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머리 천재 감독-288화 (288/306)

< 288화. 그 끝에 서서. (4) >

“우오오오오오!”

경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포츠머스의 홈구장 프래튼 파크는 들썩였다.

정확히는 잉글랜드 남쪽의 작은 항구도시 전체가 흔들렸다.

아니, 도시의 기능적인 면에서 보자면 포츠머스시는 정지했다.

[포츠머스시, 자체적인 공휴일을 맞이.]

딱히 정부 기관에서 임시 공휴일을 선포한 것은 아니다.

그냥 포츠머스시의 시민들이 자체적으로 휴가를 냈다.

포츠머스가 자랑하는 조선소도 최소 인원만 남곤 모조리 휴일을 맞이했으며,

관광지에도 인력을 쥐어짜서 간신히 굴러갈 정도의 인원만 남았다.

더불어 관광명소답게 무수히 많던 음식점도 대부분 문을 닫았다.

그나마 열린 음식점이라고는 축구를 보면서 맥주를 퍼마실 수 있는 술집 정도.

틈새시장을 노린 건 아니다.

그저, 주인장이 가게를 연 상태에서도 축구를 볼 수 있다는 아주 중요한 이유 때문이었을 뿐.

이래저래 관광과 조선업으로 활기를 띠었던 포츠머스는 도시 기능의 거의 마비된 상태다.

이유야 간단했다.

그들이 감히 바라지도 못했던 역사적인 위업이 코앞에 다가왔기 때문이다.

[창단 120주년 만에 첫 1부리그 우승에 도전하는 포츠머스 FC.]

[포츠머스의 축구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도 위대한 도전.]

[앨런 시어러의 블랙번? 그 팀은 최소한 4부리그로 떨어진 적은 없었다. 더욱이 팀이 해체될 위기 또한 없었다.]

수년 전이었다면, 농담의 소재로도 사용하지 않았을 텐데.

꿈이라도 죽어 여한이 없었을 일이 지금은 현실이 되었다.

그러니 도시의 마비는 필연적인 일일 뿐이었다.

-펄럭. 펄럭.

포츠머스의 집마다, 건물마다 포츠머스의 깃발이 나부꼈다.

거리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푸른 옷을 차려입은 포츠머스 시민들로 가득 찼다.

경기 시작은 영국 시간으로 오후 3시였지만, 푸른 물결은 아침부터 시작됐다.

경기 시간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그 푸른 물결은 점점 덩치를 불려갔다.

경기 시작이 30여 분 정도 남자, 포츠머스에는 푸른색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

아마, 하늘에서 바라본다면 해일에 집어 삼켜진 도시의 모습이리라.

-펄럭. 펄럭.

프래튼 파크 또한 쉴 새 없이 포츠머스의 푸르른 깃발이 휘날렸다.

경기장이 열리자마자 전 좌석을 가득 메운 관중들이 계속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너훈아 콘서트보다 예매가 어려웠던 치열한 예매 현장의 승리자들!

승리를 만끽하며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는 그들의 표정은 희망에 반짝이기도 했으며 불안감에 조금 굳어있기도 했다.

최고의 날이 왔다는 희열.

최악의 날이 될지도 모르는 공포.

상반된 감정이 공존하며 휘몰아치는 프래튼 파크의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어만 갔다.

“포츠머스! 포츠머스! 포츠머스!”

“우승! 우승! 우승! 우승!”

“우린 할 수 있다!”

작게나마 존재하는 공포.

이를 떨쳐내기 위한 발버둥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감정의 용광로를 만들어냈다.

-툭, 툭툭.

너무나 뜨거웠던 탓일까?

미친 듯한 열기를 자랑하던 프래튼 파크와 포츠머스시의 하늘에서 작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신의 위로인지.

혹은, 불안의 시작인지.

자연현상에 의미를 부여하기 좋아하는 인간이 도저히 예측할 수 없었던 비구름은 점차 짙어만 갔다.

-후두두둑.

