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4화. 그 끝에 서서. (10) >
자주 꺼내 봤는지, 테두리가 헤진 사진은 소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버지의 선수 시절이네.’
보아하니 기적적으로 포츠머스가 승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었던 시즌 같다.
소하가 막 태어났을 시절이기도 하며 은퇴를 할 만큼 크게 다치기 며칠 전이기도 했다.
‘대단했다고 하지.’
당시 소하의 아버지, 미스터 포츠머스라는 별명을 자랑한 그는 리그에서만 46골을 넣었다.
비록 2부리그인 챔피언십 리그에서의 기록이었지만 국가대표에 뽑힐 만큼 대단한 활약이었다.
팀원들의 수준이 강등권임에도 혼자 힘으로 꾸역꾸역 골을 넣는 모습은 아직도 회자할 정도다.
‘아버지가 해트트릭하면 네 골을 대주는 버러지 팀이었지….’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승강 플레이오프에서 무릎이 박살 날만큼 크게 다치었고 그길로 은퇴할 수밖에 없었다.
충격에 빠진 포츠머스가 무력하게 승격에 실패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불행한 운명을 가진 분이셨어.’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었음에도 20대 초반에 은퇴해야 했으며,
그에 굴하지 않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음에도 30대 초반에 세상을 떠나야만 했다.
소하의 아버지는 꿈을 손아귀에 넣었을 때마다 운명의 차디찬 외면을 받아온 불행한 남자였다.
세상에 이렇게 불행한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하지만, 단 한 번도 자기 자신을 불행하다고 여기지 않으셨지….’
소하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항상 밝고 행복하며 따스하며 자상한 웃음을 짓는 남자였다.
그렇기에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이 아려올 수밖에 없었다.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가슴에 묻고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혹은 불행에 지친 우울한 남자였다면 아예 잊고 살았을 텐데.
오히려 불행 따위는 한점도 보이지 않는 좋은 사람이었기에 잊지 못했다.
‘그나저나 왼쪽의 이 대머리는 브라이언처럼 생겼는데?’
두상이 익숙하다.
20대 시절의 브라이언이 분명했다.
저 증오스러운 두개골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20대에도 대머리였구나…. 조금 불쌍할지도….’
약간 측은한 마음이 들었지만, 곧이어 의문이 가득 찼다.
어째서 아버지와 브라이언이 제법 친해 보일까? 어깨동무한 모습을 보자니 친구일 텐데, 소하는 금시초문이었다.
‘그리고…. 오른쪽의 남자는 누구지?’
마찬가지로 서로 어깨동무를 한 낯선 남자는 아예 처음 보는 얼굴이다.
덩치가 크고 근육질이지만 왠지 모르게 지적으로 보이는 남자다. 마치, 조금 전에 라우라 맥닐이 말했던 이상형이 실존한다면 딱 저 모습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 사진은 뭐죠?”
잠시 멍하니 사진을 바라보던 소하는 당연한 질문을 건넸다.
“보시다시피 자네 아버지와 브라이언의 사진이라네.”
“그러니까 왜 구단주 할아버지가 이걸 가지고 계시냐는 거죠. 게다가 왜 브라이언하고 저렇게 친해 보이죠? 오른편의 남자는 또 누구고요.”
“음. 내 대답이 조금 잘못되었군. 정정하지. 정확히는 내 아들의 사진이라네. 더 자세히 말하자면 내 아들과 친구들의 사진이라고 할 수 있겠지.”
“…네?”
순간 머리가 굳어버렸다.
아버지가 리처드 맥닐의 아들?
그럼 난 저 영감탱이의 손자?
같은 이상한 생각도 들었지만 금세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아침드라마도 아니고.’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아버지와 브라이언의 얼굴은 안다.
즉, 저 근육질의 이름을 모르는 남자가 리처드 맥닐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소하는 눈앞에서 아련하고도 고독한 눈빛으로 차를 음미하는 노인에게 아들이 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들어본 적 없겠지.”
리처드 맥닐은 소하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천천히 말을 이었다.
“못난 녀석이었어. 그리고 내 자부심이기도 했지. 모든 면에서 뛰어났어. 하지만 너무 자유로운 영혼을 가지고 태어났지. 내 말을 지독스럽게도 듣지 않았다네.”
