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3화. 동화의 끝은 신화로. (9) >
‘정말 최고의 선택이었을까?’
승부차기를 앞둔 지금.
소하는 자기도 모르게 조금 자신감이 흔들렸다.
분명 상대보다 훨씬 강점인 능력에 사활을 걸긴 했다.
다른 것보다 높은 승률이었고 지금도 이 결정에 후회는 없다.
그런데도 막상 마지막이 다가오자 흔들리는 마음을 주체하기가 어려웠다.
수없이 싸워왔던 선택의 시간.
수없이 이겨왔던 선택의 부담감.
계속해서 버텨내었지만, 여기까지 오자 강철같던 마음이 조금은 물러졌다.
‘하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애써 마음을 다잡는 소하.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망해버린 선수들의 사기를 끌어 올려 처참했던 경기를 원점으로 돌렸다.
쉬지 않고 머리를 굴려 승리에 가장 가까운 길로 향하게 팀을 운전했다.
필드 밖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는 한 사람으로서는 최선을 다했다.
‘나도 저 자리에서 뛰고 싶다.’
문뜩, 옛날에 버렸던 선수로서의 인생이 다시금 아쉬웠다.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찾아온 꿈의 소멸은 정말 피눈물을 흘리게 했다.
몇 날 며칠, 눈물을 흘리다가 실신하고 나서야 포기했던 선수의 꿈.
완전히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왜 이럴 때 생각이 나는지 모를 일이다.
‘정신 차려.’
철썩.
소하는 화장실에 홀로 거울을 바라보며 양 손바닥으로 거세게 뺨을 후려쳤다.
장군인 그가 흔들린다면 골키퍼와의 1대1 승부를 앞둔 선수에게 악영향을 미칠 터. 매우 좋지 않다.
게다가 보통 골키퍼도 아닌, 세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든다는 알리송 베케르가 아니던가.
이럴 때일수록 무한한 신뢰를 보내줘야지만 승리할 수 있었다.
‘이제 내 앞에 마지막 선택이 남아있다. 아버지, 보고 계시면 저에게 힘을 주시길.’
하늘에서 오늘을 바라보고 있을 아버지를 모처럼 떠올리는 소하.
이제 그에게는 승부차기의 순서를 정하는, 이 경기의 마지막 선택이 남아있었다.
***
“다들 준비됐냐?”
소하가 화장실에서 돌아오자 선수들은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며 응시했다.
확고한 믿음이 보이는 눈빛들.
이에 답하려는 듯 거침없이 첫 번째 키커를 발표했다.
“선봉은 마이클 반즈, 너다.”
“옙. 월척을 낚아오죠.”
좋은 선택이었다.
승부차기에서는 첫 번째 주자야말로 가장 중요한 법이다.
만약에 첫 번째 주자가 실패한다면 그다음 주자부터는 압박감을 곱절로 받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페널티킥의 마스터인 마이클 반즈는 완벽한 카드였다.
그는 단 한 번도 페널티킥에 실패하지 않은 미친 선수였으니까.
“두 번째 선수는 마리오 발로텔리다.”
“Yo!”
엄청난 부담감이 감도는 분위기 속에서도 쾌활하게 대답하는 마리오 발로텔리.
이런 성격이 그를 세계적인 페널티킥 키커로 만들어준 원동력이었다.
자기 멋대로 삐치지만 않는다면 페널티킥을 실수할 리가 없었다.
“세 번째는…. 모하메드 살라, 너로 정했다. 오늘 골을 넣지 못한 한을 여기서 풀어라.”
“알라에게 맹세코, 어떻게든 선공해내고야 말겠습니다.”
“그래! 아라후 아크바르!”
소하가 알라를 장난스럽게 찬미하자, 모하메드 살라는 참지 못하고 피식 웃었다.
역시나, 참으로 못 말리는 사람이었다. 덕분에 자기도 모르게 바짝 들어갔던 긴장이 부드럽게 풀렸다.
‘이것도 능력이겠지.’
너무 힘이 들어간 모습을 보고선 이렇게 즉흥적으로 긴장을 풀어주다니.
이런 뛰어난 감독이 팀 역사상 최고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자신을 선택해줘서 너무 자랑스러웠다.
하여튼, 모하메드 살라가 세 번째 키커로 지정되었다.
바뀌기 전의 미래에서도 페널티킥 전담 키커를 맡았던 그였기에, 앞과 뒤를 이어주는 주자로서는 제격이었다.
“네 번째는…. 델리 알리 너다.”
“나쁘지 않네요.”
