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2화. 그 끝에 서서 (8) >
“가서, 우승을 잘하는 팀이 어떤 존재인지 무관 귀신들에게 뼛속까지 깊숙이 알려주고 와라.”
소하는 FA컵 결승전에 앞서 선수들에게 우승을 밥 먹듯이 하는 팀의 품격을 보여주라고 요청했다.
“당연하죠. 쟤네들은 우리가 있는 이상 평생 무관일 거예요.”
“웸블리가 얘네 홈이라지만 우리도 여기는 자주 와서 익숙하죠. 우리의 홈이기도 해요.”
“자신감은 높지만, 방심은 하지 않겠습니다. 당당히 승리하고 오겠습니다.”
선수들은 토트넘의 홈구장과 다를 바 없는 웸블리 스타디움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로 그럴게, 포츠머스는 이번이 5번째 웸블리 스타디움 방문이었기 때문이다.
3부리그 시절에 한 번.
작년에 두 번.
올해 한 번.
이젠 너무 자주 와서 이젠 프래튼 파크 다음으로 익숙한 경기장이었다.
그리고 이 말은 포츠머스와 토트넘의 경험이 비교조차 어렵다는 뜻이기도 했다.
[포츠머스의 압승이 예상된다.]
[포츠머스는 ‘우승 DNA’를 가진 팀. 토트넘은 ‘무관 DNA’를 가진 팀. 경기의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토트넘에게는 불행하게도 팀의 체급조차 포츠머스 쪽이 상당히 앞서나가는 느낌이다. 3-0 완승을 예상한다.]
수많은 전문가는 포츠머스의 압승을 예상했고 실제 경기 또한 그렇게 흘러갔다.
-뻥!
보지 않아도 강력한 슈팅임이 느껴지는 타격음.
-텅!
동시에 묵직한 슛이 골대를 강타하는 소리가 웸블리 스타디움에 쩌렁쩌렁 울렸다.
“아! 아깝네!”
프리미어 리그 최고의 공격수이자 윙포워드인 조쉬 킹이 잔디를 뜯으며 아쉬워했다.
페널티 에어리어 근처에서 터뜨린 회심의 슛이었건만. 정말 종이 한 장 차이로 골대를 맞춰버렸다.
하지만, 점수 차이를 보면 이렇게 아쉬워할 정도는 아니었다.
전반 43분, 2-0.
벌써 두 골 차나 내면서 앞서가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경기의 주도권도 꽉 잡고 있어서 토트넘은 중앙선조차 넘어오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경기가 너무 일방적입니다. 토트넘은 벌써 경기를 포기해버린 것만 같아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전반전 초반에 어처구니없는 페널티킥을 내준 게 너무 타격이 컸어요. 이번 시즌부터 중앙 미드필더로 포지션을 바꾼 무사 시소코에게 너무나 가혹했죠.]
사실 토트넘은 전반 5분까지는 제법 막상막하의 경기를 보여줬다.
그러나 토트넘에서 중원의 핵심이었던 무사 시소코가 손을 써버렸다.
그것도 페널티박스 안쪽에서.
모두가 알다시피 축구에서 손을 쓸 수 있는 선수는 골키퍼뿐이었기에 페널티킥을 헌납했다.
그야말로 대실수!
너무나도 가혹한 운명이었다.
중앙 미드필더로 보직을 변경하면서 계륵 같은 선수에서 팀의 핵심으로 떠오른 무사 시소코였거늘.
그가 아니었다면 챔피언스 리그 4강까지 가지도 못했고 지금 이 자리에 토트넘이 올라올 수도 없었다.
이토록 잔인한 운명이 또 어디 있을까.
태양을 향해 멀리 날아올랐다가 낙하해서 객사한 이카루스가 따로 없었다.
물론, 포츠머스가 굳이 토트넘과 무사 시소코의 안타까운 사연을 봐줄 이유는 없었다.
“응. 어쩌라고.”
