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0화. 동화의 끝은 신화로. (6) >
후반전을 시작하기 위해 선수들이 다시금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와 동시에 포츠머스를 응원하던 사람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아! 분위기가 달라졌다!”
“패배자의 눈빛에서 다시금 도전자의 눈빛으로 돌아왔어.”
“포기하지 않았구나. 믿고 있었어.”
척 봐도 분위기가 아예 달라졌다.
선제골을 먹혔을 때만 해도 어른에게 혼난 어린아이였거늘.
지금은 차가운 불꽃이 온몸을 뒤덮은 느낌이다.
[도대체 라커룸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포기했던 선수들이 다시 일어났습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성소하 감독이 또다시 마법을 부린 게 분명해요. 이젠 해볼 만해요. 3-0이라도 해볼 만하다는 이야기에요!]
톰 힉스와 나단 필립스는 주먹을 불끈 쥐며 흥분했다.
믿고는 있었다.
또한 계속해서 응원을 멈추진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축구 전문가였다.
누구보다 포츠머스를 믿는 서포터였지만, 전문가의 시선은 불가능을 외쳤다.
그만큼 전반전이 끝났을 때의 모습은 정말 암담했다.
죽은 생선의 눈빛을 한 채 고개를 푹 숙인 모습은 패배자, 그 자체였다.
그런데 포츠머스는 또다시 예상을 깨버렸다. 늘 그랬듯이.
무슨 일이 벌어진지는 알 수 없었지만, 경기가 시작하기 전보다 더욱 결연해진 모습은 가슴을 울리게 했다.
패배자에서 다시금 도전자로 부활하는 모습은 좀처럼 보기 힘든 일이었다.
‘위험하다.’
당연히 리버풀의 감독과 선수들도 달라진 포츠머스의 분위기를 한 번에 눈치챘다.
멀리서 봐도 쉽게 알아본 변화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이 있는 리버풀이 모를 수가 없었다.
‘조심하자.’
애초에 방심 따위는 하지 않았다.
3-0으로 앞서나간다고 해도, 리버풀 또한 무척이나 간절한 팀이기 때문이다.
수년의 ‘무관’ 행진을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이겨야만 했다.
그래서 이들은, 휴식 시간의 라커룸 안에서도 어떻게 포츠머스를 박살 낼지 15분 동안 진지하게 논의하고 온 후였다.
3골이나 앞서있었음에도!
‘선택해야겠군.’
리버풀의 위르겐 클롭 감독은 눈빛을 빛내며 고민에 빠졌다.
전반전처럼 경기에 임할 것인가.
조금 수비적으로 내려설 것인가.
두 선택의 갈림길에 선 위르겐 클롭 감독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
-삑!
후반전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울려 퍼졌다.
리버풀의 공격이 시작되자마자 포츠머스 선수들은 이를 악물고 전방 압박을 감행했다.
전반전과 비슷해 보였지만, 단순히 감정만을 내세운 압박이 아니었다.
열정적이되, 항상 이성의 끈을 놓지 않은 절제 있는 압박이다.
덕분에 리버풀의 선수들은 경기가 훨씬 어려워졌음을 피부로 느꼈다.
‘실력이 늘었다…?’
‘정말 위협적이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이 포츠머스와 만났지만, 가장 상대하기 어렵다.’
포츠머스를 경시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실력만큼은 자신들과 동급의 대적자라고 뼛속 깊이 새겨둔 지 오래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달랐다.
분명 비슷한 실력이었는데, 지금은 자신들을 압도하는 실력을 뽐내는 기분마저 들었다.
이렇듯 포츠머스는 한 발 더 앞서나갔고, 무엇을 할지 훤히 알고 있다는 듯이 움직였다.
이러한 노력 덕분인지 후반 3분, 포츠머스는 전방 압박에 성공했다.
[델리 알리가 바이날둠의 공을 빼앗아 냈습니다! 페널티에어리어로 달려가는 모하메드 살라에게 전진패스를 찔러 넣어주는 델리 알리!]
[모하메드 살라 기회에요! 슛!]
-텅!
왼발이 아닌 오른발로 때린 모하메드 살라의 통렬한 슛.