델리 알리는 콧대를 치켜들며 자신감을 내보였다.
네 번째 주자라면 상당한 부담감이 따라오겠지만, 오만에 가까운 자신감을 가진 그라면 문제없을 거다.
“그리고…. 다섯 번째는….”
다섯 번째 주자는 매우 중요했다.
팀의 승리를 결정지을 마지막 주자이자, 가장 큰 압박감을 느낄 자리다.
그래서, 소하의 선택은 매우 쉬웠다.
애초에 승부차기로 끌고 갈 때부터 마지막 주자는 정해둔 상태였다.
“케빈 도슨. 네가 해주리라 믿는다.”
“맡겨만 주십시오.”
케빈 도슨은 주먹을 불끈 쥐며 투지를 불살랐다.
차갑게 불타오르는 그의 푸른빛 눈동자에는 실패라는 단어가 끼어들 틈 따위는 없었다.
“좋아. 일단 5명이다. 그 이상으로 갈 수도 있으니 만약을 위해서 예비명단을 말해주겠다.”
5번의 승부차기로 끝날 거라 예상했지만, 소하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했다.
몇 번째에 차는지 알고 차는 것과 갑자기 순서를 부여받는 건 하늘과 땅 정도의 차이였으니까.
하여튼, 이래저래 포츠머스의 승부차기 준비는 모두 끝이 났다.
이제, 진검승부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가장 먼저 승부차기를 시작하는 선수는 리버풀의 제임스 밀너였다.
리버풀에서도 페널티킥 전담인 그였기에, 반드시 넣어야 할 첫 번째 주자로서는 제격이다.
“….”
킥에 앞서 제임스 밀너는 힐끔, 아론 람스데일을 바라봤다.
“….”
마찬가지로 아론 람스 데일도 제임스 밀너를 바라봤다.
‘막아봐.’
‘막아줄게.’
날카로운 신경전이었다.
아마, 두 선수의 사이로 지나간다면 피부가 찌릿찌릿 떨렸을 거다.
-삑!
이윽고 킥을 시작하라는 주심의 신호가 울려 퍼졌다.
“후우.”
크게 심호흡한 제임스 밀너는 왼쪽을 슬쩍 바라보며 킥을 시도했다.
‘오른쪽인가?’
아론 람스데일은 그 눈길을 바라보고 그대로 왼쪽으로 몸을 날렸다.
애초에 페널티킥이나 승부차기는 보고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미래를 예측하고 공이 출발하기 전에 몸을 던져야만 했다.
공은 사람의 반사신경보다 빨랐으니까.
-철썩!
제임스 밀너의 킥이 골망을 갈랐다.
시선은 눈속임이었을 뿐.
원래 가장 좋아하던 코스로 공을 날렸고, 좋은 결과가 따랐다.
“쳇.”
혀를 차는 아론 람스데일!
제임스 밀너가 좋아하는 코스는 이미 머릿속에 있었거늘. 다른 선택을 했다가 막아내지 못했다.
‘다음엔 막는다.’
주눅 따윈 들지 않았다.
이제 승부의 첫 단계였을 뿐.
승부차기의 주인공은 필드 플레이어도 아닌, 골키퍼였기에 그는 슬슬 판을 짜기 시작했다.
***
다음 주자는 포츠머스의 마이클 반즈였다. PK 마스터, 마이클 반즈.
그가 지점에 서자 알리송 베케르는 그를 유심히 살펴봤다.
‘….’
그리고 할 말을 잃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
“….”
마침 눈도 마주쳤다.
그래서 더더욱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가 힘들었다.
저 다갈색의 눈동자에는 그 어떠한 감정도 보이지 않는다.
마치 동양에 존재한다는 반신, 신선들처럼 잔잔한 봄바람만이 그득하다.
‘모르겠다.’
더욱 까다로운 사실은, 그는 페널티킥을 찰 때 좋아하는 코스가 따로 없다는 거다.
왼쪽 4번, 중앙 4번, 오른쪽, 4번.
12번의 페널티킥을 모두 성공한 그는 매우 공평하게 일을 처리해왔다.
잘라 말해 심리를 읽기도, 데이터에 기반한 판단을 하기도 어려운, 정말 난감한 상대였다.
‘일단 왼발잡이이니까 왼쪽으로 뛰어보자.’
좋은 킥 능력을 갖춘 선수답게 동작을 보고 뛰기는 어려워 내린 판단이다.
여기에, 이러한 중압감 속에서 중앙을 노릴 거라고 생각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툭, 철썩.
마이클 반즈는 파넨카를 선보였다.