“어떤…?”
“가령, 취미생활로도 녀석은 축구를 좋아했다네. 축구, 노동자들의 오락. 난 별로 좋아하지 않아. 그래서 난 좀 더 상위계층에 어울리는 취미를 강권했지. 물론, 녀석은 듣지 않았지만 말일세.”
“….”
심정은 얼추 이해가 갔다.
리처드 맥닐은 혼자만의 힘으로 최하위계층에서 최상위계층으로 신분 상승한 인물.
이래저래 신분에 대해 아쉬움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인생이었다.
그래서 아들만은 윗물에서 살길 바랐을 거다.
“그래도 난 아들의 의견을 존중해줬다네. 축구 정도야, 왕족도 좋아했으니까. 하지만 100년 가까이 약자에서 벗어나진 못한 포츠머스란 팀을 응원하는 것만큼은 참을 수 없었네.”
“강자로 서길 바랬을 테니까요.”
“허헛. 자네는 내 마음을 잘 아는군. 맞네. 난 어차피 좋아할 거면 승리자를 원했지. 패배자를 응원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말이 심하네요….”
“사실이라네. 아니, 정확히는 사실이었다고 해야겠지.”
과거형으로 바꾸었다는 건 이제는 승리자라는 이야기였다.
“약한 팀을 응원하는 맛도 있는 법이죠.”
“흥. 약자들끼리 서로 상처를 핥아주는 꼴이겠지. 아무튼, 난 이해하지 못했고 아들도 내 말을 들을 생각조차 없었다네. 그래서 내가 물었지. 저 팀을 왜 좋아하냐고.”
“이유가 뭔가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네. ‘좋아하는 데에 이유는 필요 없다.’라고 했지.”
“이야. 괜히 자식 자랑하는 줄 알았는데 진짜 유능한 사람이었네요.”
소하는 문득 저 사진 속에서 웃는 리처드 맥닐의 아들이라는 남자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좋아하는데 이유는 없다.
이 얼마나 낭만적인 대답인가.
100점 만점에 120점짜리 정답이었다.
적어도 소하에게는 말이다.
“자네 마음에 쏙 들었을 대답이었기도 했지. 더해서, ‘포츠머스에는 위대한 선수가 될 남자가 있어서 좋다.’라고 덧붙이기도 했다네.”
“그 선수가 저희 아버지군요.”
“그렇지. 그래서 둘은 자연스럽게 친해졌어. 자네의 아버지도 자네와 성격이 비슷한 구석이 있었으니까.”
“그럼 브라이언은요?”
“그 친구는 내 아들의 친구였다네. 정확히는 추종자라고 할 수 있지. 어렸을 때부터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어. 마치, 애완견처럼 말이야.”
신랄한 발언에 소하의 미간이 좁혀졌다. 브라이언이 욕을 먹어서? 설마.
왠지 그림이 그려졌기 때문이다.
“자네는 영특하니 셋의 관계가 어땠는지 눈치챘으리라 믿네.”
“….아버지와 아들분은 구김 없는 성격이니 진짜 친구로 대해줬겠지만, 브라이언은 아니었겠죠. 적어도 우리 아버지에게는요.”
“정답일세. 겉보기에는 사이가 좋았지만, 브라이언은 아니었지. 물론, 이 관계는 금방 파탄이 났다네. 자네 아버지가 은퇴하면서 말이야.”
“무슨 일이 있었죠?”
“못난 아들 녀석이 죽었네.”
단장지애.
자식의 죽음은 창자를 끊어내는 것만큼이나 고통스럽다고 한다.
아들의 죽음을 입에 담는 리처드 맥닐의 목소리는 너무나 덤덤했다.
그래서 더욱 고통스러워 보였다.
이미 비명을 지를 힘조차 없는 모습으로 보였다.
“무척 상심했지. 평소엔 뇌세포를 파괴한다며 술을 그리도 멀리했건만. 자네 아버지의 은퇴가 얼마나 슬펐는지 그날따라 몸에 맞지도 않게 술을 들이켰다네.”
“….”
“그리고 그게 끝이었어. 급성 알코올 중독으로 너무나도 허무하게 세상을 떴다네.”
“….”
