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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머리 천재 감독-289화 (289/306)

<289화. 그 끝에 서서. (5) >

갑작스러운 웅성거림은 태산처럼 침착하게 경기를 운영하던 포츠머스에 혼란을 주었다.

‘어? 골인가?’

‘리버풀에서 골을 넣었나 보군.’

‘울버햄프턴이 넣었다면 환호성이 터져 나왔을 테니까.’

신경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람인 이상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리버풀이 앞선다는 뜻은 이 경기에서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말이기도 했다.

승점 1점 차이의 선두란 그런 것이었다.

비겨도 승점 1점 차이로 2위였고, 지면 승점 2점 차이로 2위.

이는 포츠머스 선수들의 단단한 마음을 조급함이란 감정으로 녹여버렸다.

[포츠머스가 공세를 강화합니다! 제법 굵어진 빗줄기를 뚫어내며 총공격합니다!]

[하지만, 조금 조급해 보여요. 팀의 합이 조금씩 엇나가고 있습니다. 침착함을 되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기세는 올랐으나, 정밀함이 떨어졌다.

악천후 속에서 훌륭한 플레이를 만들기 위해선 침착함이란 절대적인 조건.

이 절대적인 전제조건을 놓친 포츠머스의 공격이 날카로울 리가 없었다.

“좋지 않군요.”

밀러는 손톱을 깨물며 불안해했다.

상황이 너무나 좋지 않았다.

어느덧 시간은 전반 30분.

전반전의 종료가 15분밖에 남지 않았음에도 골이 들어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제는 단단히 움츠린 거북이 같던 크리스털 팰리스의 역습이 늘어나고 있었다.

조급함, 잦은 실수, 상대의 기회.

역습이란 철퇴를 맞고 침몰하는 강팀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니던가!

불안하고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더욱 불안한 사실은 그 누구보다 믿는 성소하라는 감독이 아무런 움직임도 없다는 거다.

‘무슨 생각이실까?’

슬쩍 곁눈질한 소하의 표정은 담담하기 그지없다. 다른 날 같았으면 불같이 성질을 내며 고래고래 고함쳤을 텐데.

비가 와서 그런지 제법 센티해 지기라도 한 걸까?

“뭘 봐요?”

시선을 느낀 소하가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돌렸다.

“아니, 감독님답지 않게 조용하셔서요. 마치, 첫사랑에게 초콜릿을 선물하는 수줍은 소녀 같달까.”

“…요즘 말재주가 제법 좋아지셨네요. 역시 대문호의 나라, 잉글랜드의 피가 흐른다 이거죠?”

“전 지금 굉장히 심각합니다. 감독님.”

평소와 달리 밀러의 목소리에 장난기가 하나도 없자, 소하의 눈빛도 제법 진지해졌다.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네?”

“말 그대로예요.”

“선수들이 알아서 깨우칠 거라는 겁니까? 그렇기엔….”

너무 늦지 않겠냐고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분명 소하도 생각이 있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하지만, 소하는 이러한 밀러의 믿음을 산산이 깨부숴버렸다.

“글쎄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더욱 초조함이 심해질 거 같은데요?”

태연한 목소리와 말의 내용이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밀러의 심정은 점점 복잡해져만 갔다.

“큼큼.”

우물쭈물.

뭐라고 하고는 싶은데 또 하지는 못하는 상황이라 표정이 엉망으로 변한 채 헛기침만 흘렸다.

그 모습이 제법 재밌었는지, 소하는 작은 웃음을 터뜨리며 밀러가 잊고 있는 점을 알려줬다.

“풉. 아저씨. 아저씨가 놓친 부분이 하나 있어요. 바로, 현 상황이 얼마나 좋지 않은지 알지도 못하는 애가 있다는 걸요.”

“네?”

“그러니까, 리버풀이 이기고 있는 상황이 우리에게 얼마나 좋지 않은 상황인지에 대해서 감히 짐작도 하지 못하는 선수가 있다고요.”

“그런 돌대가리가 어디 있…. 아!”

자기도 모르게 한 선수의 지능을 무참히 헐뜯으려던 밀러는 깨달음을 얻었다.

“누구긴 누구겠어요. 돌대가리 계의 황제, 우리 조쉬 킹이 있잖아요?”

“하기야….”

“잠깐 동료들의 분위기에 휩쓸렸지만, 곧 정신을 차릴 거예요.”

“어떻게 말입니까?”

“기회라고 생각하겠죠.”

자신감 있는 소하의 확언이었지만, 아직도 밀러는 이해하지 못했다.

***

후반 35분.

팀의 이상한 분위기에 휩쓸려 붕 떠버린 조쉬 킹은 무슨 상황인지 전혀 파악하고 있지 못했다.

‘뭐야? 갑자기 왜들 이렇게 급하게 하고 있는 거지?’

그도 사람인 이상 쥐꼬리만 한 눈치는 있어서 리버풀이 골을 넣었단 사실은 알았다.

‘그런데 리버풀이 골을 넣었는데 어쩌라고?’