챔피언스 리그의 결승전에서, 그것도 첫 번째 주자가 힘없는 킥인 파넨카를 하다니.
정말 제대로 한 방 먹었다.
“후후. 오늘도 월척이구나~”
느긋한 마이클 반즈의 중얼거림이 알리송 베케르의 심리를 어지럽혔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
양 팀의 치열한 승부차기는 계속해서 이어졌고, 세 번째까지 모두 성공시켰다.
리버풀의 앙투안 그리즈만, 사디오 마네가 잇달아 성공했다.
모두 오른쪽을 노린 킥이었고 모두 왼쪽으로 몸을 날린 아론 람스데일을 꺾어버렸다.
포츠머스는 마리오 발로텔리가 강력한 킥으로 방향을 읽혔음에도 성공했다.
또한 모하메드 살라는 골대 구석으로 정확한 킥을 선보이며 쉬운 성공을 만들어냈다.
한 치 앞도 예상하기 어려운 긴장감이 감도는 승부차기였다.
이를 지켜보던 양 팀의 서포터들은 1분 1초가 생지옥이었다.
“미치겠다.”
“심장 떨려.”
“그냥 가위바위보로 정하면 안 되냐? 더 보다간 심장이 터질 거 같은데.”
“난 킥을 할 때마다 눈을 감고 있어.”
“시간이 빨리 좀 흘렀으면.”
난리가 나도 아주 제대로 났다.
경기장을 찾아온 서포터들은 물론, 화면을 통해 바라보는 수천만의 축구 애호가들이 단체로 심장병에 걸렸다.
이는 경기장 안에서 직접 승부차기하는 선수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왜 차는 거보다 보는 게 더 쫄리냐?”
“난 뒤 돌고 있었다.”
“불알 떼라. 근데 난 왜 바지 축축하지? 조금 지렸나….”
당사자들인 만큼 엄청난 압박감을 받았다. 주자가 점점 뒤로 갈수록 부담감은 곱절로 늘어났고, 이제 네 번째 키커의 차례가 찾아왔다.
리버풀의 네 번째 키커는 가짜공격수, 호베르투 피르미누.
페널티킥을 그리 잘 차는 선수는 아니었지만, 공격수였기에 키커로 지정됐다.
“후우.”
깊은 숨을 몰아 내쉬었다.
엄청난 부담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어디로 찰까.’
짧은 준비시간이었지만, 오만가지 경우의 수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오른쪽?’
동료들은 모두 오른쪽으로 공을 찼고 성공했다.
‘하지만, 이제 너무 빤히 보이는 게 아닐까? 아론 람스데일은 계속 왼쪽으로만 뛰었잖아. 혹시 판을 짠 건가?’
부담감에 짓눌린 덕에, 아론 람스데일의 움직임이 너무 신경 쓰였다.
아무리 봐도 지금까지 계속해서 왼쪽으로 몸을 던진 건, 오른쪽으로 공을 차길 유도하기 위함으로 보였다.
‘아니야. 나도 동료를 따라간다.’
갈팡질팡했지만, 결국 정했다.
동료들이 열어줬던 길을 그대로 따라가겠다는 의지였다.
-삑!
마침, 결정을 끝내자마자 신호가 들렸고 천천히 킥을 하기 위해 도움닫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씨익.
호베르투 피르미누의 눈에 아론 람스데일의 미소가 눈에 들어왔다.
‘어?!’
속았나?! 속았다!
역시, 처음에 떠올렸던 생각이 맞았나 보다. 이때를 기다려 계속해서 왼쪽으로 몸을 날렸던 것임이 분명했다.
‘답은 왼쪽이다.’
순간, 피르미누의 도움닫기가 엉켜버렸다. 오른쪽으로 차려다가 갑자기 왼쪽으로 차려고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뻥!
조금 어정쩡한 자세였지만, 킥의 정확도는 훌륭했다.
적어도 우측담장을 넘기는 홈런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도움닫기가 엉키면서 아론 람스데일이 방향을 읽어버렸다.
-팡!
막아버렸다.
아론 람스데일이 호베르투 피르미누의 킥을 막아버렸다.
이때를 위해 계략을 짠 아론 람스데일의 지능적인 승리였다.
[막아냈습니다아아아아! 아론 람스데일! 기어코 한 골 더 막아냈습니다!]
[대단해요! 이제 됐어요. 승리가 코앞이에요! 훌륭한 선방이었어요!]
이미 탈진한 톰 힉스와 나단 필립스가 최후의 기력을 뽑아내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 됐어!”
