜻은,
[포츠머스가!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5회 연속으로 달성했습니다!]
수십 년 전, 오직 레알 마드리드만 달성했던 대기록을 기어코 달성해내고야 말았다.
또한, 마지막 시즌에는 다시금 트레블을 달성하며 그 위엄을 세계에 또다시 알렸다.
그리고 그것이 소하와 포츠머스의 마지막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소하와 포츠머스의 이별이었다.
또한 소하와 축구가 함께했던 인연의 끝이었다.
“그간 제 꿈을 위해 달리고, 또 달려왔습니다. 그래서 이제 쉴 때가 찾아왔습니다. 저는 더는 타오를 연료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저와 우리 포츠머스를 응원해주신 분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표하며, 성소하라는 광대는 이제 퇴장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우리를 영원히 기억해 주시길 바랍니다.”
챔피언스 리그의 역사를 다시 쓴 소하는 그 축제의 기자회견에서 이별을 고했다.
눈물이 흘러넘쳤다.
기쁨과 슬픔이 섞였다.
고마움과 아쉬움이 뒤엉켰다.
일개 작은 구단을 세계 최고의 구단으로 만들어준 소하의 업적과 이별에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를 붙잡을 수는 없었다.
가진 모든 걸 모두 불태우며 10년 동안 전력을 다해 구단에 헌신한 그의 휴식과 안식을 방해할 순 없었다.
그래서 포츠머스는 소하를 쉽게 놓아주었고, 아름다운 이별을 만들었다.
그렇게, 소하는 축구계 역사의 뒤안길로 홀연히 사라졌다.
그 후 다시는 세상에 나서지 않았다.
축구라는 스포츠가 존재하는 한, 다시는 깨어지지 않을 위대한 업적을 남겨두고서.
***
시간은 또다시 흐르고 또 흘렀다.
10년이 지났고, 20년이 지나, 어언 3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강산이 바뀌어도 세 번이나 바뀔 기나긴 시간.
영광스러웠던 시절은 어느덧 빛바랜 추억으로 가득한 옛날이야기로 바뀌었다.
유럽을 호령하던 포츠머스는 어느새 풍화되어 녹슬어만 갔다.
강철로 만든 전차도 고장이 나는데 연약한 인간이 세월의 풍파를 견딜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소하의 은퇴 후 32년.
포츠머스는 약해졌다.
맥닐 가문이 구단을 매각하고 20년이 지났을 때였다.
엄청난 명문 구단으로 20년 가까이 최정상의 자리를 유지했으나 이제는 아니었다.
[아…! 포츠머스가 리그2로 강등당합니다. 비극의 날입니다…!]
4부리그로 돌아갔다.
연이은 성공에 취한 구단 운영진들의 방만한 운영.
시대의 흐름이 바뀌며 식어가는 축구, 아니, 스포츠 전반의 인기.
거액으로 영입한 선수들의 연이은 엄청난 실패.
3박자가 두루두루 하모니를 이루며 포츠머스를 무너뜨렸다.
그런데도 포츠머스를 응원하는 몇몇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기적을 이미 눈앞에서 봤고, 한 번 더 일어나리란 희망을 품기엔 너무나도 충분했다.
그만큼 그날의 푸르렀던 신화는 아직도 찬란했다.
그랬기에 아직 포기하지 않은 수많은 사람은 간절히 부활을 바랐다.
“내가 다시 포츠머스를 일으킬 거야!”
두 손을 말아쥐며 힘차게 외치는 방년 21세, 크리스티나 앨런 또한 마찬가지였다.
4대째 포츠머스의 서포터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집안에서 태어난 그녀는, 꿈에서도 그리던 포츠머스의 프런트에 입사하고야 말았다.
그녀에게 포츠머스란 그리 길지 않은 인생의 전부였기에 당연한 선택이었다.
‘전설적인 홍보부장, 에밀리아 님처럼 되고야 말겠어.’
포츠머스의 기적적인 부활을 도왔던 전설적인 홍보부장, 에밀리아가 그녀의 본보기였다.
하지만 너무나도 막막했다.
20세가 되자마자 입사했건만.
이 팀은 여러모로 답이었었다.
모두가 근무 태만을 태연히 하고 있었으며 의욕이 없었다.
잘라 말해 월급도둑들만 한가득이었다.
‘솔직히 엄청나게 실망했어.’
실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으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포츠머스라는 팀은 부모님이 힘들었을 때도, 자신이 힘들었을 때도 언제나 힘을 나누어주던 존재였기 때문이다.
비록 그녀는 부모님 세대에서나 간신히 목격했던 영광의 시절을 보지는 못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후우….”
그래도 한숨이 절로 나오는 건 참을 수 없었다.
너무나도 답이 없는 구단의 상태는 일개 홍보부 직원으로선 손쓸 방법조차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신 차려. 이럴 땐 다시 힘을 내야지! 할 수 있다! 크리스티나!”
그녀는 서둘러서 힘이 들 때마다 마음의 위안을 얻는 곳으로 달려갔다.
어떤 만남을 가질지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한 채로 말이다.
< 305화. 에필로그. (2)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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