고양이의 수염처럼 가늘었던 빗줄기는 제법 굵어졌다.

몰려나온 사람들을 집으로 돌리기엔 미약했지만, 어깨를 적시기엔 충분할 정도로.

“비잖아….”

“참, 날씨 한번 지랄 같다니까.”

“이 정도 비쯤이야 잉글랜드 인에게는 삶 그 자체지.”

“하여튼 기상청 놈들은 날씨를 제대로 맞히는 꼴을 못 봤다니깐.”

딱히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

잉글랜드에서 이런 비쯤은 늘 따라오는 날씨였으니까.

일기예보를 맞추지 못한 불만만 있었을 뿐. 이들의 열기를 가라앉히기엔 역부족했다.

그래도 갑작스레 내리기 시작한 비는 왠지 모르게 가슴을 울렁거리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포츠머스의 18-19시즌의 마지막 프리미어 리그 경기는 이렇듯, 우천 경기였다.

***

포츠머스의 마지막 리그 경기의 선발을 수놓은 선수들은 다음과 같았다.

[GK: 아론 람스데일.

LB: 앤디 로버트슨.

CB: 케빈 도슨.

CB: 후벵 디아스.

RB: 아슈라프 하키미.

DM: 데클란 라이스.

MC: 칼빈 필립스.

MC: 델리 알리.

LW: 조쉬 킹.

RW: 도봉산.

ST: 에링 홀란드.]

챔피언스 리그 4강, 2차전을 쉬면서까지 이날을 준비해온 정예병들이었다.

기적을 써 내려온 포츠머스가 낼 수 있는 가장 강한 패!

그야말로 기적의 주인공들이었고, 어째서 소하가 바이에른 뮌헨과의 1차전에서 전력을 다했는지 알 수 있었다.

만약, 2차전까지 100% 승부를 했다면 이 정도로 완벽한 포진을 짤 순 없었을 터.

여러 경기를 왜 한 경기로 묶어서 계획을 짜는지 알만했다.

부상 재활 중인 모하메드 살라를 제외하고선, 120년을 자랑하는 포츠머스의 역사상 최강의 선발명단이었다.

이에 맞서는 크리스털 팰리스도 부상자 하나 없이 최고의 조합을 가져왔다.

[GK: 웨인 헤네시.

LB: 패트릭 판안홀트

CB: 마마두 사코.

CB: 제임스 톰킨스.

RB: 아론 완-비사카.

MC: 루카 밀리보예비치.

MC: 제임스 맥아더.

LM: 안드레스 타운젠트.

RM: 윌프리드 자하.

ST: 크리스티안 벤테케.

ST: 미시 바추아이.]

크리스털 팰리스의 상징, 4-4-2를 기반으로 한 단단한 선발명단이었다.

수준급 4백과 엄청난 윙어들의 주력을 바탕으로 한 선 수비, 후 역습!

마치, 석기시대나 공룡 같은 고대의 전술이었지만, 크리스털 팰리스는 이걸로 계속 프리미어 리그에서 살아남았다.

즉, 이 분야에서는 장인이라는 뜻.

암만 구닥다리 전술이라도 장인의 경지에 오르면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더군다나 크리스털 팰리스의 프랜차이즈 스타, 윌프리드 자하는 정말 위협적인 존재였다.

비록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실패를 맛보긴 했지만, 이쪽 업계에서는 ‘선생님’으로 통했다.

신입 풀백이 리그에 데뷔할 때마다 사랑이 가득 담긴 드리블로 농간해주는 스승의 은혜!

현 프리미어 리그, 최고의 풀백이라는 리버풀의 아놀드도 호되게 가르침을 받고 실력이 향상됐을 정도다.

따라서 이번 경기의 중점도 자연스럽게 측면 싸움으로 집중됐다.

[자하와 하키미의 대결. 포츠머스의 오른쪽, 크리스털 팰리스의 왼쪽이 이번 경기의 격전지일 것.]