오랜만에 에링 홀란드 대신 중앙 공격수로 나온 마리오 발로텔리가 페널티킥 키커로 나왔다.
세계에서 알아주는 페널티킥 키커로 유명한 선수가 잡은 기회를 놓치기 만무했다.
-철썩.
전반 6분.
이른 포츠머스의 선제골이자 경기의 결과가 결정된 순간이었다.
중요한 경기에서 이른 시간 어이없는 실점을 헌납한 토트넘은 의자가 꺾였다.
마음의 등뼈가 부러졌달까.
가뜩이나 체급에서도 밀리는데 마음마저 밀리기 시작하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여기에 포츠머스 선수들은 잔인하게도 정신공격을 추가해줬다.
“우린 우승만 7개를 했는데. 너희는 몇 개 했어? 나름 강팀이니까 최소 3개는 했겠지?”
“….”
“설마 우리가 3부리그에 있던 시절이랑 같은 개수는 아니겠지?!”
“….”
“프리미어 리그에는 전설이 있어. 50년 동안 무관인 팀이 강팀이라고 불리는 이상한 이야기지….”
“….”
“무관따리. 무관따!”
“…씁.”
이를 악물고 버티던 토트넘의 선수들은 결국 심리전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이건 뭐, 어린아이들끼리의 얄팍한 말싸움도 아니고. 오히려 너무 유치해서 더욱 화가 났다.
가뜩이나 정신적으로 몰린 상태에서 이런 공격까지 받자 토트넘은 와르르 무너졌고, 결과가 이거였다.
[포츠머스 선수들이 너무나 쉽게 경기를 해나가고 있습니다. 이건 이미 거의 끝났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토트넘 선수들의 눈빛이 죽었어요. 이건 끝났네요.]
실력도 밀리는데 정신력마저 밀려버리는 터라 답도 없었다.
그렇게 포츠머스는 하고 싶을 걸 다하면서 토트넘을 농락했고, 기어코 마리오 발로텔리가 한 골 더 추가하며 달아난 전반전이었다.
***
-삑! 삑! 삑!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FA 컵 결승전의 끝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울려 퍼졌다.
결과는 3-0.
유효슈팅 하나 허용하지 않은 포츠머스의 압승이었다.
[포츠머스가 드디어!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처음으로 도메스틱 트레블을 달성합니다!]
[위대한 팀입니다. 여러모로 잉글랜드 축구계에 충격을 선사하는군요.]
포츠머스가 도메스틱 트레블을 달성할 확률은 높았다.
애초에 경기전부터 토트넘보다 매우 강한 전력이라고 평가받았으니까.
그러나, 애당초 포츠머스가 그러한 평가를 받는다는 사실부터가 놀라웠다.
6년 전만 해도 4부리그에 있던 팀이 그 누구도 달성하지 못했던 도메스틱 트레블을 달성하다니!
심지어 다른 구단처럼 엄청난 자본을 지원받은 것도 아니었다.
유망주를 키워 팀을 장기적으로 강한 팀을 만든다는 구단 운영의 기초이자 꿈을 완벽히 달성했다.
말로만 존재할 뿐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방식이었기에 모두가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포츠머스가 고칠 점이 없을 만큼 완성되었다고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아직 진정한 강팀으로 거듭나기 위해선 여러 난관이 남아있죠.]
[맞습니다. 지금은 강팀이긴 하지만, 미래에도 그럴 거란 보장은 없거든요.]
전문가들은 박수갈채를 보내면서도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포츠머스가 진정한 강팀이 되기 위해선 다음 세대가 중요합니다. 지금이야 성소하 감독의 뛰어난 안목으로 영입하는 선수마다 성공했지만, 항상 그럴 리는 없으니까요. 착실하게 유소년 네트워크부터 다져나가야 할 겁니다. 지금은 너무 얄팍해요.]