“머저리 같은 녀석이야. 그리고 나도 머저리였지. 난 아들의 죽음이 부끄러웠네. 그래서 숨겼지. 마치, 내 치부 같았어. 응원하던 팀이 승격하지 못했다고, 좋아하던 선수가 은퇴했다고 죽었다는 건…. 당시의 나로서는 용납할 수 없었어.”
그 어느 때보다, 덤덤한 목소리 때문에 소하는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위로라도 해볼까 했지만, 주제넘은 짓이라고 생각했다.
당사자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데, 말로만 괜찮냐고 주절거리는 건 위선이었다.
지금 소하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화제를 돌리는 것뿐이었다.
상처를 계속 후벼파는 꼴은 당사자도, 보는 사람도 힘들었으니까.
“그래서 포츠머스를 인수하셨군요.”
“역시 자네는 사람의 마음을 잘 아는군. 그래서 독특한 젊은이들을 한데 아울러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낸 거겠지.”
“원래 무슨 일이든 사람 부리는 일이 제일 힘든 법이죠. 사람 마음은 도저히 알기 힘들잖아요?”
“옳은 말일세. 그래서 나도 한번 알아보고 싶어졌다네. 도대체 왜 아들이 포츠머스를 좋아했는지 이해해보려고 했지. 비록 시간이 많이 흐른 뒤였지만 말이야.”
이제야 의문이 풀렸다.
어째서 리처드 맥닐이 망하기 직전의 포츠머스를 인수했는지 이제야 알았다.
그는 늦었지만 알려고 노력했다.
또한, 포츠머스가 사라지는 모습을 차마 보지 못했을 거다.
이 작고 작은 구단이 사라진다면, 아들의 꿈마저 영원히 사라질 테니까.
그것만은 막고 싶었던 한 아버지의 바람이었다.
“팀을 말아먹은 브라이언이 잘리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군요.”
“그는 그저 운이 없었던 것뿐이라네. 망해가는 구단의 CEO로서는 낙제점이지만, 평범한 구단이었다면 훌륭한 인재였겠지.”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죠.”
“그래, 그는 포기하지 않았어. 내 아들이 바랐던 ‘포츠머스의 비상’을 자기 손으로 이루고 싶어 했지. 자네 아버지는 썩 좋아하지 않았지만, 아들에게만은 진심인 친구였으니까. 그런 사람을 어떻게 내치겠는가? 적어도 난 그리하지 못했네.”
“…뭐, 불쌍한 인간이긴 하네요.”
소하는 혀를 찼다.
생각해보니 브라이언의 입장에선 자신이 엄청난 눈엣가시였음을 통감했다.
질투하던 남자의 아들을 대충 이용하다가 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 아들은 오히려 자신이 해내지 못했던 그들의 꿈을 이루어버렸다.
이 얼마나 가혹한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이래저래 세 명 모두, 정말로 불행한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불쌍한 남자들이었다.
“하지만 자네는 그를 붙잡을 생각이 없겠지?”
“그야 당연하죠.”
냉정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불쌍한 남자이긴 했지만, 이건 별개의 이야기다.
그동안 당한 게 얼만데, 그냥 용서해줄 만큼 마음이 넓은 인간이 아니었다.
게다가 사심도 사심이지만, 대국적으로 봐도 브라이언의 퇴진은 막을 이유가 없다.
앞으로 점점 더 커질 포츠머스를 위해서라도 유능한 CEO와 업무를 분담해야 할 터.
이미 너무나도 사이가 멀어진 브라이언과 함께 일을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리처드 맥닐의 생각도 소하와 같았다.
“역시 좋은 결정일세. 앞으로의 포츠머스는 브라이언이 감당하기 힘들 테지. 오히려 지금이라도 미련을 끊어주길 바랄 수밖에 없어.”
“끊어냈기에 사임 의사를 밝혔겠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사람의 집착은 생각보다 질기다네. 너무나도 어리석지.”
자기 자신에게도 하는 말이었다.
“그나저나….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건 이제 이유를 아셨다는 건가요? 아들이 어째서 포츠머스를 좋아했는지?”
“아니. 아직은 잘 모르겠네.”
가볍게 고개를 저은 리처드 맥닐은 수염을 매만지며 읊조렸다.
“그래도 조금은 알 것 같네.”
“뭔가요?”