눈을 부릅뜨고 승부차기를 하나하나 모조리 바라보던 소하 또한 광분했다.
“잘했다! 잘했어!”
무척이나 대견스러웠다.
기어코 3실점에 대한 합당한 대가를 모조리 치르다니. 한다면 하는 선수라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을 몰랐다.
“이제 한걸음 남았다.”
소하의 말처럼, 이제 리버풀과는 상관없이 델리 알리와 케빈 도슨이 성공하기만 하면 끝이었다.
***
포츠머스의 네 번째 키커, 델리 알리는 무척이나 쉽게 성공했다.
-철썩.
낮게 깔아 찬 모범적인 승부차기.
알고도 막지 못하는 낮고 강한 킥이었기에 실패할 수가 없었다.
“뭐, 이정도야.”
엄청난 일을 해냈음에도 델리 알리는 평소처럼 허세를 부렸다.
이미 심장은 밖으로 튀어나올 만큼 세차게 뛰고 있었거늘. 청력을 기울이면 저 멀리에 서 있는 소하도 들릴 정도였음에도 허세는 멈추지 않았다.
“벼, 별거 아니라니까.”
“누가 뭐래?”
“….”
포츠머스의 분위기가 좋아졌다.
그에 반해 리버풀은 좋지 않았다.
거의 절망적인 수준.
이제 다음 주자는 리버풀의 조던 헨더슨이다.
팀의 주장에게 마지막 킥을 맡기는 건 매우 당연한 일이다.
이를 지키지 못했던 잉글랜드 국가대표가 유로에서 우승컵을 날려버리기도 했다.
“후우우….”
십 년이 넘는 선수 생활을 한 그도 처음 느껴보는 중압감이다.
비록 다음에 포츠머스가 성공하면 끝이었지만, 그래도 그는 해내야만 했다.
-촤악.
주장답게, 거침없이 훌륭한 킥을 선보였다.
아론 람스데일이 방향을 읽었지만, 너무 좋은 킥이라서 막아낼 순 없었다.
[자! 이제, 승부를 결정지을지도 모르는 마지막 키커, 케빈 도슨이 준비합니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주장, 케빈 도슨! 그가 해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요!]
모두의 꿈을 짊어진 케빈 도슨은 천천히 킥을 준비했다.
“후…. 하….”
마찬가지로 깊은숨을 내쉬었다.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의 박동수를 천천히 줄여나갔다.
“후…. 하….”
순간, 지난 6년간의 동화와 같던 나날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우승컵의 문턱에서 아쉽게 패배한 날들은 그를 강하게 만들었다.
최약체에서 최강의 팀으로 진화하면서 그는 자신감을 얻었다.
‘우린 트레블을 할 거다.’
수년 전, 소하의 호언장담이 떠올랐다.
사실, 그때만 해도 말로는 믿는다고 했어도 확신하지는 못했었다.
그도 그럴 게, 포츠머스는 너무 약했다.
아직 프리미어 리그에도 승격하지 못했는데, 트레블이라니. 지나가던 개도 웃지 못할 허황한 꿈이다.
하지만 그는, 그들은 이루어냈고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었다.
‘이젠 확신한다.’
너무나 꿈같은 나날이었기에, 거품처럼 사라질까 봐 두려웠다.
그러나 이것도 이제 마지막이다.
이제야 케빈 도슨은 확신했다. 흔들림 없는 마음 끝에 그 어느 때보다 자신감 있는 킥을 선보였다.
-투확!
승부차기치고는 상당히 강한, 왼쪽 위 끝의 구석을 노리는 강렬한 슛이 작렬했다.
-슈욱!
이 슛에는 수많은 꿈이 담겨있었기에, 그 어느 때보다 멋진 직선을 경기장에 수놓았다.
-철썩!
쭉 뻗은 알리송 베케르의 손을 유유자적하게 스쳐 지나간 공은 그대로 골네트에 틀어박혔다.
훌륭하고 자신감 넘치는 성공이었다.
또한, 포츠머스의 역사적인 챔피언스 리그의 첫 번째 우승이자,
전관 우승이라는 신화가 새로이 쓰였다는 승전보였다.
“으아아아아!”
가슴속에서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목을 통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이 감정을 표현하기엔 이러한 방법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제정신을 차리기 힘들었지만, 케빈 도슨은 반사적으로 달려나갔다.
포효를 내지르며, 뒤따라오는 수많은 동료를 인도하듯, 그는 달리고 또 달려갔다.
그리고 그 뜀박질의 끝에는 당연히 그가 너무나도 존경하는 감독이 있었다.