[맞습니다. 또한 포츠머스란 브랜드의 가치를 더욱 높일 필요가 있어요. 마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처럼요. 그들은 위대한 퍼거슨 감독이 떠난 뒤에 그저 그런 팀으로 전락했지만, 아직도 수입만큼은 전 세계 스포츠 구단 중에서도 탑 클래스입니다.]
잘나간다고 괜히 심술부리는 발언이 아니었다. 그들은 진정으로 축구 종가에 어울리는 팀인 포츠머스를 아꼈기 때문이다.
틀린 말도 아니었고 오히려 다 옳은 말이었다.
저들의 조언은 결국 소하가 다다르고 싶은 궁극적인 목표였다.
‘내가 천년만년 감독질을 할 거도 아니니까. 당장은 몰라도 오래는 하지 않을 거야.’
소하는 자기 자신을 잘 알았다.
이 때문에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나 아르센 벵거 감독처럼 수십 년 동안 감독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번에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승하면…. 한 5년도 되지 않아서 은퇴하겠지.’
정확한 시기는 몰랐지만 확실했다.
그간 너무 달려왔으니까.
과거의 10년. 현재의 6년.
16년이란 세월이다.
겉보기에는 젊지만 속은 어언 50대에 가까워졌다.
꿈을 이루고 나서도 다시금 예전처럼 활활 타오르기엔 체력이 달렸다.
쉬고 싶었고 더는 한계까지 자신을 몰아붙이기도 싫었다.
그리고 소하는 모든 것을 다 받칠 각오가 아니면 포츠머스를 이끌 생각도 없었다.
‘그래서 내가 떠나고도 팀이 계속 최고를 유지할 수 있게 기틀을 마련해야만 한다.’
상당히 과감한 투자라고 생각되었던 신축 경기장도 이것 때문이었다.
시간은 생각보다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뭐, 일단 챔피언스 리그를 우승하고 전관 우승을 달성하고 나서야 이야기니까.’
그전까지는 없던 연료도 만들어서 계속 불타오를 예정이었다.
“흠.”
소하는 상념을 집어치우고 환호에 가득 찬 웸블리 스타디움을 훑어보았다.
우승을 달성하고 기뻐하는 선수들이 소하를 불렀지만, 시선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
토트넘의 7번 선수였다.
도봉산에게 위로를 받는 이정재 선수의 등이 유달리 작아 보여 조금 께름칙했다.
너무 심한 짓을 한 거 아니겠느냐는 생각도 들었다. 저 선수 또한 누구보다 우승컵을 원했을 텐데.
‘그래도…. 내가 아니었어도 어차피 토트넘은 무관이라고…. 그리고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법.’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정재 선수에게 걸어갔다.
같은 한국인으로서 위로라도 해주려는 걸까?
하지만, 소하는 그렇게 친절하고 부드러운 남자는 아니었다.
“…재계약하지 마요.”
“네?”
난데없이 다가와 귓속말을 건네자 이정재 선수가 화들짝 놀랐다.
“재계약하지 말라고요.”
“…왜요?”
당연한 물음이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온 건 그저 소하 특유의 썩은 미소였을 뿐.
“후후. 뭐, 알아서 하세요.”
참고로, 포츠머스는 우승을 쓸어 담은 덕분에 제법 돈이 많은 구단이었다.
***
도메스틱 트레블을 달성한 포츠머스의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이유는 누구나 알고 있었다.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세계 최고의 팀을 가리는 역사적인 경기가 일주일 후에 기다리는 중이었다.
덕분에 선수들은 FA 컵 우승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다음 날부터 고강도 훈련을 시작했다.
“체력은 국력이다!”
“각개전투!”
대한민국 육군의 훈련소가 아니다.
포츠머스의 훈련장이 맞다.
“자식들아! 목소리가 작다! 그따위 모기 같은 목소리로 리버풀을 이길 수 있겠냐?!”
어디서 구해왔는지 궁금한 붉은 모자를 깊게 눌러쓴 소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여기는 포츠머스가 아니다! 월남전에 차려진 부트캠프라고 생각해라! 이건 축구가 아니다! 전쟁이다!”