소하의 말처럼 처한 상황에 대해서 아예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왜 동료들이 다급해졌는지 의문만 생겼을 뿐이다.

그렇게 워낙 단순한 성격이라 동료들의 조급함에 30여 분을 질질 끌려다닌 조쉬 킹.

문뜩, 그의 머릿속에 기적의 논법이 완성되었다.

‘내가 왕이 될 기회다!’

뚱딴지같은 발상이었다.

이러한 결론이 나온 이유는 조쉬 킹답게 매우 간단했다.

뭔지 모르겠지만 동료들이 못한다.

내가 골을 넣는다.

동료들이 기운을 차린다.

날 왕으로 받든다.

영장류가 맞나 싶을 정도로 단순하면서도 호쾌한 도출이었다.

하지만, 위기에 처한 포츠머스의 현 상황을 한방에 타계해줄 묘수이기도 했다.

그야말로 주운 로또 용지가 당첨된 격!

조금 늦은 감을 제외하고선 나무랄 데 없는 완벽한 결론이었다.

‘좋아. 해 볼까.’

조쉬 킹은 집중력을 되찾았다.

난데없는 빗줄기와 동료들의 조급함에 잃어버렸던 그 집중력을 회복했다.

“…!”

이를 가장 먼저 눈치챈 선수는 같은 팀의 동료도 아닌 상대 팀의 아론 완비사카였다.

훗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하며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는 유망주!

비록 공격적인 재능이 부족해서 만개하진 못했지만, 태클 실력 하나만큼은 월드클래스인 선수다.

전반 35분간 제법 수월하게 조쉬 킹을 막아내던 그는 단박에 조쉬 킹이 변했음을 알아차렸다.

‘분위기랄까…? 중압감? 느껴지는 힘의 크기가 달라졌어.’

한 번의 부딪침으로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간 세계 최고의 자리를 노린다는 선수치고는 너무 가벼웠는데, 어느 순간 너무나도 무거워졌다.

“후읍.”

폐 가득 숨을 들이켜는 조쉬 킹의 모습이 아론 완비사카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사라졌다.

“엇?!”

그저, 빗방울 때문에 눈을 잠깐 깜박거렸을 뿐인데.

그 찰나의 순간에 어느새 조쉬 킹의 숨결이 바로 옆에서 들렸다.

“….”

아론 완비사카는 반응조차 할 수 없었다.

너무나 빨랐고 그렇기에 두려웠다.

윙포워드치고 키가 큰 편인 선수라고는 믿을 수 없는 가속력이었다.

인간임이 의심스러웠기에 무서웠고 그래서 몸이 반응하지 못했다.

그리고 잠시나마 공포에 짓눌린 대가는 곧바로 돌아왔다. 그것도 혹독하게.

[조쉬 킹의 침투와 더불어 오늘 조금 다급해 보이는 델리 알리가 공간 패스를 찔러 넣어줬습니다!]

[다만, 이번에도 조금 급했는지 패스가 길었어요!]

델리 알리의 패스는 생각보다 길었다.

그러나 조쉬 킹의 속도는 더욱 빨랐다.

사람은 패스보다 빠를 수 없었건만.

적어도 비슷한 속도로 달릴 괴상한 생물체는 존재한다고 울부짖는 광경이었다.

[공을 잡는 조쉬 킹! 조금 길었던 패스를 엄청난 속도로 받아냅니다!]

[놀라워요! 저 패스를 받아낸 속도도 놀랍지만, 비가 내리는 상황에서도 공을 정말 완벽하게 잡아내는 기술이 더욱 놀랍습니다!]

심지어 그냥 잡아낸 것만이 아니었다.

패스를 트래핑함과 동시에 자신의 진로와 공의 방향을 중앙으로 바꾸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스널의 전설적인 공격수, 데니스 베르캄프라고 착각할 만큼 놀라운 솜씨였다.

‘오, 운이 좋았다.’

단순한 운이었다.

하지만 운이란 노력하는 자에게만 찾아오지 않던가.

자고로 로또도 사야 당첨되는 법!

이렇듯 되찾은 집중력과 운이라는 막을 수 없는 힘까지 등에 업은 조쉬 킹은 그야말로 무인지경이었다.

[거침없이 질주하는 조쉬 킹!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가 드디어 단단한 암반 같던 크리스털 팰리스의 수비벽에 균열을 만들어냈어요! 이것이 바로 크랙이에요!]

크랙!

깨부순다는 의미를 가진 단어.

축구계에서는 질기고 질긴 현대축구의 수비벽을 뚫어내는 보석 같은 선수들을 부르는 말이다.

자고로 강팀이라 부르는 팀이라면 이러한 유형의 선수가 하나는 무조건 있었다.

그리고 이 순간, 이 공간에서 조쉬 킹은 더할 나위 없는 크랙이었다.

‘위험하다.’

크리스털 팰리스의 오른쪽 수비수, 제임스 톰킨스는 위기를 감지했다.

곧바로 조쉬 킹을 격추하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헛수고였다.

-슉슉슉슉.