“해냈구나!”
밝게 웃으며 달려오는 케빈 도슨을 힘차게 끌어안아 주는 소하!
곧이어 선수들도 소하를 덮치기 시작했고 그들은 한대 어우러져 계속해서 소리 질렀다.
“우리가 해냈다!”
“해냈다고요!”
“우리가 챔피언이다아아!”
“우오오오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기적을 일군 그들이었다.
***
‘해냈다.’
막상, 케빈 도슨이 페널티킥을 성공했을 때만 해도 소하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생각보다 덤덤했다.
그동안 너무나도 확신했기 때문이었을까? 그랬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막상 단상 위에서 선수들이 우승컵 셀레브레이션을 준비하자 눈물이 핑, 돌았다.
드디어 현실임이 가슴에 와닿은 모양이었다.
‘해냈습니다. 전 해냈다고요.’
거미줄처럼 그를 옳아 맺던 과거의 사슬이 사라짐을 느꼈다.
홀가분했고 기뻤다.
순수하게 그저 행복했다.
그리고, 조금 아쉽기도 했다.
‘나도 저 자리에서 빅이어를 들고 싶었는데.’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나 보다.
그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전대미문의 업적을 이루었음에도 아쉬움이 남았다.
‘그냥 계속 선수나 할 걸 그랬나?’
자조적인 미소가 절로 나왔다.
말도 되지 않는 헛소리였기 때문이다.
그의 다리는 선수를 그만두었기에 기적적으로 나았을 뿐.
포기하지 않았다면 휠체어 신세가 됐을지도 몰랐다.
‘근데, 쟤네들은 왜 빨리 진행하지 않고 쑥덕거리는 거야?’
우승컵 셀레브레이션이 시작하고도 남은 시간이었지만, 아직도 뭐라 뭐라 이야기 중이다.
그리고 이제 막 이야기가 끝났는지, 진행요원이 소하에게 다가왔다.
“감독님. 선수들의 요청인데요….”
“뭔데요?”
“참, 이게 애매해서요. 규정에 딱히 적혀있는 것도 아니고, 관행이란 느낌이라….”
“그러니까 뭐냐고요.”
소하가 추궁하자, 진행요원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감독님께서…. 우승컵을 들어주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선수들이요. 그것도 매우 강력하게.”
“….”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해서, 감독님의 선택에 따르겠다고 합의했습니다.”
“….”
소하는 대답 대신 선수들을 바라봤다.
그러자, 선수들이 어서 오라고 손짓했다.
“뭐 하세요!”
“빼지 말고 오시죠?”
“혹시 쫄?”
“헤이! 오라고!”
“감독님!”
환하게 웃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자, 망설임이 사라졌다.
‘새끼들.’
절로 걸음이 옮겨졌다.
그러자, 이를 기다리기라도 하듯 밀러와 에밀리아 존슨이 달려와 유니폼을 건네주었다.
그 유니폼에는 소하의 이니셜과 함께 1376이라는 독특한 번호가 박혀있었다.
“이게 뭐죠…?”
소하가 묻자, 밀러와 에밀리아 존슨이 답했다.
“감독님의 유니폼입니다. 허허. 멋지지 않습니까?”
“2013년 7월 6일에 부임하신 감독님을 기리기 위한 유니폼이에요. 입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입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소하는 그 자리에서 셔츠를 벗어 던지고 후다닥 유니폼을 입었다.
마치, 눈가에 고인 물기를 숨기려는 듯이.
“고마워요.”
짧게 감사를 표한 소하는 어색하지만, 점점 자신감 있는 발걸음으로 단상에 올랐다.
“새끼들. 깜짝 이벤트냐?”
난데없이 사상 초유의 이벤트를 맞이한 소하가 눈을 흘겼지만 이내 웃음 지었다.
“그럼, 템포 따라와라. 이 몸의 트로피 드는 솜씨는 감독질보다 뛰어나니까.”
제자들에게 단단히 각오하라고 외친 소하는 그대로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우렁찬 포효와 함께.
“우와와와아아아아!”
모든 고생을 한꺼번에 날려버릴 만큼 우렁찬 함성이었다.
또한, 스티븐 제라드만큼이나 맛이 있는 셀레브레이션이었다.
동시에, 선수들 또한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고, 폭죽까지 터졌다.
-펑, 퍼퍼펑!
흩날리는 꽃가루가 쉴 새 없이 그들의 머리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그야말로, 동화에서 시작해서 신화로 끝나는 이야기의 결말에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 303화. 동화의 끝은 신화로. (9)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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