[포츠머스에서 2년을 보낸 아슈라프 하키미가 드디어 윌프리드 자하와 맞붙게 되었다.]

2년이란 제법 긴 시간 동안 포츠머스에서 뛰었음에도 처음 성사된 대결이었다.

초창기엔 아직 선발이 아니어서, 지금은 로테이션 정책 때문에 계속 연이 엇갈렸거늘.

드디어 만난 스피드스터들의 대결은 누가 봐도 흥미로워질 예정이었다.

그렇게 수많은 것들이 담긴 프리미어 리그, 38라운드는 어느덧 시작이 코앞까지 다가왔고,

“나왔다! 선수들이 나왔다!”

“이제 시작이다!”

“우승으로 가자!”

양측 선수들이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내자 프래튼 파크는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내리는 빗방울마저 태워버릴 듯한 기색이었다.

***

경기 시작 전, 포츠머스의 라커룸은 평상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두런두런 경기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혼자 정신집중을 하는 등, 불안감에 휩싸인 모습과는 동떨어졌다.

그래도 얼굴 사이에서 언뜻 보이는 비장함과 결연함은 분위기를 제법 진지하게 만들었다.

-덜컹.

라커룸의 문이 열리고 소하가 등장하자, 선수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자세를 바로잡고 시선을 한데 모았다.

“….”

소하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콧대를 조금 치켜든 자세로 주위를 훑어보았다.

-꿀꺽.

알 수 없는 위암감에 선수들은 마른침을 내 삼켰다.

평소 입만 열면, 천하의 개망나니가 따로 없었지만, 이렇게 입을 다물고 근엄한 표정을 지으니 사뭇 느낌이 다르다.

‘맞아. 눈앞의 이 남자는 세계 제일의 감독 중 하나이셨지.’

‘맨날 이상한 모습만 봐서 간과했는데, 감독님이야말로 정상에 가장 가까운 인물.’

‘와…. 저 포스 봐라….’

절로 마음이 든든해졌다.

워낙 행실이 이상해서 간과했지만, 눈앞의 저 젊은 남자야말로 최고였다.

새삼스레 생각해보면, 국가대표팀에 합류할 때마다 대표팀 동료들에게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소하에 대한 것이었다.

‘성소하 감독님 어떠냐?’

‘진짜 멋지시던데. 어떤 스타일이야?’

‘나한테 관심 없으시데?’

‘부럽다. 전설적인 감독님의 지도를 받고. 넌 운이 더럽게 좋은 거야.’

‘내 꿈은 성소하 감독님이 이끄는 팀에 합류하는 거지.’

각국의 국가대표라면, 그 나라에서 가장 축구를 잘하는 선수들이다.

그런 선수들에게마저도 ‘성소하’란 세글자는 말 그대로 선망의 이름이었다.

6년 만에 4부 리그에 속한 팀을 최정상에 올려둔 전설적인 감독!

4부리그 선수를 국가대표급으로 성장시킨 희대의 지도자!

만 34세의 나이로 유럽 축구계를 평정한 승부사!

가까이서 봤을 땐 체감이 되지 않았지만, 그들을 이끄는 감독은 이미 전설이었다.

이 사실을 다시금 상기하자 어느새 마음속에 미약하게나마 존재했던 불안감이란 감정이 눈이 녹듯 사라졌다.

“….”

한결 더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변한 선수들을 바라보는 소하.

제법 만족스러웠는지 입가에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띠며 짧게 명령했다.

“우승하러 가자.”

많은 말은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선수들 또한 다른 대답이 필요하지 않았다.

“네!”

그렇게, 포츠머스의 선수들은 위풍당당하게 프래튼 파크의 푸르른 잔디 위로 걸음을 옮겼다.

***

-삑!

포츠머스의 홈구장, 프래튼 파크에서의 이번 시즌 마지막 경기가 시작되었다.

선공은 크리스털 팰리스.

제법 굵어진 빗방울이 시야를 어지럽혔지만, 결코 주눅 들지 않은 모습이다.