아쉽게도 측면 골대에 맞고 공이 나갔지만, 리버풀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이젠 정말 결정해야 한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리버풀의 위르겐 클롭 감독은 드디어 결단을 내렸다.
전반전의 포츠머스와 후반전의 포츠머스는 전혀 다른 팀이라는 사실은 인정했다.
‘정신론은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별거 아닌 선수들이 정신력만으로 더 뛰어난 실력을 보여줄 순 없다.’
하지만 포츠머스는 별거 아닌 팀이 아니었다.
‘최고의 실력을 갖춘 선수들이 최고조로 정신력을 끌어올렸을 때, 그때야말로 한계를 뛰어넘는다. 정신력이 유의미해지는 유일한 순간이다.’
정신력은 달리 말하면 집중력이었다.
집중력이 최고조에 이르면 수년간 단련한 최고의 육체를 마음대로 움직이는 게 가능했다.
선수들은 항상 가진 육체와 기술의 100%를 끌어내지 못한다.
하지만, 정신력이 극한에 다다랐을 때는 모든 것을 끌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포츠머스가 실력으로 비슷했던 리버풀을 압도하기 시작하는 이유였다.
‘성소하 감독에게는 미안하지만, 난 우리가 맺은 무언의 협약을 깰 수밖에 없다.’
맞불 작전은 어디까지나 실력이 동등할 때의 이야기일 뿐.
실력으로 밀린다면 당연히 수비적으로 나서야 했다.
그래서 위르겐 클롭 감독은 연습은 해왔지만 별로 사용하지 않던, 수비적인 전술을 지시했다.
[리버풀이 뒤로 물러납니다! 그간 항상 당당하게 맞섰던 리버풀이 뒤로 물러나며 수비적으로 경기를 운영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이 내려왔네요. 골을 넣기보다는 지키겠다는 의지에요. 포츠머스로서는 조금 더 어려워지겠네요.]
당연히도 포츠머스엔 악조건이었다.
상대가 라인을 올렸을 때도 골을 넣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이렇게 나오시겠다, 이거지?’
소하는 고소를 머금었다.
그 위르겐 클롭 감독이 먼저 협약을 파기할 줄이야.
전혀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상당히 일렀다.
그렇다고 위르겐 클롭 감독에게 불만을 품진 않았다.
‘나였어도 세 골 차이로 이기고 있었다면 바로 배신했겠지. 하지만, 어떨까?’
예상보다 빠른 리버풀의 수비태세.
이것이 어떤 결과를 나을지는 지금으로선 알 도리가 없었다.
***
포츠머스의 파상공세는 계속되었다.
완전히 수비적으로 내려앉은 리버풀은 쉴 새 없이 두들겨 맞았다.
이제 시간은 후반 15분.
15분 동안 얻어맞은 슈팅만 10개였다.
그야말로 화산폭발 같은 맹렬한 공격.
이러한 포츠머스의 엄청난 공격에는 주장, 케빈 도슨의 미친 듯이 활약이 있었다.
[정말 대단한 선수입니다. 수비수임에도 거의 미드필더처럼 올라가서 공격을 주도하는 케빈 도슨입니다!]
[심지어 공격이 끝나면 순식간에 수비진영으로 돌아와 역습에 대비하고 있어요.]
케빈 도슨은 실로 영리한 남자였다.
소하가 따로 지시하지 않았음에도, 내려선 리버풀을 뚫어낼 방법을 알아서 실천하는 중이었다.
원래도 뛰어난 선수였으나, 지금은 한계를 뛰어넘어 다른 무언가로 진화한 수준이었다.
지금의 케빈 도슨을 설명할 이름이 딱 하나 있었다.
바로, 프란츠 베켄바워.
독일의 신화적인 선수가 회춘한다면 딱 이러한 모습을 보여줬을 거다.
이러한 케빈 도슨의 엄청난 투혼은 자책과 후회라는 감정이 원동력이었다.
‘난 주장의 자격이 없다.’
소하가 말했었다.
네가 무너지지 않는 이상 포츠머스는 무너지지 않는다고.
그러나 그는 한번 무너졌었다.
그를 무너지지 않게 붙잡아주는 소중한 모든 이들을 순간, 망각했다.