“그냥 좋다는 뜻이 무엇인지 자네들의 성장을 보면서 조금은 느꼈네.”
“….”
“물론, 난 자네들이 이루어낸 뛰어난 업적에 반한 것일지도 모르네. 누구도 가망이 없다고 단언한 불가능을 이루는 자네들의 모습은 나 같은 늙은이의 가슴에 불을 지필 정도였으니까.”
“그거면 충분할 거 같네요.”
소하는 미소 지었다.
이미 고인이 된 아버지의 친구는 리처드 맥닐과 마찬가지로 가슴에 불이 타올랐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어렸을 적, 모처럼 푸르른 하늘을 맞이한 포츠머스의 그 여느 날처럼.
“그랬으면 좋겠군.”
리처드 맥닐도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아들의 꿈을 이루어낸 눈앞의 자신만만한 젊은이가 고마웠다.
“고맙네.”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감사의 말에 소하는 입을 떡 벌렸다.
“뭐, 뭐라고요?”
“고맙다고 했네만.”
“하. 하하. 하하하. 제가 살다 살다 영감님 입에서 고맙다는 말을 다 듣네요.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에요? 그렇죠?”
“시, 시끄럽네.”
멋쩍게 시선을 돌리는 리처드 맥닐.
저 날뛰는 모습을 보니 괜히 감사를 표했나 싶기도 했지만, 그냥 그러려니 했다.
고마운 건 사실이었으니까.
“이래저래 맥닐 가문은 참으로 답답한 사람들이네요. 라우라가 포츠머스를 매각하려는 이유도 오빠 때문이죠?”
“20살 가까이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자기 오라버니를 엄청나게 따랐다네. 그래서 그 아이는 포츠머스가 미울 거야. 얽히고 싶지도 않겠지. 겉과는 다르게 그 아이는 감정적이야. 고쳐야 할 점이지.”
“그 말은 꼭 해주시길 바랍니다.”
“어차피 그 아이가 나의 뒤를 잇기 위해선 10년은 더 있어야 할걸세. 그전에 마음을 바꿀 수도 있고.”
10년이라.
이 정도면 이미 소하는 축구계에서 사라질 예정이었으므로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럼, 이제 마지막으로 부탁 한 가지만 하겠네.”
“라우라와 결혼해달라는 거 빼고는 뭐든 고려해 보도록 하죠.”
“쯧쯧. 맥닐 가의 사위가 될 기회를 차버리다니. 자네도 아직 배울 게 너무 많아.”
“취향이 아니거든요.”
“허헛. 여자 보는 눈도 없군. 내 자식이라서 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 정도 여인은 좀처럼 만나기 힘들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군.”
“그건 그런데, 서로 안 맞아요.”
“그럼 어쩔 수 없지. 아쉽지만 말이야.”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 가득한 모습이었기에 소하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조금 흘러나왔다.
“딸 아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내 부탁을 말하겠네.”
“경청만 하죠.”
“이겨주게. 인제 와서 염치없지만, 내 아들의 꿈을 완성해주게.”
“….”
그간 포츠머스가 승리하든 말든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거늘.
리처드 맥닐의 입에서 이런 이겨달라는 부탁이 나오자 가슴이 울렁였다.
‘뭔가, 이겼다는 느낌?’
조금 유치하긴 했지만, 드디어 축구로서 저 거인을 쓰러뜨렸다는 정복감이 들었다.
그리고 딱히 부탁을 들어주고 말고 할 이야기도 아니었다.
어차피 누가 말려도 이길 작정이었으니까.
“한마디만 하죠.”
“….”
“전 그분들과는 달라요.”
소하의 맹랑한 발언에 리처드 맥닐은 처음으로 얼굴의 주름을 구기며 환하게 웃었다.
“그래. 그거면 됐네.”
소하의 아버지도.
리처드 맥닐의 아들도.
브라이언도.
모두 실패했다. 그들은 꿈을 손아귀에 넣지 못했다.
하지만 소하는 달랐다.
소하는 그들처럼 꿈의 끝에서 실패할 생각이 없었다.
이제, 그 끝에 서서 꿈을 잡아 움켜쥐기만 하면 되는 쉬운 일이었다.
< 294화. 그 끝에 서서. (10)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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