“넵! 교관님!”
그놈이 그놈이라고 선수들도 우렁찬 목소리로 호칭을 바꿔서 대답했다.
하기야, 챔피언스 리그의 결승전은 그야말로 전쟁이었다.
이 사실은 그 누구보다 선수들 본인이 잘 알았기에 엄청난 체력훈련에도 불만하나 가지지 않았다.
게다가 다른 걸 다 떠나서 그간 포츠머스와 리버풀의 상대 전적은 선수들에게도 치욕이었다.
1승 2무 4패.
7번 싸워서 한번 밖에 승리를 챙기지 못한 최악의 상대!
이것은 소하만의 전적이 아니라 선수들에게도 같이 적용되는 전적이다.
그래서인지 선수들은 소하만큼이나 리버풀을 꺾어버리고 싶었다.
‘진짜 이번에는 이긴다.’
‘결국 최후의 승리자는 마지막에 서 있는 놈이야.’
‘오냐, 복수의 장소로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이면 더할 나위 없지.’
또한, 리버풀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길 수 있을까?’
‘이상하게 리버풀만 만나면 내가 하던 플레이가 잘 먹히질 않아.’
‘인간 상성이랄까…. 모르겠다. 확실히 이길 수 있을 거란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아.’
그 토트넘마저도 손쉽게 이길 거라고 자신만만했던 포츠머스였건만.
리버풀을 떠올리기만 하면 자기도 모르게 작아졌다.
이는 소하도 알았고 선수들도 알았기 때문에 이렇게 목소리를 드높이는 것이었다.
마치, 공포를 이겨내기 위한 비명처럼.
“우리에게 패배란 죽음이다! 죽기 싫으면 피똥 쌀 때까지 뛸 수밖에 없다! 뛰어난 군인은 가장 오래 싸울 수 있는 군인이다! 뛰어라!”
“써! 옛 써!”
평소에도 힘들다고 정평이 나 있는 포츠머스의 체력훈련이었지만, 이번에는 거의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이토록 지독한 훈련은 입에 단내가 풀풀 풍길 때까지 진행되었고, 어느새 점심시간이 다가왔다.
“많이 뛰었으니 많이 먹어라! 먹는 것도 전투의 일환이다.”
“넵!”
비틀비틀, 후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부여잡으며 식당으로 향하는 선수들이었다.
‘음. 소리를 너무 질렀나. 배고프네. 오늘은 나도 잔뜩 먹어야겠다.’
열심히 소하도 상당히 출출했는지 배를 부여잡고 식당으로 향했다.
아니, 향하려고 했다.
“감독님. 라우라 맥닐 구단주 대리께서 급히 찾으십니다.”
“…왜?”
헐레벌떡 달려온 구단 직원의 말에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가뜩이나 배가 고파 죽겠는데, 여기서 그 얼음 마녀의 얼굴을 봐야 한다?
버틸 재간이 없을 거다.
“밥 먹고 간다고 해요.”
이유를 듣기도 전에 거절했다.
암만 구단주의 대리라고 해도 소하는 포츠머스의 왕!
최소한 밥을 먹을 시간 정도는 주장할 깜냥이 되었다.
“죄송하지만, 무척 시급한 일이랍니다.”
“응?”
“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구단주님에 대한 일이라고 합니다.”
“…흠. 알겠어요.”
구단주, 리처드 맥닐에 대한 시급한 일이라. 혹시?
‘부고 소식인가….’
굉장히 무례한 생각을 하는 소하.
물론, 미래를 알고 있었기에 딱히 걱정은 되지 않아서 한 생각이다.
‘10년 뒤에도 펄펄하니까. 어휴. 그래도 가봐야겠지.’
소하는 주린 배를 쥐어 잡고 라우라 맥닐을 만나기 위해 터덜터덜 걸음을 뗐다.
< 292화. 그 끝에 서서 (8) > 끝
ⓒ 블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