그래서 케빈 도슨은 부끄러웠고 화가 났으며 만회하고 싶었다.
‘만회하고야 만다. 난 그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난 선수로서, 인간으로서 실격이다.’
너무나도 강한 책임감!
이것이야말로 그의 한계를 늘려준 결정적인 요소였다.
그러나 리버풀은 너무나 강했다.
강했으며 끈질겼고 단단했다.
자신을 물론, 동료들도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었지만 쉽사리 뚫리지 않았다.
이대로 시간이 더 지나가면 역전의 기회마저 사라진다.
20분이 남으면 초조해질 테고,
10분이 남으면 좌절할 테고,
1분이 남으면 산술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30분이 남은 지금이야말로 마지막 기회였다.
3골을 따라잡기 위한 마지막 기회란 말이다.
“…!”
그리고 그때.
다시금 공격진영으로 들어간 케빈 도슨의 눈에 자그마한 길이 보였다.
다른 선수보다 뒤에서 경기장을 바라볼 수 있었던 수비수였기에 찾아낸 작은 틈이었다.
‘우리가 좌우로 측면 전환을 할 때, 리버풀의 수비벽 오른쪽에 틈이 생긴다.’
버질 반 다이크가 버티는 리버풀의 왼쪽이 아니었다.
포츠머스에게는 왼쪽, 리버풀에는 오른쪽인, 알렉산더 아놀드와 조엘 마팁이 버티는 곳이었다.
금방 사라지긴 했지만, 반대쪽에는 아예 없는 틈이었다.
공격은 훌륭하지만, 수비가 약점인 알렉산더 아놀드와 버질 반다이크보다 떨어지는 수비수, 조엘 마팁이 만들어낸 약점이다.
‘너무 빨리 사라지긴 하지만, 약점임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생각을 빠르게 정리한 케빈 도슨.
그는 동료들에게 무언으로 손짓해 작전을 전달했다.
‘좌우 전환 후 바로 나에게.’
쉬운 작전이었다.
빠르게 사라지는 틈이라면 사라지기 전에 비수를 꽂아 넣으면 되는 일이었다.
실로 북해의 빙벽이란 별명에 어울리는 냉정하고 이성적이며 훌륭한 판단이었다.
말은 쉬웠지만 어려운 일이긴 하다. 1~2초라는 극히 짧은 시간 안에 미세한 틈을 향해 정확한 슛을 때려 넣어야 한다.
더해서 월드 클래스 골키퍼, 알리송 베케르가 막지 못하도록 골대의 구석으로 강하게 차야 한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문제가 있다.
기회가 단 한 번밖에 없다는 것이다.
리버풀이란 팀은 적에게 내보인 약점을 그냥 방치할 머저리가 아니었다.
실로 어려운 일이었지만, 케빈 도슨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난 해낸다.’
비록 이걸로 그간의 실수를 모조리 만회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해내야만 했다.
이것마저 해내지 못한다면 그는 포츠머스에 있을 자격이 없을 테니까.
마침내, 기다리는 자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툭.
오른쪽 측면에서 케빈 도슨의 사인을 받은 델리 알리는 전진패스를 하는 척하면서 중앙으로 공을 흘렸다.
딱, 바로 슛으로 연결하기 좋을 만큼 안정적이고 곧은 패스였다.
왼발잡이인 케빈 도슨의 보폭마저 계산한 클래스가 엿보이는 패스이기도 했다.
-투확!
왼발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낮게 깔리며 실낱같은 미세한 틈을 총알처럼 통과했다.
‘됐다!’
공을 때리는 순간 케빈 도슨은 직감했고, 곧바로 앞으로 달려나갔다.
동시에 공은 골대 안으로 그대로 빨려 들어갔다.
알리송 베케르가 몸을 던지지도 못할 만큼 멋진 중거리 슛!
-철썩!
포츠머스가 염원하고 염원했던 골이 기어코 터졌다.
[골입니다! 주장 케빈 도슨! 그가 해냈어요! 엄청난 중거리 슛입니다!]
[후반 16분. 포츠머스가 한 골 따라붙는 데 성공했어요! 이제 시작이에요!]