하기야, 이들 또한 ‘생존’을 걸고 벼랑 끝에 몰린 투사들!

포츠머스가 가진 우승에 대한 열망만큼이나 강한 생존본능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흠. 제법 어려운 경기가 될 거 같네요.”

소하는 활활 타오르는 크리스털 팰리스 선수들의 눈빛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이에 포츠머스의 안주인, 잭 밀러 수석코치가 심각한 표정으로 맞장구를 쳤다.

“그렇습니다. 간절함만큼은 우리와 비교해서 절대로 뒤떨어지지 않는 모습이네요.”

“맞아요. 게다가 비도 제법 거세고.”

엄청난 빗방울을 아니었지만 플레이에 지장이 갈 수준은 되었다.

이는 포츠머스에게는 악재이며 크리스털 팰리스에는 호재였다.

“잉글랜드에서 킥&러쉬 전술이 유행한 이유는 이런 더러운 날씨 덕분이죠. 안 그렇습니까? 감독님?”

“다 아는 사실을 혼자만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지 마세요. 부끄러우니까.”

“…너무하십니다.”

소하의 장난스러운 반격에 밀러는 잔뜩 풀이 죽었다.

그랬다.

날씨가 더럽기로 소문난 잉글랜드는 소위 말하는 뻥축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요즘에야 설비가 최신식이라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지만, 예전에는 정말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잦은 비는 경기장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고, 덕분에 기술&패스 축구는 꿈도 꾸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기장의 영향을 덜 받는 긴 패스 한방으로 상대의 골문까지 공을 옮기는 전술은 필연적이었다.

그리고 이 특징은 현대까지도 이어졌다. 암만 경기장 상태가 좋아졌어도 비가 오는 날에는 선이 굵은 축구가 영향을 덜 받았다.

“우리 팀은 제법 기술 축구 아니겠습니까? 홈경기인데 날씨는 우리 편이 아니군요…. 이럴 거면 차라리 원정경기가 나았겠습니다.”

“뭐, 우리도 여차하면 뻥축구로 전환하면 되니까요.”

밀러는 걱정이 한가득했지만, 소하는 자신감을 잃지 않았다.

뻥축구라.

포츠머스의 스타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시도하지 못할 축구는 아니다.

조쉬 킹을 비롯한 몇몇 선수들은 오히려 뻥축구에 최적화된 선수들이었으니까.

그냥 체급으로 밀어붙이는 것도 아주 가능했다.

“그나저나, 리버풀의 상대는 어디라고 했죠?”

“…응? 모르십니까?”

“네. 우리 팀 경기만 신경 쓰느라….”

“…울버햄프턴입니다.”

“호오….”

“제법 어려운 팀이죠.”

이건 호재였다.

울버햄프턴이라면 ‘포르투갈 커넥션’으로 상당히 까다로운 팀이 아니던가.

후벵 네베스.

라울 히메네스.

디오구 조타.

후이 파트리시우.

등등 체급에 걸맞지 않은 훌륭한 선수들이 수두룩한 팀이다.

“울버햄프턴이 리버풀을 발목을 잡아줄지도 모르….”

소하의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아니, 갑작스럽게 웅성거리는 프래튼 파크의 소음에 파묻혔다.

그렇다고 경기장에서 이변이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

“….”

소하는 직감했다.

프래튼 파크가 아닌, 저 멀리 떨어진 리버풀의 안필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리버풀이 전반 9분 만에 선제골을 달성했다는 소식입니다!]

[사디오 마네의 선제골로 앞서나가는 리버풀! 이제! 순위표가 뒤바뀌었습니다! 리버풀이 1위로 올라갔고, 포츠머스가 2위로 내려갔습니다!]

반년 넘게 지켜왔던 1위의 자리를 넘겨주는 순간이었다.

“…말을 말아야지.”

소하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역시나, 기적은 결국 자기 손으로 이루어야 하는 법이었다.

< 288화. 그 끝에 서서. (4) > 끝

ⓒ 블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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