브라질의 호나우두나 우루과이의 루이스 수아레스에 비견될 만큼의 유려한 스텝 오버가 나왔다.

마치 문어가 흐느적거리는듯한 엄청난 발놀림.

100점 만점에 100점을 줘도 충분한 조쉬 킹의 놀라운 스텝 오버에 제임스 톰킨스는 그대로 녹아버렸다.

그의 처지에서 보자면, 조쉬 킹이 유령이 되어 자신을 정면으로 통과한 기분까지 들었다.

[조쉬 킹! 화려한 기술입니다! 저 선수 종종 저런 엄청난 드리블을 보여주죠!]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선수예요. 그냥 짐승이 본능으로만 축구를 하다고 생각하는 게 편해요!]

장내 해설과 아나운서의 비명과도 같은 환호를 뒤로한 채 조쉬 킹은 이제 눈앞에 한 명만 남겨뒀다.

웨인 헤네시.

특출나게 뛰어난 골키퍼는 아니지만 프리미어 리그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골키퍼!

그는 두 눈을 부릅뜨고 집중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상태다.

어깨너비로 벌린 다리는 언제라도 몸을 뻗칠 수 있게 힘을 잔뜩 주었다.

‘분명 강슛이다.’

웨인 헤네시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냉정하게 미래를 예측했다.

극악무도한 대포알 강슛으로 사각을 노리는 길밖에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그로서는 말이다.

하지만, 조쉬 킹은 전혀 다른 생각을 품었다. 유달리 넓어 보이는 웨인 헤네시의 다리 사이가 무척이나 끌렸다.

물론 조쉬 킹은 일단 생각이 떠오르면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짐승 같은 선수였다.

-툭.

무지막지한 돌파와는 다르게 맥없는 슛이 튀어나왔다.

기승전까지 완벽했던 영화가 갑자기 결에서 ‘아, 시발 꿈.’하고 끝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효과는 좋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그 누구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조쉬 킹의 슛 코스는 웨인 헤네시에게 굴욕을 선사했다.

-데굴데굴, 찰싹.

가볍게 골네트를 건드리는 조쉬 킹의 땅볼 슛. 골이었다.

[조쉬 킹이 해냈습니다! 위기의 상황에서 조쉬 킹이 앞서나가는 선제골을 뽑아냈습니다!]

[다시금 포츠머스가 리그 1위를 탈환합니다! 해냈어요! 이제 우승으로 가는 길이 보여요!]

“우랴아아아압! 나를 찬양해라!”

먹구름이 가뜩 낀 하늘을 향해 펄쩍 뛰어오르는 조쉬 킹의 셀레브레이션!

포츠머스의 정신을 일깨워주는 퍼포먼스이자 우승을 향해 다가가는 큰 걸음이었다.

***

“됐어!”

“그거지!”

조쉬 킹의 슈퍼 플레이에 소하와 밀러 또한 미친 듯이 날뛰며 기뻐했다.

이러한 흐름을 제법 예측한 소하마저도 이만큼이나 잘해줄 줄은 정말 몰랐다.

“기어코 해주는구나….”

소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믿고는 있었으나 막상 해주니 너무나도 고마웠다.

과거에는 팀을 배신하고 소하에게 크나큰 상처를 줬던 녀석이었거늘.

이제는 포츠머스의 든든한 기둥이 되어 팀을 이끄는 모습은 그야말로 감개무량했다.

생각해 보면 정말 고마운 선수였다.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알았기에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 누구보다 피나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재능 또한 뛰어나서 키울 맛이 나는 선수이기도 했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조쉬 킹의 모습은 소하에게 성취감이란 소중한 선물을 안겨주었다.

‘결국 문제는 나였다.’

조쉬 킹은 소하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선수이기도 했다.

소하는 기연을 맞이한 인물이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나약한 인간이다.

완전무결한 신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기에 ‘내가 잘해나가고 있는 걸까?’라는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과거와는 전혀 달라진 조쉬 킹의 모습은 이 길이 옳다고 증명해주었다.

소하는 흔들릴 때마다 전해달라진 조쉬 킹을 보며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그래, 녀석은 나의 이정표였어.’

소하가 있었기에 조쉬 킹은 강해질 수 있었고, 조쉬 킹이 있었기에 소하 또한 강해질 수 있었다.

마치, 소년만화의 주인공들처럼.

“후후. 감독님. 원래 인생이란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며 살아가는 거죠.”

미친 듯이 열광하던 밀러가 소하의 심중을 눈치채고 넌지시 말을 걸었다.

“오우. 오랜만에 제법 어른처럼 말씀하시네요?”

“허허. 저는 원래 어른이었습니다!”

“뭐, 첫 1년을 제외한다면 대충 인정해드릴게요.”

“그, 그건….”

시기와 질투에 빠졌던 첫 만남을 떠올리며 허둥지둥, 땀을 뻘뻘 흘리는 밀러.

그리고 이 모습이 재밌다는 듯 바라보던 소하.

이들의 머리를 적시던 세찬 빗방울은 어느덧 점점 약해지기 시작했다.

< 289화. 그 끝에 서서. (5)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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