톰 힉스와 나단 필립스는 물론, 포츠머스를 응원하던 모든 이들이 기쁨에 겨운 함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골을 넣은 케빈 도슨에게는 기쁨이란 머나먼 감정이었다.
곧바로 골대 안으로 달려가 공을 들고 중앙선으로 돌아오는 케빈 도슨은 셀레브레이션 따위를 하지 않았다.
그저, 그 어느 때보다 큰 목소리로 우렁차게 외쳤을 뿐이었다.
“우린 할 수 있다! 더 힘을 내! 우린 역전할 수 있다! 우린 포츠머스다!”
투사들을 독려하는 케빈 도슨!
팔을 위아래로 휘저으며 포츠머스 선수들의 사기를 끌어 올렸다.
이 모습은 그야말로 주장, 그 자체였고 포츠머스의 자부심이었다.
***
한 골 따라잡은 포츠머스의 공세는 더욱 날카로워졌다.
3-0과 3-1.
다가오는 느낌이 다르다.
활활 타오르는 포츠머스에 기름을 부은 격이다.
자고로 축구란 스포츠는 기세가 무엇보다 중요한 스포츠.
기세만 탄다면 월드컵에서 사우디아라비아가 아르헨티나를 잡기도 하며, 한국과 일본이 독일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하여튼, 리버풀은 그 후 10분 동안 단 한 번도 중앙선을 넘지 못하고 흠씬 두들겨 맞았다.
그래도 어찌어찌 버텨내고 있었기에 포츠머스로서는 한 골이 더 필요한 시점이다.
다시 한번 주인공이 필요했고, 포츠머스답게 주인공이 튀어나왔다.
이번에는 케빈 도슨 만큼이나 절치부심한 후벵 디아스가 주인공이었다.
‘만회해야만 한다.’
실점의 빌미라는 크나큰 짐!
이것을 덜어내기 위해 후벵 디아스는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이러한 독기는 곧바로 이어진 코너킥에서 빛을 뿜었다.
포츠머스의 11번째 코너킥.
키커는 모하메드 살라.
연이어 좋은 기회를 잡았지만 골로 연결하지 못한 그는 신중하고 자신감 넘치게 공을 중앙으로 투입했다.
-슈루루루룩.
엄청난 속도로 휘어져 들어가는 모하메드 살라의 코너킥.
그 끝에는 버질 반 다이크보다 한 뼘이나 높게 뛴 후벵 디아스의 머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신장이 9cm나 작은 후벵 디아스가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버질 반다이크보다 공의 속도를 더 정확히 계산했고 더 늦게 뛰었다.
또한 가벼운 만큼 더 높게 뛰었다.
집중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덕에 만들어진 놀라운 기적이었다.
다시 이렇게 뛰어보라고 해도 절대 하지 못할, 한계를 넘어선 플레이였다.
-철썩!
슬쩍 방향만 틀어준 멋진 헤더는 시원한 골을 만들어냈다.
[으아아아아! 골이에요! 후벵 디아스가 해냈습니다! 후벵 디아스가 버질 반 다이크를 제압하고 똑같이 골을 갚아줍니다!]
[아…! 이게 포츠머스에요. 이거죠. 이게 축구에요. 으어어어악!]
점잖던 나단 필립스마저 발광을 떨게 만들 만큼 엄청난 경기력이었다.
당연히도 포츠머스를 응원하는 모든 이들을 미치게 만드는 골이기도 했다.
“가즈아아아아아아!”
“미쳤다! 미쳤어!”
“동점이 코앞이다!”
난리가 났다.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목이 터질 듯이 포츠머스를 연호하는 사람들이 우후죽순만큼 늘어났다.
“뭐야…. 이거….”
“무, 무서워….”
“호, 혹시…?”
반대급부로 리버풀과 리버풀을 응원하던 쪽의 분위기는 급격히 죽어버렸다.
30분 전까지만 해도 빅이어를 반쯤 들어 올렸다고 자부했거늘.
믿을 수 없었고, 믿기도 힘든 현실이었다.
이제 남은 시간은 15분.
포츠머스와 리버풀에게는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가혹한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 300화. 동화의 끝은 신화로. (6)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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